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을 위한 변명 – 당한 것이 죄는 아니지.
목차
1. 세종이 우리나라를 망친 인물이라고? 정말?
2. 기승전 근대사가 되어 우리의 역사인식
3. 조상을 위한 변명 – 당한 것이 죄는 아니지요.
1. 세종이 우리나라를 망친 인물이라고? 정말?
내가 존경하는 선배 한 명이 조선왕조를 신나게 까는 강의를 하고 다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조선왕조가 아니라 세종대왕을 비난하는 건데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하냐 하면 조선왕조 나아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가장 큰 죄인이 세종대왕이라고 하고 있으니 짐작이 가실 겁니다. 세종대왕과 함께 같이 욕을 먹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허조라는 분입니다. 그 선배의 평가에 의하면 이완용보다 못 된 인간이 허조라고 합니다.
세종대왕이야 모르는 분이 없겠지만 허조라고 하면 누구인지 모르는 분이 대부분일 겁니다. 물론 저도 그 선배를 통해 처음 들었습니다. 이완용보다 못 된 인간이라고 하니 혹시 나라를 팔아먹은 자가 아닐까 싶은데 그는 조선 말기가 아니라 조선이 가장 국력이 융성했다는 조선초 인물이니 그럴 리가 없을 것이고 도대체 무슨 짓을 했다는 것일까 궁금해질 것입니다.
그 선배가 이들을 비난하는 공통적인 이유는 그들이 대한민국 역사의 발전을 방해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더욱더 놀라실 겁니다. “아니 허조는 그렇다고 쳐도 세종대왕하면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를 발명하는 등 우리나라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신 분인데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라고 볼멘소리를 내실 분들이 많을 겁니다. 심지어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할 분도 있겠지요.
‘한일격차 600년사’ 그 선배의 강의제목입니다. 세종이 재위하던 시절이 지금부터 대략 600년전 (1418-1450)이니 붙여진 타이틀입니다. 즉 세종시절부터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뒤지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600년전부터 뒤진 게 아니라 그 시절에 우리가 그들보다 뒤진 게 확인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 번 지적을 해도 본인이 고치지 않았지만. 아울러 우리가 그들에게 뒤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이 세종과 허조라는 것이 선배의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이미 일반화되어 있어 있습니다. 과거 왜 한국이 일본에게 식민지화되었는가를 고민하면서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처음엔 대부분 근대사에서 그 원인을 찾았습니다. 일본이 우리를 착취하여 강해졌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그럼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착취할 수 있었는가 라는 반론에 막혀 설득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메이지유신에 성공하여 강력한 근대국가를 건설한 일본이 우리를 침략하여 착취하였다는 것이 정설이 되어 갔습니다. 현재도 이 주장은 제법 많은 지지를 받고 있고 그래서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게 높아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왜 우리는 메이지유신 같은 개혁을 하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여기서도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일본이나 열강이 방해를 해서 못 했다는 주장과 원래 우리민족이 못나서 그랬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전자의 주장에 대하여는 착취론과 마찬가지의 반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일본은 방해가 없었는가? 그들도 방해가 있었을텐데 메이지유신을 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결국 그들이 우리보다 뛰어났기 때문이 아닌가?” 라 고. 그렇게 되자 우리 민족이 못나서 그랬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고 결국 메이지 유신을 이끌 수 없었을 정도로 무능한 우리 민족에게 책임이 다시 전가되었죠.
결국 한국과 일본의 전근대 사회의 역사가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내 친구 한 명이 그것을 분석해 쓴 책이 있습니다. ‘흐름의 한국 축적의 일본’(한국경제신문)이라는 책인데 물론 본인은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설명한 것이지 한국이 왜 뒤떨어졌는가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누가 봐도 한국이 뒤진 원인을 일본과 비교하여 분석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본인은 균형을 맞추는 시늉을 했지만.
이런 식의 서적은 트럭으로 몇 개가 될지 모를 정도로 나와서 더 이상 특이하거나 흥미를 끌만한 내용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원래부터 뒤지게끔 되어 있었다는 주장은 어느 덧 우리 사회의 주류적인 인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버불경제가 한창일 때 일본이 세계를 집어삼킬 기세로 떠오르던 시절에는 이런 거 한 두 가지 외우고 있어야 말발이 설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한일격차 600년’은 그런 주장들을 좀 더 자극적으로 해설한 것에 불과합니다. 세종이라는 우리민족의 절대적인 영웅을 폄하(?)하는 일종의 노이즈 상법을 통해 강한 임팩트를 주어 주목을 받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본인은 절대 그렇지 않고 자신은 그것을 확신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또 그의 강연을 들어보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주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확신범’인 셈이죠. 그가 더 미워하는 인물은 허조이지만 허조는 무명에 가까우니 결국 그의 주장의 주 타킷은 세종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종을 이렇게 공격한 사람은 더 있습니다. 그는 세종이 600년의 격차를 만들었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양반사대부에게만 성군이지 평민들에게는 성군이 아니라 오히려 악한 짓을 한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종이 성군대접을 받는 것은 실록을 비롯한 모든 기록들이 양반사대부들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인물과 내 선배의 공통점은 한국에서 제일 명문이라고 자부하는 대학의 선후배라는 것입니다. 전공은 서로 다르지만. (내 선배는 공학 그 인물은 경제학 전공입니다. 하지만 선배가 나중에 경제학으로 박사를 받았으니 다르다고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2. 기승전 근대사가 되어 우리의 역사인식
평생을 잘 살다가 말년에 폭망하고 못 살게 된 사람과 평생 거지같이 살다가 말년에 성공해 잘 사는 사람 누가 잘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엄밀히 말하면 전자 아닐까요? 그는 평생 잘 살았고 아주 짧은 시간만 못 살았습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대부분의 시간을 못 살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후자가 잘 살았다고 기억할 겁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죠. 평생 잘 지내다가 마지막에 원수처럼 된 상대보다 평생 원수처럼 지내다가 마지막에 화해한 사람을 우리는 더 좋게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역사에 대하여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5천년 우리 역사라고 하는데 결국 기승전 근대사라고 할 수 있는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에게 식민지가 되었던 아픈 과거 그리고 분단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근대사에 모든 것을 귀결시켜 우리 역사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물론 최근에 우리는 조금씩 변하고는 있습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그 위상을 높이게 되자 기승전현재로 전환하여 우리역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50년 쯤 지나면 지금과는 말이 달라지겠지요. 하지만 아직은 근대사의 아픈 기억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합니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를 제대로 정리해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과거에 속박되어서는 안 되지만 과거를 무시하고 미래를 열 수는 없습니다. 용서는 할 수 있지만 망각을 안 됩니다. “과거를 보지 않는 사람은 미래도 볼 수 없다” 독일의 어느 대통령이 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배우고 그 교훈을 찾아내어 이를 미래를 위한 교재로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역사를 배우고 알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근대사만이 역사는 아닙니다. 중세사 고대사도 역사입니다. 70평생 살면서 69년 잘 살다가 1년 못 살았다고 그의 인생을 실패라고 규정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평가인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김구선생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그가 북한정권에 농락당한 일을 그 근거로 삼습니다. 그것이 농락인지 아닌지는 일단 제쳐두더라도 설령 그것이 농락이라고 해도 김구선생이 평생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바친 희생마저 폄하한다면 지나친 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습니다. 그들은 김구를 만년에 실수한 인물이 아니라 악한 인물로까지 폄하합니다.
‘한일격차 600년’이라는 강의는 그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주관하던 공부모임에서 그 선배를 초빙하여 강의를 시킨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그 강의의 제목을 ‘한일경제격차 600년’이라고 적어 선배의 빈축을 샀습니다. 그것이 정말 실수인지 아닌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저 역시 경제학을 한 사람이라 그렇게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경제가 제일 중요하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해서.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가 비록 경제적으로 일본에 뒤지기는 했지만 다른 점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냥 우기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1400년대 일본은 이른바 무로마치 막부시대였습니다. 무로마치 막부는 카마쿠라 막부나 에도막부에 비하여 힘이 없는 막부였습니다. 그것은 무로마치 막부가 천황의 거점인 교토에 있었기에 귀족의 견제를 받았고 또 카마쿠라 막부나 에도막부와 달리 절대적인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창시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전국적인 전쟁으로 패권을 잡은 것이 아니라 카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키기 위해 협력한 고다이고 천황을 내몰고 막부를 세웠습니다. 말하자면 찬탈이라고 할 수 있죠.
역사를 보면 찬탈로 세워진 정권은 강력한 힘을 갖기 어렵습니다. 찬탈자의 생전에는 강하지만 그가 죽으면 정권의 기반이 흔들리기 쉽죠. 무로마치 막부도 그렇게 해서 100년이 가지 못하고 흔들렸습니다. 그것이 응인의 난이라는 전국적인 전쟁을 불러 일으켰고 그 결과 일본은 전국시대로 접어들었으며 무로마치 막부는 허수아비가 되고 말아 통치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세종이 재위하던 시절은 무로마치 막부가 흔들려서 힘을 잃어가기 시작한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닌(應仁)의 난은 1467-77년, 세종의 재위는 1418-1450년)
일본은 1180년대 (정확한 연도는 의견이 분분)카마쿠라막부가 성립되면서 이른바 사무라이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봉건적 분권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이죠. 물론 그 이전에도 중앙집권은 이름 뿐이고 실제로는 분권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습니다. 유럽의 봉건제를 이야기할 때 늘 등장하는 ‘장원’이라는 존재가 이미 전국에 확산되어 국아령이라고 하는 국유토지를 잠식해 갔습니다. 심지어 천황마저 장원을 소유한 영주의 얼굴을 가지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길 정도이니 짐작이 갈 겁니다. 두 얼굴의 사나이라고 해야 할까요? 한 편으로는 장원을 금지하는 명을 내리면서 또 한 편으로는 장원을 소유한 천황 말입니다. 회사의 사장이 직원들의 횡령을 단속하면서 자신이 회삿돈을 빼돌리고 있는 것과 같은 셈이죠.
그런 과정을 거쳐 일본은 분권화되었고 사무라이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유럽의 기사에 해당되는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면서 등장합니다. 애초에는 천황이나 귀족들에게 땅을 바치고 장원의 관리자로서 이익을 나누던 그들이지만 점차 주인에게서 벗어나 자신들의 독자적인 세력을 갖고자 하였습니다. 서양의 봉건제가 공식적으로 땅을 분봉받아(중국도 이와 마찬가지)정식으로 영주가 되어 자신의 세력을 키운 것과 달리 이들은 불법으로 영주가 된 것입니다. 율령제 하에서 장원은 애당초 불법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천황과 귀족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사무라이들은 막부를 통해 비로서 자신들의 지배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소령안도’(영주소유가 평안하게 되었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율령제를 혁파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무가법을 통해 실현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일본은 영국처럼 애초에는 불문법의 나라였습니다. 영국이 지금도 성문법이 없이 과거의 법- 대헌장, 권리청원, 권리장전 등-으로 다스려지듯이 일본도 새로운 법으로 과거의 법을 보충하는 식으로 다스려진 것입니다. 무가법과 율령은 그렇게 공존하면서 유지되었고 사무라이들은 귀족이나 천황을 내몰지 않고 자신들만의 세력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이런 것은 섬나라의 특징인가 봅니다)
비록 무가법으로 합법화되었지만 영지의 소유는 불안하기 짝이 없으니 그들은 무장을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카마쿠라 막부 이후 일본은 800년 가까이 무사의 나라였습니다.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합(통일이 아니라)으로 평화가 오기 전까지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니 영주들은 전시체제로 자신의 영지를 운영할 수 밖에 없었죠.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력을 키워야 합니다. 이른바 ‘부국강병’이 그것입니다. 현대전은 물론이지만 과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16세기에는 총포를 사용하게 되니 전쟁의 비용은 더욱 커졌습니다. 게다가 직업군인이 중심이 된 당시에는 (병농분리)장교는 물론 사병들에게도 많은 급여를 제공해야 합니다.(내전이니 징병제를 실시할 근거가 희박) 우리나라처럼 군역으로 값싸게 의무병을 소집할 수 있는 경우와는 다르죠. (덕분에 우리의 국방력은 개판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국민이 병역을 짊어져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남는 돈으로 윗 대가리만 배터지게 처먹고 있죠)그러기에 그들은 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였고 그것이 일본의 경제발전에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세종이 박서생이라는 사람을 파견해 알아보니 실제로 일본은 경제적인 수준이 아주 높았다고 합니다. (박서생은 이름입니다. 박씨 성의 서생이 아니라)그래서 그는 세종에게 개혁을 건의했지만 세종은 요즘 말로 하면 ‘뭉개버렸다’ 고 제 선배는 주장합니다. 그래서 세종이 만고의 역적이라고 거품을 물어요. 세종이 그 때 개혁을 했다면 우리도 발전했을텐데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세종은 개혁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세종이 한 일 중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 한글창제입니다. 한글을 창제하는 것은 국가를 개혁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간단한 일이지만 그것을 위해 세종은 죽을 고생을 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조선이 전제군주국가가 아니었고 중화문명에 대한 우리 지배층의 사랑이 대단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전제군주제보다 비록 한정적이지만 여론을 존중하는 것은 독재를 막는 것이고 문명에 대한 사랑은 국가발전을 위해 유익한 것이 아닙니까? 중국으로부터 많은 문물을 받아들인 것이 우리나라 발전에 큰 힘이 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글 창제처럼 선한 일조차 여론의 압박으로 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하물며 국가개혁이 세종이 원한다고 해서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일본의 경제적 수준이 높은 것이 사무라이들의 ‘부국강병’ 때문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나라의 체제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를 따라잡으려면 기득권 세력들을 뒤집어 엎을 각오를 해야 하는데 그 정도면 왕조를 다시 세울 정도의 각오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조선왕조는 아시다시피 찬탈로 세워진 나라이고 따라서 군주의 힘은 미약했습니다. 절대 무리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가 칙사 대접을 받은 것도 이러한 차이 때문입니다. 부국강병이 필요 없는 우리와 달리 일본의 봉건영주들은 전쟁을 위한 경제력을 육성하기 위해서라도 도공들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에서 천시된 도공이 일본 도자기 산업을 세계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은 단지 그들의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은 아닌 거죠..그렇지 않고서야 왜 우리나라 도자기 산업은 일본만큼 발달하지 못했겠습니까? 우리나라 도공들의 힘으로 일본의 도자기는 중국의 도자기와 국제시장에서 경쟁할 정도로 발전했지만 우리는 그러한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모든 점에서 일본에게 뒤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통신사가 일본을 다녀갈 때마다 받은 여러 가지 문화적 요구는 그것을 말해 줍니다. 특히 동아시아 문명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성리학에 있어서 그들은 우리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이해수준을 보였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차이는 줄어들었지만) 법률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경국대전을 비롯한 조선시대 4대법전 –경국대전, 속대전, 대전통편, 대전회통-은 일본의 봉건법체계보다 훨씬 정교할 것입니다. 일본이 생명을 경시하는 야만의 풍습을-예를 들면 할복- 버리기 시작한 것이 에도막부시대인데 그것은 평화의 장기화와 더불어 성리학을 비롯한 대륙의 문명이 유입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일격차 600년’ 운운하는 것은 역사의 왜곡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서양이 원시부터 지금까지 세계를 압도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서양국가들이 세계를 제패한 것은 기껏해야 산업혁명이후입니다. 그 이전에 군사력을 키웠고(하지만 압도적인 것은 아님)산업혁명으로 날개를 달아 전세계에 침략을 자행하고부터 서양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18세기까지 세계제일의 경제대국은 중국이고 한국이나 일본도 그리 뒤떨어지지 않았음을 여러 가지 통계가 입증하고 있습니다. 한일 간의 경제적 격차조차 18세기까지 그렇게 큰 차이는 없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하물며 문화나 다른 점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일본이 우리를 결정적으로 앞 선 것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이른바 근대화를 이룬 이후라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서양을 기준으로 하면 그렇습니다. 개인간에도 격차를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국가와 민족에 대하여 가볍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일단 기존의 판단기준으로 본다면 그렇습니다. 중국이 문명의 중심이던 시절에는 우리가 일본을 앞 섰지만 서양이 그 중심이 되니 “뒤로 돌아 뛰어”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중국과 한국이 기존의 문명에 너무나 특화되어 버린 나머지 서양문명을 수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역전이 된 거죠.
최근에는 일본경제가 침체되어 버렸기 때문에 달라졌지만 한 때 우리는 일본의 모든 것을 숭배할 정도로 일본과 한국의 격차를 과장되게 평가했습니다. 일본이 하면 다르다는 식으로 그들을 높이고 우리를 폄하한 것이죠. 그 원인은 물론 근대사 이후의 역사 때문입니다. 기승전근대사가 된 것이죠. “일본은 이래서 성공했는데 우리는 ” 식의 자학사관(?)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 왔습니다. ‘한일격차 600년사’는 그런 시대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조상을 위한 변명 – 당한 것이 죄는 아니지요.
초식동물은 육식동물보다 못난 존재일까요?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초식동물은 육식동물에게 잡혀 먹힐 가능성이 큼니다. 그런 점에서 육식동물보다 못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초식동물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먹이를 구하는 것이 쉬워 생존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유리한 점도 있습니다. 인간의 경우도 초식인간은 육식인간보다 수명이 길고 건강하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육식보다 초식이 웰빙푸드라고 해서 인기가 높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계속 비슷한 질문을 이어가겠습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못난 존재인가요? 단지 육체적인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학자는 격투기 선수보다 열등한 존재인가요? 싸움을 하면 거의 확실하게 질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학자는 격투기를 배우지 못한 것을 비난받아야 합니까? 여성들은 호신술이라도 배워야 할까요? 그래야 남성들에게 범죄를 당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만일 그렇지 못하고 범죄의 표적이 되어 피해를 입었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여성에게 있나요?
조선이 일본에게 식민지가 된 것을 조선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이러한 질문과 비슷한 성격의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힘으로 압박했기 때문입니다. 강도가 돈을 빼앗듯이 성폭행범이 힘으로 여성을 쓰러뜨리고 자신의 욕구를 채운 것처럼 사기꾼이 거짓으로 남의 돈을 갈취한 거처럼 그렇게 일본은 우리를 유린하고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일본한테 당한 것은 이래서 저래서 였다” 처음에는 그럴 마음이 없었는데 점점 일본은 잘했고 우리는 못나서 그렇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바뀌어 왔습니다. 학자가 강도에게 돈을 빼앗기자 왜 평소에 무술을 배우지 않았냐고 타박하고 성폭행을 당한 여성에게 왜 진작에 호신술을 배우지 않았냐고 비난하고 있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조선은 500년을 유지한 나라입니다. 세계사에서 같은 왕조가 500년을 이어간 경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중국 역사가 그렇게 길어도 500년을 넘게 유지된 왕조는 거의 없습니다. 고대 주나라나 은나라가 그렇다고 하는데 워낙에 자료가 없어 신빙성이 없습니다. 나머지는 300년을 넘기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런 나라가 무너진 것은 조선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문제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오늘날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를 죄인취급합니까? 우리만이 아니라 가해자인 일본 나아가 전세계가 그런 것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입니다. ‘내로남불’이라고 해야 할까요? 일본의 식민지지배는 나쁘다고 하면서 서양열강의 그것은 ‘제국주의의 영광’이라고 떠받들고 있기도 합니다. 심지어 피해를 입은 우리조차 그러니 그들이야 말 할 것도 없습니다. 제 스승인 교수님 한 분은 영국사 교과서를 집필하셨는데 “영국사는 승리의 역사”라고 찬양해 마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승리는 약소민족에게는 ‘피눈물의 역사’입니다. 왜 같은 식민지지배를 당해 고통을 겪은 우리가 영국을 그렇게 칭찬합니까? 어불성설이 아닌가요?
기껏해야 2-300년 정도 세계사를 지배한 나라들이 마치 타고난 우월성을 가진 냥 역사를 기록하고 선전하는 현실에 분노를 느낌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을 자랑하지만 로마제국은 지금의 서양과 다른 존재이고 게다가 로마제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도 아닙니다. 동아시아에는 중화제국이 수 천년을 이어왔고 인도에도 아랍에도 훌륭한 제국은 다수 있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은 역시 몽골제국입니다. 지구상의 육지의 1/6이상을 지배한 몽골제국에 비하면 로마제국은 초라한 존재입니다. 마치 한국과 일본의 잘못된 비교를 지구규모로 확대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역사의 왜곡이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고 있습니다.
세계사도 기승전 근대로 점철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침략과 지배의 역사를 그들의 영광으로 여기고 자랑하는 것도 훨씬 심합니다. 서양의 ‘문명’이 다른 지역의 ‘야만’을 정복했다는 식의 논리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직도 그들이니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는 해도 분통이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왜곡을 방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폭처럼 몰려와 남의 땅을 유린하고 자신들의 종교나 생각을 강요하고 억지로 무역을 시켜 착취를 가한 그들이야말로 역사의 심판을 받을 존재입니다. 기독교가 문명의 종교라고요? 그들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벌인 온갖 만행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군전쟁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마녀사냥’은 야만의 극을 달린 비극이었습니다. 그런 짓을 하고 오늘날 기독교를 문명의 상징처럼 여기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승자에 의한 왜곡이 얼마나 세계적으로 퍼져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나 중국 일본 등에서 종교전쟁은 없었습니다. 불교나 유교는 결코 피를 흘리면서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극히 한정적으로 탄압이나 강요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양국가들이 벌인 엄청난 양의 종교적인 피흘림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과거에 온갖 못 된 짓을 하다가 잘 살게 되자 과거를 세탁하고 시치미를 떼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조사하면 다 나오기 때문입니다.
국뽕을 맞을 생각은 없습니다. 전 우리나라 별로 안 좋아합니다. 하지만 실제보다 과장되게 그리고 왜곡된 내용으로 우리조상들을 비하하는 것은 우리 자신은 물론 인류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침략과 지배를 ‘영광의 역사’로 둔갑시킬 생각이며 피해자를 못난 이로 만들 생각입니까?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난하기 전에 이렇게 왜곡된 우리 인식부터 다시 검토하고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