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아들아, 가끔은 머뭇거려야 인생 이란다 제2부 아들아! 짐을 내려 놓아라(7) 아들아 남이 아닌 너 자신을 위해 살아라

닥터 양 2015. 2. 26. 11:18

아들아, 가끔은 머뭇거려야 인생 이란다

제2부 아들아! 짐을 내려 놓아라

 

(7) 아들아 남이 아닌 너 자신을 위해 살아라

 

어떤 일간지 신문에 여자소설가가 ‘남자를 위한 심리학’ 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연재하고 있다. 아빠도 처음에는 기대를 걸고 읽었지만 역시나 하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남자를 위하여’라는 제목과는 달리 그 글은 ‘여자를 위하여’ 라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수법이 매우 교묘해 마치 남자들을 위한 것처럼 읽히기는 하지만 아빠에게는 통하지 않는 거지.

다른 여자 컬럼리스트는 자신의 글에서 남자들에게 아내를 상사로 모시라고 하는 글을 쓰더라. 정말 어처구니가 없구나. 그 이유가 아내를 상사로 모시면서 직장에서 살아나는 처세술을 배운다고 한다. 그런 처세술은 직장에서 이미 실컷 배우고 있는데 집에 와서까지 눈치를 보며 상사를 모시라니. 조금은 미안했던지 마지막에 몇 줄로 여자들도 남자를 그렇게 해 주면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 재수 없는 인간이지.

상대에게 당근과 채칙을 주어 길들이는 방법은 이미 낡아 빠진 수법이지만 그래도 잘 통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애용한단다. 사람들은 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 설득에 나 선다. 하지만 그것을 노골적으로 말하면 설득이 힘들어진다. 그래서 늘 상투적으로 쓰는 수법이 있다.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 ”라고. 유치원어린애부터 80먹은 노인에게까지도 이 t법은 통한다. 신기하기 이를 데 없다.

부자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동원하는 것이다. 그것을 극단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이 이른바 다단계상법이다. 사람들을 동원해서 자기 수하에 두고 그들이 판매하는 매상의 대부분을 가지고 가는 것이 다단계이다. 정상적인 영업조직이라면 판매한 사람에게 가장 많은 이익이 돌아간다.

보험회사에서 영업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피라미드조직은 있어도 위의 조직은 박리다매식으로 이익을 얻지 판매한 사람의 이익을 더 많이 가져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단계는 역이다. 윗선에서 아무것도 안하는 자들이 이익의 대부분을 가져간다. 그러니까 그들은 물건이나 서비스를 판매하려고 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이다. 땀흘리지 않고 남을 동원하는 것이 가장 손쉽게 돈을 버는 방법이며 다단계는 그 정수를 보여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도 윗단계로 올라가면 이렇게 쉽게 벌 수있어 라고 하지만 그런 단계까지 올라 갈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은 하수인 노릇만 하다가 그대로 사라진다. 사라져도 아쉬울 것은 없다. 새롭게 충원하면 되니까.

아빠도 그런 조직에 들어간 적이 있어. 산소배출기를 파는 회사에서 잠시 있었지. 자신들은 다단계가 아니라는 말과는 달리 영락없는 다단계였단다. 몇 대 팔아 지점장이 되면 놀고 먹을 수 있는 곳이더라. 위로 올라가면 꽤 좋은 수입을 얻어 가지. 하지만 실제로 일은 하지 않는단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팔아주면 대부분의 이익은 위로 흡수되고 본인의 몫은 매우 적지. 그렇게 해서 임무(?)를 수행하고 나가면 그들은 새로 사람을 모집한단다. 그렇게 밑의 사람들이 교체되는 동안 윗선의 사람들은 사무실에서 그들에게 격려의 말이나 하면서 팔도록 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다단계서 판매되는 물건들은 직거래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비싸단다. 그렇게 해서 폭리를 취하면서 놀고 먹으려니 그렇게 될 수 밖 에 없지. 하지만 밑에서 일한 사람들은 손해를 보지 않으면 다행이란다.

아빠의 친구가 휴대폰다단계회사에 들어가 큰 손해를 보았단다. 나에게도 하라고 해서 일단 가보았다. 설명을 들어보고 이것은 다단계구나 싶어 거부했다. 판매이익의 대부분을 위에서 흡수하는 것이 영락없는 다단계인데 왠일인지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더라. 어이가 없어서. 모두가 돈 벌 생각에 이성이 마비된 것 같더라. 친구도 계속 권했지만 아빠는 단호히 거절했고 친구에게도 나오라고 했지만 그는 결국 수 백만원의 손해를 보고서야 나왔단다.

사기의 본질은 인간의 탐욕을 이용하는 것이란다.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큰 돈을 벌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여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동참하게 만드는 것이지. 나중에 항의해 봐야 스스로 한 것이기에 어쩔 도리가 없는 경우도 많단다. 친구의 경우도 스스로 자기 돈으로 핸드폰을 구입했으니 누가 뭐라 하겠는가? 억울해도 어쩔 수가 없다.

학교선생님도 이런 짓을 할 수 있어. 뭐? 학교선생님이 다단계를 한다고? 그럴 리가. 물론 아니다. 아들아. 그런 선생님은 있다 해도 극소수란다. 하지만 학생들을 설득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동원하려고 하는 마음은 선생님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선생님이 그나마 나은 것은 그것이 대부분의 경우 이른바 윈윈이 되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성적을 올려 유능하고 좋은 교사라는 명예를 얻고 싶어할지 모른다 그런 것은 학생들에게도 좋은 것이지. 그렇게 해서 학생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된다면 서로가 좋은 거니까. 이른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 라고 할까?

하지만 세상에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예전에 이런 일들이 있었지. 내가 아는 사람이 서울대철학과를 다니다가 한양대 법대를 다시 입학하고 나중에 인하대 경영학과로 다시 입학해 졸업한 일이 있어. 처음에 서울대 철학과를 가려고 한 것이 아니라 법대를 지망했지만 그만 성적이 미달해서 떨어졌고 2지망으로 철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단다.

그런데 그가 서울대 법대를 지망하려고 하자 그의 담임은 맹렬히 반대를 했단다. 왜냐고? 어차피 떨어질 거니까 미래를 생각해서? 명분은 그렇지. 하지만 담임선생님의 진짜 목적은 그가 서울대에 붙을 경우 받을 수당이 탐나서란다. 제자의 미래보다 수당 몇 푼이 더 중요하다니 어이가 없지?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란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돈보다 일을 하기 위해 직장을 다녀라. 일이 인생에서 중요하다. 회사일을 남의 일이라고 여기지 말고 자기 일처럼 하라” 라 고. 언 듯 일리 있는 말이다. 아빠도 나중에 또 이야기 하겠지만 일이 돈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본가가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그 속셈은 뻔 한 것 아니겠는가? 급여나 근무환경에 대한 불만을 갖지 않도록 하여 비용을 절감하겠다는 것이지.

예전에 어느 대통령께서 이렇게 말했다. “회사는 직원들을 가족처럼 직원은 회사를 내 집처럼 여깁시다.”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직원들이 회사를 내 집처럼 여기려면 회사가 그들을 가족처럼 대하여야 한다. 함부러 자르지 않고 산업재해가 일어났을 때 돌보아주고 그래야지 가족 아닌가? 마음에 안 들면 바로 자르고 다쳐도 외면하는 그런 가족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그런 말을 되풀이하는 정신 나간 경영자들이 있다. 회사일을 내일처럼 하라고. 내 것이 아닌데 어떻게 내 것처럼 하는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게 해 주면서 그렇게 말했으면 좋겠다. 그런 말을 믿을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서도 안 된다. 회사는 비정하다. 그러니 우리도 비정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좀 더 나은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지 회사 따위는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 맞다. 그들도 우리를 그렇게 버리듯이 말이다.

예전에 회사가 직원을 평생책임지겠다고 한 시대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일했다. 야근은 물론이고 휴일까지 나와 일을 했다. 그러면 회사는 그들에게 나름대로 좋은 보상을 해 주었다. 그것도 엄밀히 말하면 직원을 가족처럼 생각해서가 아니라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수법이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그 열매를 나눠줬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회사가 성장을 하던 말던 그 열매를 제대로 나눠받을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어졌다. 대기업의 마크를 가슴에 새기고 일하면서도 그 대기업의 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열매를 나눠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거든. 일은 그들처럼 하고 대우는 형편없게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열매는 점점 소수의 사람들만의 것이 되고 있지. 고용을 늘리고 그들에게도 열매를 나눠줘도 될 정도의 이익이 생겨도 회사는 은행에 그것을 쌓아둘 뿐이다.

아들아 기러기 아빠를 알지? 기러기 아빠야 말로 이러한 사기적 수법에 넘어간 희생자들이란다. 자식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가족과의 생이별을 하고 인간ATM이 되어 오로지 돈 퍼주는 기능만을 담당하는 아버지들 부탁이니 기러기 아빠라고 하지 말고 인간 현금인출기라고 해다오. 가족이 그리워 방문하려는 남편에게 그럴 돈 있으면 더 부치라는 매정한 말을 아내라는 인간이 있단다. 그렇게 자식을 위하고 싶으면 니가 벌어서 보내세요 라고 하고 싶구나.

아들아! 세상은 생각처럼 아름답지도 이상적이지 않단다. 여러 가지 명분을 들이대고 사람들을 설득하려 들지만 그 명분이란 대부분 아니 전부 자신들의 욕심을 미화시키는 수단에 불과한 것 같아 씁쓸하구나. 그런 설득에 속아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던져버린 사람들도 한 두 명이 아니란다.

예전에 중국의 어느 장군이 자신의 부하의 상처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 주었단다. 그것을 본 그의 어머니가 크게 울었다고 한다. 장군의 사랑에 감동해서 운 것이 아니란다. 아들이 그런 장군의 성의에 감동해서 죽기살기로 싸울 것이니 그게 걱정 되서 운거야. 결국 장군의 그런 속임수에 부하는 나아가서 죽기 살기로 싸우다 죽고 말았단다.

히틀러를 모를 리가 없지? 그는 독일국민을 선동해서 전쟁으로 몰아 넣어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인 살인마란다. 하지만 그는 패망하는 그날까지 독일국민에게 영웅시되었어. 독일민족을 구할 구세주로 여겨졌지. 그러나 결과는 패망이었다. 그의 세치의 혀가 수천만 독일국민은 물론이고 수 십억 인류에게 엄청난 고통을 심어준 거란다.

이런 인간들은 수도 없이 많다. 중국의 모택동은 자신의 거짓선동으로 인민을 속여 수천만을 굶겨죽이거나 처형시켰단다. 스탈린도 수천만을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희생시켰지. 북한의 삼대세습은 김일성일가의 번영을 위해 이루어진 천인공로할 만행이고. 종교를 빙자한 전쟁은 수없이 일어난거 알지? 무엇 때문에 그들은 싸우는가? 정말로 종교를 위해? 밑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아마 그렇게 믿고 있겠지만 그들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다를 거야.

아들아 너를 위해 살라는 것은 결코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가 되라는 소리가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너를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자들이 수없이 많단다. 가족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너의 아내도 믿어서는 안 된다. 결혼조건으로 돈과 능력을 따지는 오늘날의 여자들에게 가족을 위해 묵묵히 희생하는 예전 어머니들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과거의 어머니들이라고 해서 욕구가 없는 천사는 아니었다. 하물며 오늘날이야 말해 무엇 하랴

심지어 너를 낳아준 부모조차도 완전히 믿지 마라.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그런 교훈을 주는 구나. 자신이 반대하는 결혼을 한 아들의 직장앞에서 아들을 해고하라고 피켓시위를 벌인 엄마의 이야기를 아니? 반대하는 결혼을 한 것이 무슨 죽을 죄라고 그렇게까지 하니? 아들의 미래를 망쳐도 자신의 욕심이 더 중요하다는 거니?하지만 이 또한 현실이구나.

예전에는 뱃속의 아이가 딸이라는 이유로 지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단다. 그게 부모라는 존재의 한계구나. 자식에 대한 절대적 사랑? 조건없는 사랑? 어느 개가 떠든 소리냐? 이제는 딸을 낳고 싶어 안달이구나. 이유는 딸이 부모에게 더 잘하니까 란다. 그래 맞아 자신들의 욕구에 맞춰 원하는 성별이 달라지는 구나.

미래에는 맞춤형아기도 가능해진다. 그럼 죄 연예인처럼 잘생기고 예쁘고 아인슈타인처럼 좋은 머리를 가진 천재들만 태어나겠지? 인류가 엄청난 발전을 할 것 같구나. 그런데 그럼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모두가 미남미녀고 천재면.

하지만 아들아! 그래도 세상에서 부모처럼 나를 사랑해 주는 존재는 없는 것 같다. 못된 부모도 있지만 그런 것은 오히려 예외인 것 같구나. 아빠는 그것을 몸소 체험해 왔다. 아빠가 가장 힘들고 괴로울 때 끝까지 아빠를 지켜준 것은 자식도 아내도 아니고 부모님이었단다. 나 뿐 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아들아 효도를 원하지는 않는다. 다만 너를 낳고 길러준 부모님을 소중히 여기고 유대관계를 저버리지 말아다오. 많은 남자들이 아내를 제일로 여기지만 물론 일상적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맞지만 그러나 아내란 언제든지 내게 비수를 돌릴 수 있는 존재임을 잊지 말라. 너의 몰락이나 실패를 그녀들이 용서하고 이해할 가능성은 매우 적구나 .오늘같이 이혼이 일상화된 시대에서는 더욱 그렇단다.

교회에서는 이런 설교를 즐겨 하고 있지. “남자가 부모 곁을 떠나 여자와 한 몸이 된다” 라 고 하는 창세기의 말씀을 가지고 부부중심주의를 강조하는 설교 말이다. 과거에 시댁의 영향력이 막강하던 시절에는 그런대로 좋은 설교였다. 하지만 지금 그런 설교를 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도리어 너의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면 너의 수명이 길어진다는 십계명의 말씀을 좀 더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부부중심주의는 사실 아내들의 힘을 세우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과거 일본이 조선의 독립국임을 힘써 주장한 적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종주국 청나라에서 분리하여 지배하고자 하는 수법이지. 마찬가지이다. 남자가 자기 가족과의 유대관계를 끊어야 아내들은 그를 지배하기 쉽기 때문이다.

아빠는 너에게도 친정을 만들어 주고 싶구나. 친정이란 조건 없이 안식을 주는 곳이란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들에게 친정은 없었다. 아내와 자기 집에 가면 바늘방석이 따로 없단다.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서 마음 고생을 하는 남자들의 마음을 여자들은 죽어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아빠는 너에게 친정을 만들어 주고 싶구나. 마음껏 쉬렴. 그리고 열심히 살아가기 바란다.

아들아 너의 권리를 함부로 포기하지 말고 희생적인 삶을 살려고 하지 마라. 세상은 그런 너를 먹이로 삼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단다.‘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 라는 책을 아니?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도 있단다. 이들이 한결 같이 주장하는 것이 위의 말이다. 남의 눈치를 보고 남에게 칭찬받기 위해 너의 삶을 희생하려고 하지 말라 이것이다.

거짓된 인내에 굴복하지 말아다오. 어떤 무책임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아빠는 분노했다. 큰 아들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수입을 사용해 동생들을 가르치는 등의 희생을 한 사람이다. 그것까지는 그렇다고 해도 이제 부모님이 90대이고 본인도 70대인데 그의 동생들은 그가 부모를 모시지 않는다고 하여 핍박을 한다. 자신에게도 그렇지만 아내에게 그렇게 한다. 평생 시부모를 봉양하고 동생들을 돌본 그의 아내가 무슨 죄가 있는가? 더구나 병이들어 부모를 모실 처지가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것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자식들은 그러지 말라고 하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냥 동생들하고 잘 지내고 싶어한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시달리는 아내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생 자신의 동생들 뒷바라지로 살아온 아내는 희생되어도 좋고 자신의 동생들만 소중한 것인가?

이런 사람이야 말로 철저한 이기주의자인 것이다. 인내를 가장하지만 그냥 어려움에 대처하기를 싫어하고 편하게만 지내려는 사람인 것이다. 그의 자식들이 “차라리 아버지는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아야 했다”고 했다. 그건 서운한 모양이다. 자식으로서 할 소리냐고. 자식들의 그런 말은 서운한데 형제들의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서운하지 않으신 모양이다.

아들아 제발 이런 사람이 되지 말아다오. 잠시의 편안함을 위하여 커다란 불편을 당하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로 인하여 자신의 가족이나 친지가 희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은 은혜를 모르고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알고 대처하면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미생이라는 드라마를 알겠지? 과장은 있을지 모르나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네가 너 자신을 지켜가지 않으면 너는 누군가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잘 못을 해서 감옥에 갇히거나 해서 자유가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이 아닌 다음에야 있지도 않는 속박의 사슬을 스스로 쓸 필요는 전혀 없다. 너는 자유인이란다.

착하게 살지 마라.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살지 마라. 눈치를 과도하게 보며 살지 말라. 너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음을 두려워 말라. 남의 이익을 나의 이익으로 착각하지도 말라. 가족을 위해서 부모를 위해서도 살지 마라. 가족도 부모도 내가 있고 있다. 내가 없으면 가족도 부모도 없는 것이다. 남에 대한 배려와 종속을 혼동하지 마라. 너의 권리를 함부로 포기하지 말고 지켜라. 남의 일까지 떠넘겨 받지 마라.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라.

아들아 부디 노예의 삶이 아니라 주인의 삶을 살아다오. 그래서 너의 삶을 자유케 하여라. 신발의 납덩이를 떼어내야 하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