우리는 왜 갈등을 죄악시하는가? - 화합이라는 이름의 장벽
사회는 다양한 생각과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곳이다. 각자의 처지와 환경 그리고 살아온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또한 각자가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가가 다르기 때문에 이해관계도 상반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여 살아가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결코 그 자체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며 도리어 인간사회의 발달을 위해 필요한 사실이다. 우리는 ‘다름’을 ‘틀림’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설령 그것이 ‘틀림’이라 할지라도 억압적인 방법으로 이를 소멸시키거나 해소시켜도 안 된다. ‘틀림’이란 인간이 불완전 존재이기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며 그것을 통해 인간은 성숙해 갈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아기가 걸음마를 통해 제대로 된 걷기를 배우며 걸음마 과정에서의 실패는 피해야할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성장통인 것이다. 성장통 없는 성장은 가능하지도 않지만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그 성장은 진정한 성장이 아닐 수 있다. 성장이란 그 결과 못지 않게 과정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성장통을 거부하고 그냥 성장하기만 바라는 ‘조급증’이 두드러지고 있다. 어렸을 때 형제자매끼리 다투거나 싸우면 어른들을 이렇게 말한다. ‘싸우지 말아. 싸우는 것은 나쁜 거야’ 말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화해를 시키기 위해 악수를 강요하거나 사과를 시키는 것으로 사태를 조속히 마무리하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귀찮기 때문이다. 갈등을 해소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서 화해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피하고 사태가 수습되도록 하는 것이 너무나 일상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
이러한 사고방식은 비단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가까운 나라 일본, 세계최강의 나라 미국에서도 보여지는 현상이다. 일본은 ‘화(和)’를 중시하는 나라이며 그들 민족의 이름을 ‘대화(大和)’라고 부를 정도이다. 미국도 일본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외에는 건국 이래 내부의 대립으로 커다란 혁명이나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는 나라이다. 오히려 일본의 경우 근대 이전에는 나라가 분열되어 끊임없이 싸우는 과정에서 발달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일본 역시 근대화과정에서 치열한 내분은 없었다.
이와 대조적인 것이 바로 유럽이다. 유럽이라고 해도 동유럽과 서유럽은 오랫동안 별개의 존재로 발전해 갔다. 서유럽은 고대 로마제국(엄밀히 말하면 서로마제국)의 붕괴이후 분열과 대립으로 점철된 역사를 써갔다. 그것은 동로마제국이 15세기까지 건재하며 질서를 잡았고 그 후에도 이슬람의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아 비교적 안정적인 역사를 보인 동유럽과도 대조적이다. 서유럽의 분열과 대립은 서유럽이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게 만든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일본도 비슷한 역사를 썼지만 문제는 일본이 좁은 세계였기에 외연적인 확장성이 부족해 결국 ‘화’로 귀결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서유럽의 분열과 대립은 지리상의 발견을 가져와 서유럽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온다. 지리상의 발견에 앞장선 서유럽은 지중해와 중동 중심의 문명에서 소외된 미개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지리상의 발견은 대서양 시대를 열어 서유럽의 발전을 촉진한다. 이른바 ‘뒤로 돌아 뛰어’가 이러한 역전을 만든 것이다. 신대륙의 막대한 금과 은 그리고 각종 물자의 유입은 뒤떨어졌던 서유럽을 단시간에 최고의 번영으로 이끌기 시작한다. 그들은 구대륙을 향한 진출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오늘의 세계화를 가져오는 초석을 만들었다. 산업혁명은 그러한 기반을 통해 일어나게 되었고 그것은 서유럽국가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분열과 대립 그리고 발전은 내부의 갈등을 폭발시켰다. 절대왕정의 성립, 시민혁명, 민주혁명 사회주의 혁명 등은 그렇게 일어났다. 생산력의 발전이 생산관계의 모순을 통해 새로운 생산관계를 가져온다는 마르크스의 분석은 바로 이러한 혁명과 변화를 경제발전에 따른 결과임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게 서유럽은 밖으로 팽창하면서 내부에서 갈등의 첨예화를 통해 변화되고 발전되어 19세기 ‘사상의 전성기’가 태어났다.
이것은 ‘화합’이라는 이름으로 안정시킬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유럽 나아가 오스만제국의 약화로 안정을 잃고 분열과 대립의 구도로 나아간 동유럽 그리고 동방의 신흥강국 러시아가 가담하게 되어 갈등이 더 크고 복잡하게 되었다. 미국과 일본 우리가 하나의 정치체제를 기반으로 ‘화합’을 외친 것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다양한 민족과 지리적 기반이 가져온 다양성은 유럽에 갈등과 그 해소를 통한 성숙을 가져온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사상 철학 문화는 세계 각 지역에 퍼져나갔다. 우리는 물론 일본 나아가 유럽에 뿌리를 둔 미국조차 그것은 ‘외래문화’의 이식에 불과했다. 미국의 시계는 독립과 더불어 사실상 멈춰버렸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넓은 영토와 풍부한 자원 이민의 대량 유입으로 갈등을 표면화하기보다는 개척과 성장 발전에 여념이 없게 되었기에 이러한 ‘외래문화’가 깊이 뿌리 박을 기반이 약했다. 일본은 그에 비해서는 보다 더 적극적이었으나 ‘화합’의 벽에 부딪혀 제대로 자리 잡기 어려웠다. 우리는 일본을 통해 도입을 했으니 그 뿌리가 허약했고 게다가 남북분단으로 강요된 ‘화합’에 억눌려 버렸다.
스스로 생각하고 성숙하지 않은 채 결과만 받아들이는 것이 가지는 한계를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의 역사는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갈등은 스스로 해결해야 진정한 성숙을 가져오는데 이들 나라들은 ‘화합’의 벽에 가로막혀 제대로 성숙할 기회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외래 문화의 도입이 어느 정도 변화를 가져왔으나 근본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화합’에 대한 집착은 이들 나라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갈등을 죄악시함으로써 강요된 화합이라는 장벽이 성숙을 방해하고 있다. 갈등을 보면 그것이 왜 일어났고 어떻게 해야 해결될 수 있는 가를 고민하기보다는 그저 빨리 악수하고 화합하고 통합하라는 목소리가 높아간다. 이른바 ‘묻지마 화합’이다. 하지만 그렇게 얻어진 화합은 강요된 ‘거짓된 화합’이며 결국 문제의 해결은 미뤄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보다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아이가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지 말고 다시 일어나 걷도록 독려하는 것이 아이의 성숙에 훨씬 도움이 될 것임은 자명하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갈등이라는 문제를 조속한 화합이나 통합으로 봉합하여 표면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일종의 기만적 대책일 뿐이며 현실은 조금도 바뀌지 않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아프더라도 귀찮더라도 갈등을 제대로 해결할 노력이 선행되어 그것이 자연스러운 화합을 가져올 때 사회는 진정한 성숙을 이룰 수 있음을 잊지 말자. 화합은 장벽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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