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우리가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노오오력‘이 필요없는 세상을 꿈꾸며

닥터 양 2020. 4. 14. 21:53

우리가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노오오력이 필요없는 세상을 꿈꾸며

 

목차

1. 그는 왜 강의실에서 바보가 되었는가?

          차별을 보상으로 여기는 젊은이들

2. 열심히 공부한 게 잘못은 아니지만.

3. 이 모든 것이 기성세대의 책임일까요? 86세대는 죄가 없다.

4. ‘노오오력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꿈꾼 적이 있는가?

5. 들어가기 어려우니 더 받아야 한다고?

                                더 받으니 들어가기 어렵지.

6. 우리가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소비소유적인 삶에서 마음 중심으로 이동하기

 

1. 그는 왜 강의실에서 바보가 되었는가? 차별을 보상으로 여기는 젊은이들

 “날로 정규직이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 우리가 공사에 정규직으로 들어가려면 얼마나 힘든데,,그런 식으로 정규직이 된다면 우리는 너무 억울해요” (원문 그대로는 아님.)

  어느 학생이 시간강사 신분의 교수에게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서울에 있는 꽤나 이름있는 대학의 강의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은 그러한 반문에 대부분 공감을 보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들의 노력이 헛되게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죠.

  코레일 여성승무원의 정규직화문제로 오랫동안 사측과 여승무원사이에 대립이 이어진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코레일은 KTX라는 지금까지는 없던 고급교통수단을 개통하면서 마치 비행기 스튜어디스처럼 여성 승무원을 배치하기로 한 모양입니다. 좋은 인재를 모으기 위해서인지 일단은 계약직으로 채용하지만 2년 후에는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정말 엄청난 인원이 몰렸고 심지어 전직 스튜어디스출신도 지원했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실은 스튜어디스 지망생이었죠)

  하지만 정작 2년이 지나자 코레일은 그녀들의 정규직전환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오랜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사 측은 약속 자체를 전면 부인하였고 승무원들은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습니다. 시간은 길어지고 여러 해가 지나면서 승무원들 중에는 이탈자도 나왔지만 자살한 사람도 있었을 정도로 투쟁은 끈질기게 이어졌습니다. 결국 그녀들은 승리하였고 많은 승무원들이 정규직으로의 복귀를 이루었습니다.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왜 애당초 정규직 채용을 약속했는가 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판단하건데 그들은 약속을 이행할 어떠한 의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지키지 않고 버티면 그냥 어영부영 넘어갈 줄 알았겠죠. 문서로 한 약속도 아니고 구두로 하였으니 법적효력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더구나 당시 코레일의 사장은 학생운동으로 제적되었다가 늦깍이(40세인가?)졸업을 하여 화제가 된 인물이니 이러한 사실이 더욱 의아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긴 운동권의 배신이 어디 이철 뿐이겠습니까? 적지 않는 운동권출신들이 정치가가 되어 보수화하여 과거의 행적을 무색하게 하는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입장에서는 이러한 과정보다는 결과가 더 중요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코레일 정규직은 신이 내린 직장일 것입니다. 그런데 비정규직으로 들어와 정규직이 되고 싶다고 투쟁을 벌이겠다는 것은 일종의 어거지라고 생각되었을 가능성이 큼니다. 이런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납니다. 공립유치원교사, 공립학교교사의 채용과정에서 기간제교사를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발표가 나면 해당 학과의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곤 합니다. 우리는 아예 기회도 안 주고 뽑겠다고? 절대 안 돼

  누가 맞느냐고요? 저는 둘 다 맞다고 생각합니다. 정규직 전환을 약속하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다르지만 약속을 했으니 당연히 지켜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실수라고 해도 사회에서의 약속은 개인의 약속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억울해 하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노력해서 얻고자 하는 자리를 너무 쉽게 얻는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오찬호 박사는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개마고원, 2013)이라는 책에 담았습니다. 그는 학생들의 집요한 비판에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큰 곤란을 겪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 책을 집필했던 것 같습니다. 저로서도 무척 충격적인 내용이었기에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한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2. 열심히 공부한 게 잘못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학생들 특히 초중고학생들의 공부시간과 양은 아마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각종 통계를 확인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을 정도입니다. 교육 전문가 이범선생이 인용한 자료에 의하면 1의 경우 일본 학생이 주32 미국학생은 33시간 핀란드 학생은 33시간이고 우리나라 학생만 50시간이라고 합니다. (학교와 학원 자율학습 모두 포함)이것만 해도 대단한 차이를 보입니다.

  그런데 이 통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일본학생이 주 32시간이라고 하니 조금 놀라운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어 뭐야 일본도 입시가 치열한데 왜 이 정도지? 미국보다도 짧네라고요. 일본은 입시의 양극화가 심합니다. 즉 동경대를 비롯한 명문대에 가기 위해 죽어라 공부하는 애들은 우리 못지않게 공부하지만 그렇지 않는 학생들은 아예 대학을 가지 않습니다. 대학진학률도 50%정도로 우리보다 훨씬 낮지만 학력간 임금격차도 작고 전문학교같이 원하면 다 들어갈 수 있는 기술교육기관을 나와도 취업이 잘 되기 때문에 공부를 거의 하지 않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부모도 양극화되어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 가정도 주변에 널려 있다는 것에 저 자신도 놀랐습니다. 입시하면 역시 과거시험의 전통에 빛나는 우리나라와 중국이 최고 아닐까 싶네요.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미국은 공립학교조차 양극화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나 일본처럼 공립학교를 국가에서 보조해 주니 일정한 수준이상의 교육이 보장되는 경우와 달리 지자체의 경제력에 의해 수준의 차이가 크기 때문입니다. 부자동네의 공립학교는(부자들은 사립을 보내는 경우가 많지만)지자체의 예산과 학부모들의 찬조금이 많아 높은 수준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슬럼가의 경우 예체능을 생략해야 할 정도로 부실한 학교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33시간은 단순 평균이고 편차가 일본이상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버드나 예일 같은 명문대 지망생들의 학습시간은 상당히 길다고 합니다.

  핀란드는 설명이 필요없는 교육강국이지만 학습시간은 매우 짧습니다. 그것은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고 대학입시가 없으며 심지어 중학교까지는 시험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입시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위에 언급된 나라 중 핀란드가 유일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학생들의 실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고(오히려 세계 정상급)국가경쟁력도 매우 높습니다.

  한국학생들의 학습시간이 그것도 고150시간이라고 하면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수명시간을 줄여가면서 하는 고등학생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100시간도 더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강남 대치동이나 목동 등 교육에 대한 열의가 유달리 강한 지역이라면 120시간이상도 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실업계 고등학생이라면 시간이 더 짧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 정도이니 얼마나 우리나라 학생들이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학생들을 곁에서 보아온 사람이기에 학생들이 보상심리를 느끼는 것을 이해합니다. 소위 명문대라는 학교부터 지잡대라고 불리는 학교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경험한 저로서는 대학생이라고 해도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압니다. 시험지에 1,2줄 적고 내는 학생들이 있는 반면 몇 장씩을 빼곡히 적어 내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적어도 명문대에 속하는 학교에서는 모두가 한 두장 씩은 채워서 내지만 지잡대가 되면 그런 학생이 1/3도 안 됩니다. 물론 많이 쓰는 것이 최고는 아니지만 그만큼 성의껏 공부를 한 증거는 될 것입니다.

  그런 차이는 하루 이틀에 생긴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초중고 아이들도 오랫동안 가르쳤기에 그것을 압니다. 정말 열심히 하는 아이들 그 아이들을 열심히 돕는 학부모와 반대로 공부하고는 담 쌓은 아이들과 그것을 방조하는 학부모들의 차이는 확연합니다. 대한민국 모든 아이와 부모가 공부에 열을 동일하게 올리고 있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그러기에 오찬호 박사의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차별에 찬성한다는 학생들의 주장은 그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생활도 해 보았지만 정말 울화통 터지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사는 사람들 그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지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그것은 공정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핀란드의 교육을 알게 되었을 때 느낀 것이 있습니다. 왜 우리 학생들만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물론 모든 학생들이 그렇게 해서 정말 잘 산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잘 살지 못합니다. 어차피 위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못 올라간다고 해서 모두 노력을 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어차피 못 올라갈 거면 편하게 살아도 될 텐데 마치 노력만 하면 된다는 식의 기만적인(?) 가르침에 많은 학생과 학부모가 이러한 레이스에 참가합니다. 일본에서 느낀 것은 그들이 그런 점에서는 매우 현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싹수가 없는 아이에게는 애초부터 공부를 강요하지 않고 즐기면서 학교생활을 보내도록 합니다. 그러기에 학생들의 삶은 양극화를 이루는 것이죠. 정말 저게 학생인가 하는 학생들도 있고 우리나라 학생들 뺨치게 열공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그런 현명함이 왜 우리에게는 허용이 되지 않을까요?

  왜 우리 학생들만 개고생하며 청소년시절이라는 소중한 시기를 살아야 하나요? 핀란드 여고생의 삶을 엿보면 3시면 학교에서 돌아와 즐겁게 남은 하루를 보내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데 같은 또래 우리 학생들은 3시는커녕 5시가 되어도 학교에서 열공하고 저녁도 학교에서 먹고 공부하거나 학원으로 직행하거나 하죠. 같은 하늘 아래에서 이렇게 달라도 됩니까? 도대체 왜 이런 차별 아닌 차별을 당해야 하나요? 우리가 예전처럼 못 사는 나라라면 몰라도 이젠 남부럽지 않게 사는 나라가 되었는데 학생들의 삶은 행복지수는 오히려 떨어지고 있으니 말이죠.

  그렇게 살아왔으니 보상심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요? 지방대생차별에 대한 학생들의 생각을 가지고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지방대 학생들의 삶을 잘 알기에 그렇습니다. 솔직히 차별받아도 될 정도로 살아갑니다.(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고등학교나 중학교 시절에 어떻게 살았을지도 짐작이 갑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가르친 경험에 의한 것입니다. 저라도 같은 대접을 받는다면 울화가 치밀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속된 말로 노오오오력이 요구되는 사회에 살아야 하는가? 그로 인해 모두가 잘 사는 것도 아닌데 왜 모두가 아니 대부분이 지옥의 레이스에 가담해야 하는가? 핀란드는 왜 그렇지 않는 사회가 되었는가? 세상이 모두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문제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3. 이 모든 것이 기성세대의 책임일까요? 86세대는 죄가 없다.

  ‘노오오력사회 언제부터 왜 시작되었을까요? 손이 꽁꽁꽁 발이 꽁꽁꽁 겨울 바람 때문에...어디서 이 바람은 시작되는지..너무 너무 얄미워..”아이들의 노래처럼 우리는 노오오력사회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궁금하고 또한 얄밉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특히 청춘을 아프게 하는 노오오력사회의 시작은 누구나가 궁금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표준답안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1. 사회가 양극화되었다. 2.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하다 3. 그러니 노오오력을 해야 잘 살 수 있게 되었다. 대개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그 반대의 상황을 전제로 합니다. 1. 사회가 비교적 평등하다 2. 양질의 일자리가 많다. 3. 그래서 노오오력을 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었다. 하는 과거에 대한 인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아 옛날이여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나온 주장이 86세대 기득권론입니다. 이 주장은 이렇게 전개됩니다. 1. 86세대는 고도성장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았다. 2. 그들은 양질의 일자리를 100%보장받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3. 지금도 윗자리를 꿰어차고 있어 젊은 세대의 앞길을 막는 기득권세력이다. 4. 그것은 능력이 아니라 운이다. 왜 그들만 꽃길을 걷고 우리는 힘들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해결책은 한 마디 마이 먹었다 아이가? 고마 해라!”입니다. 격하게 말하면 “86세대 물러가라! 물러가라!”입니다. 86세대는 적폐세력일까요?

  최근 조국 사태는 이러한 문제를 전면에 드러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때 아닌 세대론이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고 86세대가 죄인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정치분야입니다. 86세대가 정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니 그것을 타겟으로 맹공격이 시작된 것입니다. 소위 386운동권정치가들은 모두가 기득권의 화신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젊은이에게도 기회를 달라고 사회는 외침니다.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86세대는 기득권자일까요? 86세대가 사회에서 활동할 무렵 무엇이 일어났습니까? 외환위기입니다. 많은 86세대가 명퇴니 뭐니 해서 직장에서 쫓겨나 자영업에 뛰어들었습니다. 86세대는 대학진학률이 30%입니다. 지금은? 70%가 넘습니다. 기득권이라고 해 봐야 30%입니다. 나머지는 고졸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그 당시에는 학력별 차별로 나타났을 뿐 근본적 차이는 없습니다. 여성의 경우 대졸 취업은 하늘에 별따기 였고 대부분 고졸인 그녀들(80%)은 결혼과 함께 그나마 얻은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일이 태반이었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은 보이지 않는 차별로 고통받았지만 62년생 김지영은 노골적 차별에 시달린 것입니다.

  여성과 고졸(같은 세대의 70%)이 경쟁에서 탈락하니 나머지 30%가 꽃길을 걷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하지만 학력이라는 객관적 기준이 있으니 그것을 차별이라고 비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게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을 갔어야지라는 말을 들어도 불만을 터트릴 수 없었죠. 실은 공부를 잘 하지만 돈이 없어 대학을 포기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인데 말입니다.

  대다수의 희생으로 소수의 인간이 혜택을 누렸음에도 왜 모두가 그런 삶을 살았다고 착각하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목소리를 내기 때문입니다. 신문기자 지식인 등등 86세대 기득권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소수에 속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발아래에서 살아온 대다수의 동기들을 잊었습니다. 86세대라는 말도 잘못되었습니다. 86880년대 학번이라는 의미인데 70%는 학번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86세대라는 말이 그 세대를 대표해야 합니까?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대졸86세대는 꽃길만 걸었을까요? 384556도라는 말을 아십니까? 38선이란 38세에 정리해고의 위험에 놓인다는 말이고 45정은 45세정년이라는 뜻입니다. 56도는 56세까지 일하면 도둑이라고 하는 것이죠. 예전에 정년이 56(55)이니 정년까지 일하면 도둑이라는 것으로 그만큼 정년을 채우고 퇴직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원래는 다른 의미로 쓰이던 이 단어들이 일종의 자조적인 뜻으로 쓰였습니다.

  삼성전자에 취업한 사람 중 정년을 채우는 사람은 불과 10%라고 합니다. 절반은 38선을 넘지 못하고 나간다고 하고요. (입사 10)정년 퇴직하면 꽃길일까요? 어떤 책에서 보니 전무이상으로 퇴직하지 않으면 노후보장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삼성전자라는 초일류 기업도 그렇다면 다른 기업은 말해 무엇합니까?

  86세대가 기득권자라면 그 기득권으로 인해 혜택을 많이 받는 것은 누구일까요? 그 자녀들입니다. 단군이래 최대의 스팩은 거저 생긴 것이 아니라 86세대가 지금의 2030세대에게 준 선물입니다. 그들은 스팩은 커녕 대학에 가기만 해도 감사해야 할 세대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정년도 못 채우고 나와 새로운 일터에서 끝나지 않는 가족부양의 의무를 지고 살아갑니다. 여성들은 아예 꿈도 가지기 어려워 결혼과 함께 주부로 살아갈 것을 강요당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이래도 혜택받은 세대 기득권 세대입니까? 아직도 젊은 세대는 피해자라고 생각합니까?

  결과를 뒤짚으면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86세대가 결과적으로 기득권자들일지 모르나(물론 전혀 아닙니다. 대부분은)그것은 그들이 원해서도 의도해서도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보장을 받고 살아온 것도 아니고요.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입니다. 대학을 못 가 받는 차별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불평을 하지 않았던 것이지 지금보다 차별없는 시대였기 때문에 묵묵히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여성들보다 과거의 여성들이 며느리노릇하기 쉬워서 명절 때 편해서 며느리 증후군 명절증후군이 과거에 없었던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86세대 여성들은 82년생 김지영에 공감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아니 저 정도가지고 왜 그래?’였죠. 하지만 그녀들도 42년생 김지영에겐 같은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불평을 하지 않는다고 문제도 없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저 그것을 운명으로 여기고 살아왔기 때문에 침묵한 것일 뿐입니다. 자신들만 힘들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엉뚱한 데에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까? 마녀사냥인가요?

4. ‘노오오력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꿈꾼 적이 있는가?

  ‘양질의 일자리를 늘려야 해결될까요? ‘노오오력사회의 문제가. 86세대가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양질의 일자리가 많아서가 아니라 양질의 일자리를 대졸남성들이 독점했기 때문에 문제가 보이지 않았고 그것을 당연시하기에 불만이 없었을 뿐입니다. 즉 모두가 양질의 일자리를 차지해서 잘 살던 시대는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학력 성별 등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신분사회 하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분수를 지키고 만족하려고 한 것 뿐이죠.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고도성장의 혜택입니다. 성장률이 높으니 생활의 향상이 눈에 띄게 나타납니다. 모두가. 그래서 그것으로 자신들에 대한 차별을 참아낸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제보다 나은 삶이 주어지면 그것의 절대치와 관계없이 만족을 느낄 것입니다. 일종의 진통제 같다고 할까요?

  게다가 차별에 대한 인식이 달랐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차별 아래에서 사니 자신이 차별받는다는 생각보다는 누군가가 잘나서 잘 산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가난의 대물림 부의 대물림은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다만 오늘날 그런 현상이 눈에 보이게 펼쳐지고 있고 또 민주주의가 발달하니 그것을 부당하다고 여기게 되었기 때문에 불만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핀란드가 오늘을 만든 것은 노오오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오오력을 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노오오력사회를 만드는 노오오력을 해 왔습니다. 같은 노오오력이라도 방향이 다르면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결국은 구성원들의 의지의 문제입니다.

  핀란드만이 아니라 북유럽 나아가 유럽의 나라들은 모두가 같은 노오오력을 해 왔습니다. 스웨덴의 사회민주당이 전개한 국민의 집운동은 그러한 노오오력의 하나입니다. 국가를 하나의 집으로 보고 가족인 국민은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정신으로 나라를 변화시켜 왔습니다. 타게에를란데르 수상은 23년간의 집권기간동안 함께 잘 사는 나라를 만들자고 국민에게 호소하여 성공적인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노오오력은 결국 노오오력이 필요없는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반대의 방향으로 노오오력을 해 왔습니다. 경쟁을 부추겨 노오오력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사회를 만든 것이죠. 1968-1969년에 중학교 평준화 1973-74년 고등학교 평준화 1980년 대학 본고사 폐지 1990년대에 대학의 급격한 증설 등으로 경쟁의 문을 활짝 연 것 입니다. 학력에 관계없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학력을 올리도록 유도한 것이지요. 결과는 학력인플레입니다. (평준화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평준화와 대학증설이 결과적으로 학력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대졸은 의무적인 조건이 되었고 마치 운전면허증같이 흔해지고 필수화되었습니다. 물론 전혀 필요 없는 분야에서조차 그렇습니다. 과거에 고졸들로 메워지던 9급 공무원은 이제 대졸이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자체가 일을 더 잘하도록 하거나 삶을 다 낫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저 자리만 바꾸었을 뿐이고 남은 것은 대학의 높은 학비와 기회비용입니다.

  평준화로 경쟁이 완화되었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중학교 입학이 평준화되자 고등학교 입시가 치열해집니다. 고등학교 입시가 평준화되자 대학입시가 치열해집니다. 대학을 대폭 늘리자 명문대입시가 치열해지고 취업경쟁이 격화되었습니다. 취업과 대입으로 압축된 경쟁은 그를 위한 준비가 점점 조기화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제는 유치원생조차 그러한 경쟁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문제는 평준화나 정원확대가 아닙니다. 유자격자를 늘린다고 경쟁이 줄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학력이 비슷하니 차별이 사라진 것 같지만 결국 서열구조가 존재하는 한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르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기에 더욱 그에 대한 박탈감이나 좌절감이 크다는 것 뿐입니다. 학력으로 구별 짓던 시절에는 최소한 헛된 고생은 하지 않았습니다. 희망고문도 적었죠. 마치 데이트 신청을 허락하고 만나기 직전에 취소하는 것과 같습니다. 애초에 거절했으면 차라리 포기하고 말 텐데 잔뜩 기대를 하고 만나러 갈 준비도 마치고 길을 나섰는데 휴대전화로 역시 안 되겠어요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노오오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꿈꾼 적이 없습니다. 수능시험을 보는 학생들을 격려할 줄만 알았지 수능시험을 모두가 볼 필요가 없는 세상은 그려본 적이 없습니다. 꿈을 가지라고 하며 격려는 했지만 그 꿈이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세상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획일적인 꿈만을 강요했고 모두가 일직선으로 달려가니 실패와 성공이 확실히 갈라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양한 목표지점을 제시하면 모두가 성공할 수도 있는데 말이죠.

최근에 부모와 학부모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관심을 끌었습니다.

부모는 멀리 보라고 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고 합니다

부모는 함께 가라고 하고 학부모는 앞서 가라고 합니다

부모는 꿈을 꾸라고 하고 학부모는 꿈 꿀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매우 감동적인 내용이기는 하나 문제가 있습니다다. 우리 사회에 부모가 과연 얼마나 될까 의문입니다. 자식을 이상적으로 키우는 부모가 전체의 1/3만 되도 우리 사회는 노오오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참혹합니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남을 이기고 승리하여 좋은 삶을 살려고 했지 함께 가고 멀리 보고 꿈을 꾸는 사회는 아니었습니다. 성공과 승리가 전부였습니다. ‘이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말에 맹목적 믿음을 가지고 행복대신 승리만을 추구하였습니다. 이등이하가 있기에 일등이 빛나는 것을 우리는 몰랐습니다.

  유학시절 가르침을 받았던 교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국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자식이 대학에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과 계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참으로 우리로서는 의아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노동자라도 자식만큼은 노동자가 아니라 화이트컬러로 살아가기 위해 자식을 대학에 보내려는 우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이야기입니다. 물론 저도 이햐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들은 신분상승으로 혼자 잘 사는 길 대신 함께 잘 살기 위해 투쟁을 해왔고 그 결과 노오오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대였습니다. 남을 제끼고 혼자 잘 살겠다는 마음으로 달려온 것입니다.

회전의자라는 노래는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잘 표현한 노래입니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 사람없어 비워둔 의자는 없더라 사랑도 젊음도 마음까지도 가는 길이 험하다고 밟아 버렸다

아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

돌아가는 의자의 회전의자에 과장이 따로있나 앉으면 과장인데 올 때마다 앉을 자리 비워있더라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보자고 밟아버린 젊음을 즐겨보자고

아 억울해서 출세했다 출세를 했다

  이 노래는 우리의 지난 세월을 대변해 줍니다. 억울하다는 것은 부당한 일을 당했음을 의미하는데 그것을 해결하고자 싸우기보다 출세해서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을 독려하는 노래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피해는 고스란히 방치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바뀌는 일조차 있습니다. 군대에서 신병이 괴롭힘을 당하다가 고참이 되면 괴롭히는 입장이 되는 것 같이. 결국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고 피해자만 바뀔 뿐입니다.

  지금의 젊은이는 다를까요? 전혀 아닙니다. 자신들이 대기업정규직이나 공무원이 되는 식으로 피해를 입지 않는 자리에 앉으면 모든 것을 잊어버릴 뿐 아니라 비정규직을 괴롭히거나 방치하는 행동을 합니다. 그것을 노오오력에 대한 대가로 생각하니 전혀 양심의 거리낌은 없습니다. 자신의 높은 급여나 좋은 대우가 어쩌면 그런 사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가능하다는 점을 모르거나 알아도 무시합니다. 아프니까 청춘인데 아프지 않도록 하는게 아니라 자신이 아프게 하는 사람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5. 들어가기 어려우니 더 받아야 한다고? 더 받으니 들어가기 어렵지.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대기업은 규모가 크고 중소기업은 규모가 작다는 것 아닐까요? 규모가 다르니 구성원 수도 매출 규모도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기업활동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는 것은 다를 수가 없습니다. 고용을 창출하고 재화와 서비스를 사회에 제공하고 원자재나 원료의 수요을 창출하여 다른 기업을 도와주며 세금을 납부하여 국가재정을 살찌우고 기부나 스포츠팀을 운영하여 사회적 공헌을 하는 것에서 그들은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차이는 양적인 것이지 질적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기업에 비하여 중소기업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급여와 복지 근로환경 등이 열악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심지어 중소기업에 근무하고 있으면 결혼도 어렵다고 하는 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도 들려옵니다. 어렵다는 것은 급여수준이 낮거나 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차별을 받는다는 것이기에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중소기업이 무슨 범죄집단이나 사회유해집단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기피하는 것일까요?

  제일 중요한 문제는 급여나 복지수준이 대기업에 비해 중소기업이 열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대기업은 매출이 크고 이익이 많으니 급여와 복지수준이 높고 중소기업은 낮을 수 밖에 없다고 여깁니다. 현실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로 생각하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대기업은 규모도 크지만 그만큼 쓰는 돈도 많기 때문에 비용도 높아집니다. 중소기업은 쓰는 돈이 적으니 비용도 낮아집니다. 그러니 문제는 구성원 1인당의 비용과 이익이지 규모는 아니지 않을까요? 규모가 커도 비용이 크게 들고 이익이 적으면 급여와 복지도 낮아질 것이고 반대로 규모가 작아도 비용이 적게 들고 이익이 많으면 급여나 복지도 높아지는 것이 정상이어야 합니다.

  일본에서 유학할 때 이러한 문제에 관한 책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일본에서는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격차가 크고 이것을 이중구조라고 하여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읽으면서 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건 일본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적인 현상 아닌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물론 그것은 한국에서의 인식을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이중구조는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전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본의 학자는 격차를 비판하는 책을 썼지만 실제로 그들의 격차는 우리보다 훨씬 낫습니다. 2018년의 자료에 의하면 일본의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80%의 임금을 받고 있고 초임은 90%라고 합니다. 이에 비하여 우리는 같은 해에 두 배 이상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501만대 231)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중구조를 한탄하는 일본이 이 정도라면 다른 선진국의 차이는 훨씬 덜할 것입니다.

  왜 이런 차이를 보일까요? 중소기업경영자들은 모두 양심불량이라 이렇게 적은 임금으로 직원들을 착취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대기업 경영자들이 너무 선해 임금을 듬뿍 주고 있을까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중소기업은 노동집약적 산업이 많고 대기업은 기술집약적 산업이 많아서 그럴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 통계에는 그야말로 영세한 노동집약적 기업도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착취라는 측면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젊은 청년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일본의 대기업은 우리보다 임금이 낮으며 이는 연령이나 경력이 높아져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이것을 격차의 문제와 연결시켜 생각하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대기업이 임금을 억제하니까 중소기업의 임금이 어느 정도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중소기업이 대기업과의 거래를 중심으로 활동을 한다는 점을 감안한 이야기입니다.

일본사람들은 장기거래를 선호하고 신용을 소중히 여깁니다. 원청과 하청의 관계도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함부로 납품가를 깎는 행위는 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청이라는 이름 대신 협력회사라고 하는데 그들이야말로 협력이 잘 이루어진다고 봐야 합니다. 하청업자의 기술을 도용해 폭리를 올리고 해당기업을 도산시킨 악덕 원청기업이 일본에도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어느 정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위의 추리는 사실일 가능성이 큼니다. 원청이 납품단가를 함부로 내리지 못하니 (또는 하지 않으니)임금을 마음대로 올리기 어렵습니다. 원청노조도 이것을 잘 알고 있으니 이를 이해하고 협조합니다. 그럼 하청의 임금이 부당하게 낮아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상생의 논리를 실현시키는 방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대기업노조가 높은 임금을 요구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파업도 불사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항공사 조종사 노조입니다. 오죽하면 스튜어디스들이 가서 설득을 하겠습니까? 이미  엄청난 연봉을 받는 사람들까지 파업을 합니다. 그것이 미칠 영향은 염두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대기업노조의 파업에 국민은 냉담합니다. ’귀족노조라는 이야기가 공연히 나온 것은 아닙니다.

  결국 그것은 하청이나 관계회사의 (중소기업이겠지요)임금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원청이 납품가 등을 후려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능하고 아무런 제재도 없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상화되니 중소기업의 임금은 계속 낮은 수준을 유지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이 관행화되면 중소기업의 임금전체가 낮아지겠지요. 남들이 적게 주는데 굳이 많이 줄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은 기업도 있겠지만.

  한국의 강성노조는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오죽하면 우리의 자동차 생산원가가 일본이나 다른 선진국을 능가하겠습니까? 그것은 생산성의 문제가 아니라 높은 임금이 더 큰 원인입니다.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의 임금(물론 정규직에 한합니다)도요타를 비롯한 세계적인 기업보다 높다고 합니다. 자랑스럽나요? 그 덕분에 우리는 값비싼 국산차의 소비를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회사의 임금이 높으면 하청업체 직원들의 임금도 높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거야 상식아니겠습니까? 아니라면 누가 박터지게 대기업을 가겠다고 하겠습니까?

  20여년 전의 이야기라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IT혁명이 한참 진행될 때 미국의 우수한 학생들은 대기업을 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중소기업에서 일을 배우고 아이디어를 만들어 창업을 하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이야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마 대기업임금이 너무 좋으니 굳이 그런 모험을 할 생각이 없고 창업이 가지는 이익도 적기 때문이겠지요. 미국에서는 창업한 기업이 대박을 내면 대기업이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인수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날로 집어삼키거나 착취의 대상이 되기 쉽다는 것도 사실이니 누가 힘들게 창업을 하겠습니까?

  대기업종사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기업 들어가기가 쉬운가? 힘들게 들어왔으니 그 정도의 대우는 당연하지라고. 하지만 사실은 반대 아닌가요? “대우가 좋으니 들어가기 힘들지 일이 힘들어 대우가 좋은가?”라고. 일노동 동일임금원칙이 엄연히 있는데 같은 일을 해도 규모 큰 회사에서 하면 더 많은 임금을 지급한다는 것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물며 같은 회사에서 같은 일을 하는데도 사내하청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임금이 낮습니다.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김용균법이 만들어진 사건은 이러한 부당함을 잘 말해줍니다. 위험한 일을 사내하청노동자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안전한 환경에서 일을 하지만 받는 임금은 훨씬 높습니다.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우대를 그들이 받아야 합니까? 원칙대로라면 위험이 높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어야 하지 않나요? 군대에서도 위험한 훈련을 받는 병사는 수당을 따로 받습니다. 그런데 왜 사회는 반대로 나갑니까? 안전한 곳에서 편하게 지내는 자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험지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는 적은 임금을 주는 것은 착취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 알바를 할 때의 경험입니다. 힘들고 궃은 일은 직원들이 하고 우리 알바들은 단순하고 정해진 일만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권한도 없고 임금도 저렴하지만 위험이나 강도는 훨씬 낮은 환경에서 일했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도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요? 힘들고 위험한 일은 자신들이 하고 비정규직은 좀 덜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해야 공평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대기업의 높은 임금은 결코 높은 능력과 노동강도에 대한 대가가 아닙니다. 들어가기 힘들어서 주는 것도 아닙니다.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을 착취하여 얻은 부당이득을 나눠 갖기에 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공생이나 상생을 잊어버린 집단이기주의의 산물이죠. 그런 착취를 금하여 중소기업의 종사자들이 높은 임금을 받게 된다면 들어가기 어려우니 높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중소기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직장은 어느 날 다른 기업에게 합병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과거에는 최저임금만 주던 회사가 높은 임금을 제공하고 근무시간을 단축시켜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기업의 인기가 치솟았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입사하고 싶어하는 기업이 되었다고 합니다.

  중소기업 노동자와의 공생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왕국을 구축해온 대기업노조들의 집단이기주의가 대한민국의 노동생태계를 망가뜨렸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노오오력을 했으니 당연히 받는 대우라고. 하지만 하지만 당신들의 그러한 이기주의가 우리 사회로 하여금 노오오력을 필요로 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묻고 싶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상생의 논리로 협력한다면 중소기업도 좋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직장이 될 것이고 그럼 노오오력없이 들어갈 수 있는 직장이 늘어나니 대기업도 마찬가지로 노오오력없이 들어갈 수 있는 직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협력할까요? 절대 아니겠지요. 적어도 스스로는.

6. 우리가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소비소유적인 삶에서 마음 중심으로 이동하기

  우리나라 교육문제의 90%는 입시문제입니다. 생각해 보면 좀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육에서 입시란 하나의 수단입니다.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 본질이고 제한된 시설과 인력으로 교육을 하려는데 받고 싶은 사람이 넘치니 부득이 입시를 실행하는 것인데 어느 덧 입시가 교육의 중심이 되고 그에 따라 교육이 결정되는 기가 막힌 현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막상 교육의 내용과 질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어집니다. 주객이 전도 되었다는 말이 이렇게 잘 들어맞는 경우도 드물 것입니다.

  일본에서 느낀 것인데 일본의 대학의 주요기능은 학생들에게 등급을 매겨 사회에 내보내는 기관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는 학부에 한정된 이야기이고 대학원이나 교수진은 다릅니다. 대학원교육은 상당히 수준이 높았고 교수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학부의 경우 이공계는 좀 다르지만 문과의 경우 4년간의 휴가를 즐기는 것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아리 활동 연애 취미생활 친구 만들기에 열을 올리고 학교수업이나 자율적인 공부는 부업도 되지 않을 정도로 소홀히 되고 맙니다. 그러니 일단 입시에서 정해진 등급이 대학이 수행하는 역할을 나타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어느 티브이 방송에서 기업의 인사담당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는 동경대의 입시는 신뢰하지만 교육은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 그들은 성적을 그다지 참고하지 않는데 이유는 성적과 업무능력이 그다지 상관관계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적 좋은 학생이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적이 나쁜 학생들이 일을 못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기에 학생들은 졸업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학교생활을 합니다.

  사실 저는 성적에 대하여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대학의 성적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불신은 그 인사담당자와는 다른 것입니다. 대학이 학생들의 성적을 부풀리기 하고 있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지 성적 자체를 못 믿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학생은 편입을 하였는데 과거의 학교에서 필요한 과목을 거의 다 이수했기 때문에 교양과목만 수강하고 졸업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왜 편입을 했을까요? 그저 졸업장이 필요했기 때문이겠지요. 게다가 교양과목이면 대기 1,2학년생들이 많이 들으니까 성적을 받기가 쉬웠을 겁니다. 이런 식의 성적을 신뢰할 필요가 있을까요?

  게다가 학교측은 성적을 잘 주라고 하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기도 합니다. 어느 학교에서는 교수가 저에게 전화를 해서 성적을 부탁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 탓인지 학생들의 수업태도는 한마디로 엉망이었습니다. 입결이 그리 낮은 학과도 아닌데도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우수한 학생들이었을지 모르나 교수들이 그런 식으로 뒷바라지를 하니 엉망이 된 것 같았습니다. 학교 입장에서는 학생들의 성적을 올려줘야 취업이 쉬워지니 그런 모양인데 이것도 어찌보면 부정부패의 하나라고 할 것입니다. 제가 기업의 인사담당자라면 성적은 그저 참고사항 정도로 할 것 같습니다. 저의 경험으로 볼 때 성적은 신뢰할 만한 자료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이야기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일본이나 우리나 학생들은 특히 우수한 학생들은 기승전입시라는 전제하에 교육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입시를 위한 입시에 의한 입시의 교육인 것입니다. 모든 교육은 입시로 통한다고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성적이 전부입니다. 실력을 쌓고 지식을 연마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참다운 교육이라 할 수 없죠.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입시제도가 문제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입학사정관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원래의 취지대로라면 훌륭한 입시입니다. 평소에 꾸준히 자신이 원하는 진로를 향하여 공부하여 실력을 쌓아 그곳으로 진로를 택하는 것을 평가하는 제도입니다. 스토리를 쌓아가는 것이죠. 그러나 현실은 스토리를 쌓기 위해 갖가지 꼼수를 동원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공부가 입시를 위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봉사도 입시의 수단이 되고 독서도 그렇습니다. 이런 상태라면 하나님이 내려와도 우리나라의 교육은 입시가 지배할 것입니다.

  대학에 가면 나아질까요? 이번에는 성적과 스팩쌓기가 교육을 지배합니다. 다르다면 부모가 주도하던 부분이 줄고 학생 본인이 조금은 더 주체적으로 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지금도 입시컨설팅회사가 학생의 입시를 설계하고 지도하는데 앞으로 대학생활도 그렇게 해주는 업자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요.

  하지만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이 먼 옛날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우리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인 80년대도 그렇지만 그 이전에는 교육과 입시 취업의 관계는 훨씬 약했습니다. 대학은 대학으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기업과는 선을 긋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입시는 확실히 중요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초중고생활을 지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3이 되기 전까지는 할 만큼 공부를 하다가 고3때 집중해서 입시에 매달리는 것이 전부였지요. 우리 선배세대들은 아예 고3이 되기 전에는 공부와 담을 쌓고도 명문대에 진학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는 동아리가 잘되어 있었고 심지어 학교연합동아리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변했을까요? 경제성장으로 삶이 윤택해지자 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교육이라기보다는 입시나 취업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은 우리 못지않게 교육에 열을 올리지만 그들은 우리와 달리 입시가 취업이 교육의 중심이 아닙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입시나 취업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올리고 있지만 그것은 결과일 뿐입니다. 어려서부터 신앙교육 외국어 교육 지혜교육을 열심히 하니 당연히 학습능력이 높아지고 그래서 다른 교육이나 입시에도 강한 것입니다.

  이러한 교육열로 혜택을 누리는 것이 대학과 기업입니다. 아주 옛날에는 대학과 기업이 머리를 숙였습니다. 좋은 학생을 보내 주십시오라고. 대학입학설명회, 기업설명회는 그러한 시대의 관습적 행사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관계가 역전되었습니다. 고등학교가 대학에 머리를 숙이고 대학이 기업에 머리를 숙이게 된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교육열이 뜨거워지니 공급이 늘어나고 그래서 수요자가 우위에 서게 된 것입니다. 입시에 공급이 늘어났다는 것은 입시지원생이 늘어난 것이고 취업의 경우 취업준비생이 늘어난 것이죠. 특히 후자의 경우 대학정원이 대폭 늘어나니 자연스럽게 취준생도 늘어났고 그러니 공급과잉이 되어 수요자인 기업은 더 이상 머리를 숙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입시와 취업에 필요한 조건은 까다로워졌습니다. 더 많은 스팩을 요구하게 되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학생들은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대학의 낭만은 사라지고 반은 취업학원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을까요? 바로 학생들 자신입니다. 기업은? 기업은 그런 학생들의 약점을 이용한 것 뿐입니다. 마치 구애자의 절실함을 안 상대가 이를 이용하여 온갖 요구를 제시하는 것같이 말입니다.

  이런 고된 과정을 거치니 보상심리가 엄청나게 커져 버리는 것은 당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학생이 괴물이라고 한 오찬호 교수는 이러한 점을 알고는 있을까요?) 그러니 차별을 찬성하는 것입니다. “감히 날로 정규직이 되려고 하다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조국 사태의 본질은 정의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른바 SKY학생들이 그토록 소란을 피웠죠. 그들은 김용균 사건에는 털끝만치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정규직이 자신들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이 문제의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소비소유중심의 가치관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밥먹고 사는 것이 힘들지 않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욕구는 날로 커집니다. 행복은 오로지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만 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취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그것에 집중하게 되니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차별과 착취를 용인하는 괴물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5-60년대의 영화를 보면 가족간의 관계는 정말로 따듯하게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가족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있고 집은 일종의 합숙소 같은 곳이 묘사됩니다. 적어도 5-60년대에 비하면. 그 시대에는 지금에 비하면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아직 고도성장의 열매를 충분히 맛볼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표정은 밝아보입니다. 영화니까 그렇다고요? 하지만 지금은 영화에서도 그렇게 밝지 않아 보입니다. 모두가 피곤해 보이고 서로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입시와 취업의 이야기를 했지만 그 후로는 다를까요? 아닙니다. 그 다음엔 결혼을 해야 하고 집을 사야 하고 자녀를 양육해야 하고 그 아이들도 같은 방식으로 입시몰빵을 시켜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위해 돈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더 미친 듯이 일해야 합니다. 입시가 취업준비가 끝나자 지옥 같은 사회생활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지난 5,60년간 우리는 삶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가치를 버렸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행복입니다. 도구가 없으면 물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인간 즉 괴물로 변해온 것입니다. 저녁식탁을 둘러싼 가족의 정겨운 모습 지금도 찾아볼 수 있을까요? 예전에는 아침에도 그런 정경이 펼쳐졌습니다. 하루를 그렇게 출발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든든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침식사자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저녁도 편의점에서 허겁지겁 때우는 경우가늘어납니다. 모든 것은 물질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기업이 대학이 최강의 존재가 된 것은 이러한 가치의 상실의 결과인지 원인이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양자가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가치의 상실이 물질주의를 낳고 그래서 대학과 기업이 최강자가 된 것인지 아니면 반대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우리가 괴물이 되어 온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어떤 신혼부부가 텔레비전을 없애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더 부부사이가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달이 가지 못해 결국 텔레비전은 되돌아 왔습니다. 이미 그들은 텔레비전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텔레비전없이 살아온 역사입니다. 그러니 없어도 되는 것이죠..지금은 컴퓨터 게임기 휴대전화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무기력한 존재입니다.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예전에 방영되었던 요괴인간이라는 만화영화의 주제가에 나오는 빨리 인간이 되고 싶다라는 말처럼. 오로지 물질적인 성공을 위해 양육되어 마음의 행복을 모르는 괴물을 만드는 교육 대신에 인간을 만드는 교육이 다시 부활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회가 되기를 또한 바랍니다. 괴물이 아닌 인간이 넘치는 사회가 되돌아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