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제국을 위한 한 걸음
세 번째 정치적 통합체 그 이름 인류공동체
목차
1. 가족은 자격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존재‘였다.’
2. 가족의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1) 가족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 사람들 –이혼과 비혼의 의미
(2) 가족이기주의가 가져오는 문제 – 차별과 불평등의 원천
3. 세계의 정치적 통합이 필요한 이유 –국가민족이기주의
4. 정치적 통합의 모델이 될 세 가지 유형 –로마제국형, 중원제국형, 유럽연합형
5. 공동체정신은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유산
6. 세계의 정치적 통합은 인류공동체이어야 한다.
1. 가족은 자격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존재‘였다.’
여러분은 가족이란 존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세상 모든 민족 국가의 구성원들은 가족이란 존재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살면서 일본사람들이 우리보다는 가족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가족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가족과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그들도 그렇게 말한다. 저는 이 두 가지 사실이 주는 모순을 하나로 일치시키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는 생각 그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가족이란 가족이란 자격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필요 없이 받아주는 집단입니다. 보통 그렇게 개방되어 있는 집단은 끈끈함이 없기 마련인데 가족만큼 끈끈한 집단도 없을 것 입니다. 못났어도 잘났어도 가족은 가족입니다. ‘가족의 자격’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세상은 한 인간에게 너의 가치 효용성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 효용성에 의해 인간을 차별합니다. 너는 얼마짜리 너는 얼마짜리 이렇게. 하지만 가족 안에서 그러한 차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현실은 이러한 이상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공부 잘 하는 자식과 공부 못 하는 자식 사이에 차별이 은연중에 있습니다. 과거에는 아들을 딸보다 우대했습니다. 또 예전에는 아내들이 아이들보다 남편을 더 우대했습니다. 밥상도 따로 차려 주고 (물론 더 맛있는 반찬을 제공하죠)남편이 집에서 편히 쉴 수 있도록 아이들을 단속했습니다. 지금은? 물론 반대입니다. 아이들을 우대하고 남편을 소홀히 합니다. 어느 쪽이든 차별입니다. 예전에는 딸은 시집가면 그만이지만 아들은 자신들의 버팀목이 되니까 아들을 우대했고 지금은 딸이 더 낫다고 생각하니 차별이 없었졌습니다. 또 예전에는 돈 버는 게 너무 어려우니 돈 버는 남편을 VIP취급을 했고 지금은 돈 버는 게 비교적 쉬워졌으니 자신의 본능인 모성애에 충실한 겁니다. 가족도 욕망 있는 인간들의 집단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합니다. 손가락의 길이는 달라도 또 용도는 차이가 나도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모두가 소중한 존재라는 의미겠지요. 공부 잘 하는 자식이 아프면 치료해 주고 못 하는 자식이 아프면 방치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사회는 그렇지 않죠? 돈 없으면 치료해 주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회복지가 발전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드물어졌지만 과거에는 죽든 말든 내 버려두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가장 아프게 생각했던 일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왜 고칠 수 있는데 돈이 없다고 죽게 내버려 두지.’ 물론 철없는 아이의 생각이죠. 의사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니 그런 것인데. 하지만 의사라도 자기 가족에게 진료비를 받지는 않고 돈이 없다고 죽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습니다.
가족이 있다는 것은 세상에 적어도 나를 걱정해주고 위해줄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적장애자 외모가 정말 추한 사람,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가족에게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부모와 헤어진 고아는 있어도 부모가 처음부터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누군가의 자식입니다. (부모는 되고 싶지 않으면 안 될 수 있으나 자식은 그렇지 않죠)
2. 가족의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매우 평범한 내용이겠지요. “그래서 어쩌라고? 그걸 누가 몰라?”라고 따지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가족이란 아름다운 것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에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나라같이 가족이 절대적인 나라에서는 가족의 가치를 훼손하는 언행은 용납이 되기 어렵습니다.
(1) 가족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 사람들 –이혼과 비혼의 의미
하지만 세상이 바뀌고 있습니다. 가족의 가치를 예전처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혼과 이혼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혼은 새로운 것이 아니나 비혼은 조금은 새로운 것입니다. 미혼이 아니라 비혼입니다. 미혼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니 언젠가는 하겠다는 것인데 비혼은 아예 하지 않겠다(물론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요. 생각이 바뀌거나 좋은 상대가 나타나면 깰 수 있으니)는 것입니다.
비혼 이혼은 어느 쪽이든 가족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이혼은 가족을 해체하는 것이고 비혼은 가족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혼의 경우 재혼이라는 선택지도 있으니 완전한 해체는 아니지만 비혼의 경우는 가족을 아예 만들지 않으니 비혼을 깨지 않는 이상 가족은 생길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요즘엔 대안가족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있지만(결혼 혈연이 아닌 가족)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아직은.
비혼이든 이혼이든 그것이 이기적인 생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가족이라는 집단을 전제로 자신을 희생시켰던 과거와 달리 자신이 중심이 되어 가족을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과연 내게 이익이 될까” 라고 생각하고 아니라는 답이 나오면 해체하거나 아예 갖지 않는 것이죠. 과거에는 가족은 물과 공기와 같고 운명적인 존재였으나 이제는 선택해야 할 메뉴 중 하나일 뿐입니다. 생존의 위험이 줄어들고 개인의 자립이 용이할 정도로 생산력이 높아진 것이 이러한 생각을 가져왔습니다. 가족이라는 집단에 의해 생존을 보장받지 않아도 되었으니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어진거죠.
(2) 가족이기주의가 가져오는 문제 – 차별과 불평등의 원천
가족의 변화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반사회적 집단으로서의 가족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서울의 S여고에서 일어난 시험문제유출사건은 반사회적인 행위를 해서라도 가족의 삶을 행복하게 하고 싶다는 반사회적 집단으로서의 가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사건입니다. 물론 이것은 빙상의 일각입니다. 정치가 검찰 군인 사업가 심지어 평범한 서민에 이르기까지 가족만이 자신들의 삶의 판단기준이 되어 버린 사람들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닙니다. 가족이 없다고 해서(애당초 그런 사람은 매우 예외적이죠)범죄를 저지르지 않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가족이 없어 방황하고 그 결과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서라는 명분- 우리 사회에서 이 보다 더 떳떳한 명분이 있을까요?- 으로 저질러지는 악이 훨씬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가족이 없는 사람은 예외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별장성접대 사건이 발각되어 소동이 벌어진 일이 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죠? 그런데 그 사건이 처음 세상에 드러났을 때 어떤 여성이(누군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100억을 받다가 걸리면 용서하지만 성접대를 받다가 걸리면 용서할 수 없다”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녀는 아마 성접대에 방점을 두고 있지만 저는 앞의 부분에 포인트를 두었습니다. 100억을 받으면 용서하겠다는 것은 가족을 위해 뭘 해도 좋다는 것이죠. 후자의 경우 그 이유는 가족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성접대를 받는다고 아내는 물론 자식들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도움이 되지 않기는커녕 아내 입장에서 엄청나게 불쾌한 일이지요. 그것을 마치 정의감이라도 표현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코미디라고도 할 수 있죠.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가족을 위한 부정은 괜찮아”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비판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거의를 붙인 것입니다.) 그것이 더 무섭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이 사회에 분노를 느낌니다. 예전같으면 그랬을까요? 대놓고 뇌물을 받아도 좋다는 말이 어떻게 나옵니까? S여고의 부정사건에도 이를 변호하는 사람들이 많아 놀랐습니다. 각종 부정부패사건을 옹호하는 댓글이 많아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 편이면 옹호하고 아니면 공격합니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요?
비록 이렇게 대놓고 비리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가족 자체가 차별과 불평등의 원천임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잘 배우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의 자녀와 그렇지 못한 사람의 자녀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벽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적습니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싶을 것입니다. 불행한 가정의 아이들이 늘수록 상대적으로 자신의 아이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것이죠. 이 역시 보이지 않는 가족의 집단이기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비혼과 가족의 반사회화 다를 듯 하지만 비슷한 현상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하나는 개인이기주의이고 하나는 집단이기주의라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내가 내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할까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생각이 미화되고 포장되어서 버젓히 나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세계의 정치적 통합이 필요한 이유 –국가민족이기주의
이러한 이기주의 특히 집단이기주의는 범위의 제한이 없습니다. 가족이 사회가 되고 국가가 되어 커질 수 있습니다. 제국주의란 국가와 민족이 집단이기주의에 사로잡혀 그것을 실현할 때 일어난 현상입니다. 지구상에서 일어난 온갖 비극의 많은 부분이 이러한 이기주의 특히 집단이기주의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집단이기주의는 자기 집단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는 다릅니다. 애국이 곧 제국주의 옹호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관순열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니 19소녀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할까요?) “고문과 투옥은 얼마든지 상관없지만 내가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 밖에 없는 것이 너무나 슬프다” 그녀에 대한 일제의 고문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도저히 어린 소녀에게 할 수 있는 짓이 아닙니다. 심지어 그녀를 커다란 어항같은 곳에 집어넣고 그곳에 미꾸라지를 풀어놓았다고 합니다. 미꾸라지는 구멍이 있는 곳으로 기어들어가는 습관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의 성기 안으로 뱀장어가 들어가 그곳을 물어 뜯었다고 합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죠. 하지만 그런 것은 얼마든지 좋다고 하니 이게 실화라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관순열사의 애국은 집단이기주의가 아니었습니다. 내 민족은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동생이 잘못했다고 편을 들지 않았던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암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동양평화론을 통해 자신이 왜 살인이라는 끔찍한 악행을 저질렀는지 고백합니다. 반면 이토는 죽은 후 일본에서 신처럼 숭배를 받았지만 그것은 집단이기주의의 표현입니다. 둘은 결국 죽음을 당했지만 그 죽음은 의미가 다릅니다.
자신의 집단에 대한 순수한 사랑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이 외부에 대한 적대감 나아가 범죄적인 행위로 이어질 때가 문제입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죄가 아니라 미덕이나 자기 자식을 위해 남의 자식을 해친다면 죄악입니다. “자기 자식 귀한 줄 알면 남의 자식 귀한 줄도 알아야지” 이 간단한 명제가 잘 지켜지지 않으니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거 아닙니까? “자기 민족 귀한 줄 알면 남의 민족 귀한 줄 알아야지” 이것이 세상을 지켜주는 소중한 금언이 되어야 합니다. 역지사지란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것인가 봅니다.
글로벌시대에 국경의 철폐와 인류를 하나로 하는 제국의 건설이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은 바로 이러한 국가민족이기주의를 방치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종교와 일체감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통합을 위한 사전작업이지만 결과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제국이 정치적 통합을 바탕으로 제국의 평화를 가져온 것처럼 말입니다. ‘너와 나’에서 ‘우리’로 바뀌는 과정에서의 화룡정점은 역시 정치적 통합입니다.
4. 정치적 통합의 모델이 될 세 가지 유형 –로마제국형, 중원제국형, 유럽연합형
문제는 어떤 식으로 어떻게 제국을 만드느냐입니다. 저는 세 가지 모델을 참고로 하기를 바랍니다. 로마제국형, 중원제국형, 유럽연합형이 그것입니다. 물론 이 외에도 많은 모델이 있습니다. 페르시아제국형, 대영제국형, 대일본제국형 등등...하지만 이러한 모델들은 결국 제국의 건설자들이 피지배자들을 억악하고 착취하기 위한 체제를 구축했기 때문에 ‘따라 해서는 안 되는“모델이라고 여겨집니다. 로마나 중원의 제국도 그런 면이 있지만 비교적 구성원들을 존중해 주고 공생공영을 하고자 한 모델이기에 참고가 될 수 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유럽연합형이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 실현하기가 어렵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역사와 인종을 함께 하는 유럽이라는 작은 지역이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로마제국형은 중앙집권을 원칙으로 하는 지방분권제입니다. 로마는 영토를 본국과 속주로 나누고 속주를 식민지처럼 통치합니다. 총독과 관료 그리고 군대를 보내 각 속주를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묶어두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현지의 구체적인 통치는 기본적으로 각 민족의 우두머리를 세워 자치적으로 하도록 하였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헤롯왕과 빌라도의 관계는 그런 로마의 통치를 말해줍니다. 다른 벌은 마음대로 줘도 되나 사형은 로마총독인 빌라도의 전결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은 로마제국의 지배의 특징인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제의 조화를 잘 말해 줍니다. 세금징수도 세리라는 민간 청부업자에게 맡기고 그들에게 속된 말로 ’떡고물‘을 만질 권리를 줍니다. ”일정한 액수의 세금만 바치면 나머지는 니가 알아서 해’라는 것이죠. 그래서 세리는 민족의 반역자이고 착취자이기에 창녀와 함께 미움을 받았습니다. 세리=금전적 죄인, 창녀=성적 죄인 이런 식이겠지요. 그러기에 예수는 죄인의 괴수(?)인 창녀와 세리를 용서하여 자신이 구세주임을 나타낸 겁니다.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죠. 가장 비난받는 자들조차 자신은 용서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원제국형은 중국이 내부적으로 그리고 주변국가에게 한 것처럼 느슨한 지배종속관계연합입니다. 중국은 다민족국가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이 지금처럼 완벽한 중앙집권국가가 된 적은 없습니다. 진시황의 통일은 중원에 한정되었고 그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중국제국이 아니라 중원제국이라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중원제국은 중국의 다른 부분에 있는 이른바 여러 민족과 중국의 영역 밖에 있는 민족들을 천자의 리더십에 의해 지배하는 일종의 연방입니다. 호주나 뉴질랜드는 영연방입니다. 그들은 영국의 지배를 직접 받지 않지만 그럼에도 영국의 여왕을 국가원수로 삼고 있고 영국을 모국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어느 호주인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노인들은 “모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 말을 한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모국이란 영국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러한 연방국가 중에서 가장 긴밀한 관계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우리의 왕은 중원의 천자의 책봉이 없으면 즉위할 수 없습니다. 세조나 인조같이 찬탈로 왕위에 오른 왕의 경우 중원의 천자의 책봉이 이루어지기까지 왕이라고 부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속박의 대가로 우리는 많은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자의 개입은 내부의 국정에는 기본적으로 미치지 않았습니다. 호주와 영국의 관계보다는 긴밀하지만 우리가 실질적인 독립국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유럽연합형은 독립국가의 대등한 연합입니다. 이 경우 중심이 되는 존재가 없습니다. 언제든지 해체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브렉시티’라는 이름으로 떨어져 나간 영국은 좋은 예입니다. 영국이라는 나라가 원래 유럽의 이단아였음을 감안하면 그렇게 놀랍지는 않습니다. 유럽연합에 속하면서도 화폐 통합을 무시하시면서 자국화폐 파운드를 고수했고 각종 단위 –무게 길이 등-도 자국고유의 것을 고집하는- 피트, 마일 등-나라였으니까요.
앵글로 색슨의 헛된 자부심이죠. 이런 생각이 세계사의 비극을 만들었음은 그들은 알까요? 자기자신이 무슨 특별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다른 민족과의 협력을 거부하는 것은 오만함의 표출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나치 독일과 파시즘시대의 일본입니다. 유대인의 경우도 자부심은 크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은 있지만 그들은 오만함에 이르지 않았으며 그러기에 보편주의를 지지하며 협조주의를 택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자부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유럽연합은 그러나 매우 이상적인 제국입니다. 평등하게 맺어졌기에 약소국이라도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억압과 착취가 발생하기가 어렵죠. 로마나 중원제국이 아무리 그러한 요소를 배제하였다고 해도 그것이 상당히 존재했음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유럽연합은 전세계로 확산시키기 어렵습니다. 유럽은 로마제국의 전통을 이어받은 지역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망령’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로마제국의 유산이 오랫동안 유지된 지역이고 언어나 문화 등에서 상당한 균질성을 가진 지역입니다. 게다가 기독교라는 지역종교도 갖고 있고 일체감도 그 어떤 지역 못지 않게 강합니다. 오랫동안 전쟁과 대립 투쟁 갈등을 겪으면서 통합을 길을 걸었기에 그 결속도 다른 지역에 비하여 굳건합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은 유럽처럼 좋은 조건을 가지지 못 했습니다. 중동지역은 원래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동질성이 강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제국의 붕괴와 외세의 개입으로 조각조각이 나서 과거 서유럽이 겪었던 분열의 시대에 들어갔습니다. 서유럽이 겪은 오랜 분열의 시대를 거쳐야 과거의 통합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습니다. 동아시아는 중원제국이 무너지고 역시 분열의 시대로 들어갔습니다. 중국은 과거의 중원제국의 역할을 할 수 없고 게다가 냉전의 유산이 남아 있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남긴 상처가 너무 깊어 서로에 대한 불신이 가득차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역연합에서 세계제국으로 발전하는 길이 시간은 걸려도 가장 바람직한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중원제국 모델은 가장 빠르나 중원제국의 역할을 해 줄 나라가 없고-과거 미국이 그럴 수 있는 입장이었으나 그들은 그런 역할을 할 의사가 없어 보이고 그럴 능력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역시 문화적 동질성을 가진 지역에서나 가능한 모델이기에 쉽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모델은 정복이 전제이기 때문에 역시 어렵습니다.
따라서 문화적인 공통성을 가진 지역의 연합이 이루어지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유럽은 이미 이루어졌으니 다른 지역을 묶으면 됩니다. 이슬람교와 아랍어를 공통적 요소로 하는 중동을 하나로 묶고 동아시아를 하나로 묶고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이 완성되면 지역간의 연합을 통해 최종적으로 세계제국을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그에 걸맞는 헌법과 의회 등이 만들어져야 하겠지요. 지금의 국제연합을 훨씬 강력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독립국으로서의 주권을 일정수준까지 제한할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남의 나라에 대한 공격이나 국가이기주의에 대하여는 철저히 규제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국제연맹은 강제적 제재를 하지 못해 유명무실해졌습니다. 국제연합은 그러한 수단을 가지고 있었으나 강대국의 횡포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세계제국은 그러한 한계를 넘어서야 할 것입니다.
5. 공동체정신은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유산
예수가 승천하고 남아 있던 기독교도들은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했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을 함께 나누며 살았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조직이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서로 간에 분배를 놓고 다툼이 벌어졌고 또 가진 것을 다 내놓지 않고 감춰두었다가 벌을 받고 죽은 사람도 나타났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 이는 특정인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그러한 현상에 대한 비유적 설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공동체 정신은 그 후 교회라는 기독교의 기본조직의 기본정신이 되었습니다. 공동체의 기본은 사랑과 나눔입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과거에는 교회내에서 형제자매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즉 가족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초대교회의 정신인 공동체 정신을 살리자는 의미로 그렇게 불렀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교회는 그런 역할을 하여 왔습니다. 비록 지금은 많이 퇴색했지만.
요즘 교회는 공동체라기보다는 모임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모임이란 어떤 목적을 위해 모여서 그 목적이 완수되면 흩어지는 집단입니다. 하지만 공동체는 그러한 목적을 넘어선 유대관계를 같는 집단이죠. 쉽게 말해 모임은 목적을 위해 모이고 공동체는 존재자체가 목적이고 목적은 그것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교회의 목적은 신앙생활이지만 공동체의 존속과 유대관계가 사실상 존재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목적을 위한 집단으로 바뀌어 가고 있으니 모임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전에는 교회에서 행사를 하거나 할 때 비용을 징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나 지금은 반대입니다. 수익자 부담원칙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죠. 가족에게 수익자부담원칙을 강요하는 경우는 거의 없죠? 특히 가족의 공통적 행사라면 말입니다. 교회가 합리주의를 내세운다면 그것은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어느 정도 포기하겠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먹고 살만 하니 이제 돈을 내라는 것인데 이미 헌금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걷고 있는데 추가비용을 요구하는 것은 기업에 가까워진 증거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교회가 다수의 확진자를 낸 것은 바로 이러한 공동체적인 문화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한국사회에서 혈연이나 지연 학연을 벗어난 집단 중 가장 다수의 구성원을 가지는 집단일 것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보고 교제를 나누며 공동식사를 나누는 과정에서 밀착적인 관계를 갖게 됩니다. 그러기에 코로나사태의 영향을 엄청나게 받았습니다.
대한민국도 공동체로서의 기능은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성금을 기부했습니다. 외환위기에 금모으기 운동처럼 연말에 내는 이웃돕기 성금처럼 그렇게 사람들은 모르는 이웃을 위해 성의를 표시하고자 하였습니다. 물론 피해를 완전히 회복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병에 걸린 사람들만이 피해자는 아닙니다. 코로나 사태로 경제가 침체되고 많은 사람들이 수입이 대폭 줄거나 거의 없어져 고통받고 있습니다. 같은 직장에 일하여도 어느 정도 수입이 보장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간의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차라리 임시특별세를 만들어 재정을 확보하고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게 어떨까 합니다. 아니면 같은 직장사람들 중에 수입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수입의 일부를 의무적으로 기부하게 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나마 이런 식으로 도움의 손길이 있다는 것은 공동체 의식이 살아 있다는 것이니 불행중 다행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하나의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법이민자의 죽음에 대한 온갖 비난과는 대조적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상관없는 존재라고 여깁니다. 그것은 나라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We are the world”를 외쳐도 국경을 넘어서면 힘을 잃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6. 세계의 정치적 통합은 인류공동체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정치적 통합은 진정한 인류공동체 건설의 필수조건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이 유럽연합형이든 중원제국형이든 혹은 로마제국형이든. 제국은 안전과 평화 그리고 구성원들의 보다 나은 삶을 보장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제국입니다. 이름만 제국이고 구성원을 차별하고 착취한다면 그것은 제국의 이름을 사칭한 침략자일 것입니다. 따라서 제국주의라는 말은 사실은 허구라 하겠습니다.
새로운 세계제국은 인류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인류를 평화와 안정 그리고 행복으로 이끄는. 특정 민족이나 인종을 우대하고 그들에게 특혜를 주거나 역으로 특정 민족인종을 차별하고 착취한다면 도리어 없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로마는 포용정책으로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고 유지했습니다. 중원제국도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은 제국은 오래가지 못해 사라졌습니다. 앗시리아의 교훈은 오늘도 살아있습니다.
개인이 다른 개인을 가족이 다른 가족을 민족이 다른 민족을 배려하고 도와주는 세상은 올 수 있을까요? 우리의 영혼은 아직도 만인대 만인의 투쟁시대 아니면 집단에 의해 스스로를 지키는 사회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기에 우리집단에 최대한의 이익을 집중시켜야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굶주림의 기억이 몸에 지방을 샇아두는 바람에 비만증환자가 늘어난 것처럼. 이미 먹을 것은 충분하니 그렇게 쌓아둘 필요가 없는데 말입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처럼 의식과 현실의 갭이 너무나 큰 것 같습니다.
인간은 지구에서 사라져야 할 사악한 존재일지 모릅니다. 인간처럼 필요없이 살육을 거듭한 존재는 없습니다. 동물은 필요할 때만 사냥을 하며 그것을 쌓아두기 위해 남의 것을 착취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것을 쌓아두어 다른 존재가 굶주리거나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인간만의 죄악이 아닐까요? 그것이 지혜라면 그런 지혜는 없었으면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면서 인간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고 있습니다. 인간이 사라진다면 지구는 평화와 안정을 뒤찾을 것입니다.
인간은 지구의 민폐적 존재입니다. 이제부터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짐승같다”고 하지 말고 “인간답다”고 합시다. “금수만도 못하다”가 아니라 “인간만도 못하다”고 합시다. 특히 개에 대한 모욕은 삼갑시다. 개가 얼마나 충직하고 순수한 동물인데 인간하고 비교할 수 있습니까? “개만도 못하다” “개같다” “개보다 더하다”는 말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기분 나쁘신가요? 그러실 거 없습니다. 인간의 죄악을 생각하면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말하고 싶습니다. 같은 동족을 인간만큼 해치고 괴롭히고 살해하는 존재는 인간 뿐이고 나아가 지구를 파멸시킬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도 인간 뿐이니까요. 우리들의 지혜는 우리들의 족쇄요 올무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구전체의 모든 사람들을 공동체에 넣어야 합니다.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너와 나가 아니라. 그 정점에는 인류공동체라는 이름의 제국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일체감과 세계종교 그리고 제국이 하나가 될 때 인간이 조금은 동물에 가까운 수준이 되지는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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