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대한민국의 가족(2)가족 영원한 것일까? 그 가치를 묻는다.

닥터 양 2020. 4. 11. 19:16

대한민국의 가족(2)가족 영원한 것일까? 그 가치를 묻는다.

 

목차

1. 가족은 또 하나의 이익사회

2. 가족이 부담이 되는 시대이다.

3. 가족이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 반사회적 집단으로서의 가족

(1) 역기능가족 결핍과 과도한 애착의 결과

(2) 학대 한 인간에 대한 인격적 살인

(3) ’가족은 부정과 비리를 타고

4. 가족 사라져야 할 존재인가?

5. 새로운 사회적 연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포스트 패밀리시대를 대비하여

 

1. 가족은 또 하나의 이익사회

가족이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갖다 버리고 싶은 것”(기타노 다케시)

  영화감독이며 배우이고 예능. 코미디, 등 다양한 방송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기타노다케시(예명 피터 다케시)의 이 말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가족에 대한 불만은 있어도 가족제도에 대하여는 그다지 회의를 느끼지 않는 우리에게 그의 발언은 폐륜(?)에 가까운 망언으로 여겨지지는 않을까 싶다. 가족은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할 존재라는 것이 우리 사회의 공통적 가치관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인데 여러분은 동의하는가?

  하지만 가족이라는 것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해야 할지는 우리 사회라고 해서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출가한 자녀는 가족일까? 반대로 출가한 상태에서 부모님은 가족일까? 형제자매는? 조카나 사촌은? 결혼이 새로운 가족의 탄생인가 아니면 가족의 확장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결국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답을 낼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여성들은 시부모는 가족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친정 부모는 가족에 넣고 싶을 것이고 남성들은 그 반대일 것이다.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시집가면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도 사라진 지금 누가 가족인지 아닌지는 민감한 질문이 되고 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가족이 결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와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상대적 존재라는 것이다. 퇴니에스이라는 사회학자는 인간 사회를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로 나누었는데 공동사회란 가족이나 학교와 같이 혈연 지연과 같이 이익과 관계없이 만들어진 사회이고 이익사회는 기업같이 이익을 위해 결성된 사회를 말한다. 가족은 공동사회에서도 가장 중요한 존재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오늘날 가족은 공동사회라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이익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이익이 되지 않는 가족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라는 생각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비혼이라는 선택지의 대두는 그러한 변화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비혼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매우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데 꼭 결혼을 해야 합니까?”이다. 새로운 의문은 아니다. 30여년 전 우리가 결혼을 해야 할 나이였을 때도 그것은 젊은이들의 고민이었다. 다르다면 그것을 실현시킬 배경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혼이 필수라고 인식되던 시절 결혼을 거부하는 사람은 비정상적인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큰 압박이지만 현실적으로도 비혼은 어려운 선택이었다.

  ‘비혼을 주도(?)하고 있는 여성들의 경우 경제적인 자립이 어려워 비혼은 일생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전문직 여성-의사, 교사 등-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여성들에게 결혼은 평생의 경제문제를 해결해 줄 가장 보편적 방법이었다. 사회가 아직 여성을 제대로 수용하지 않던 시절 그녀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오죽하면 취집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남성들은 또 다른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 대를 이을 것 그리고 며느리를 통해 효도를 하라는 압박이다. 1980년대 우리 사회는 아직도 대를 잇는다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여겨지던 시대이다. 그러니 장가가서 아들 낳으라는 압박은 아들인 남성들에게 주어졌고 특히 나같이 장남의 경우 더욱 심했다. 며느리 효도 역시 아들 가진 부모에게는 당연한 로망이었기에 아들들은 그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극단적으로 말해 아들들은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부모님의 며느리와 결혼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며느리의 남편은 아들이 아니다라는 말까지 나오는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30년 동안 비혼을 실현할 하부구조인 경제적인 변화 그리고 가치의 변화가 생긴 오늘날 비혼은 더 이상 비현실적이거나 위험한 선택이 아니다. 아들을 낳아 대를 잇자는 생각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고 며느리 효도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과거의 유물로 전락했다. 한국 며느리 최고라던 외국인의 엄지척은 박물관에 가야 할 것 같다. 여성들도 경제적인 이유로 결혼을 선택해야 할 동기는 약해졌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결혼은 필수이니 하지 않으면 비정상적인 인간이라는 (과격하게 말하면 함량미달’)생각도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이다. 오히려 결혼 안 해?”라는 질문이 꼰대의 상징이 되기조차 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의 새로운 고민은 비혼이냐 미혼이냐 이것이 문제로다일 것 같다. 여성들은 자신이 결혼을 해서 얻을 각종 혜택과 그렇지 않을 경우 가질 수 있는 이점을 끊임없이 저울질하고 있을 것이다. 남편의 수입과 사랑이라는 수입과 자녀라는 존재 가사 육아의 문제라는 지출의 수지가 과연 결혼을 택할 만큼 흑자인지가 그녀들의 관심사일 것이다. 물론 남성들도 그런 고민을 한다. 다르다면 여성은 남편의 수입의 비중이 크고 남성이라면 아내의 사랑에 더 관심이 크다는 것이다.

  이는 결혼이 남녀에게 주는 역사적 의미를 잘 말해 주는 차이라 하겠다. 여성은 사회생활이 어려운 가운데 남편을 통해 그것을 간접적으로 얻고자 하였고 그 대신 내조라는 이름의 사랑과 자녀를(당신의 아이라는 표현이 이를 말해 준다. 대를 이어줄 아이로서의 자녀이다) 선물하였다. 남성은 아이와 내조를 받으며 아내가 원하는 사회적 성공과 수입을 제공하여 아내에게 평생의 삶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것은 암묵적인 계약이었다. 사랑이 매개체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고 다만 하나의 명분에 불과했다고 생각된다.

  결국 가족이라는 존재는 출발부터가 상호의 이익이 전제된 이익사회라고 볼 수 있다. 아내의 내조는 남편의 성공이 가져다주는 이익을 기대한 철저히 계산된 행동일 뿐 남편의 행복과는 무관한 것이다. 남편의 사랑 역시 그의 이익- 대를 잇고 성공을 하고-을 위한 조건부 봉사일 뿐이었다. 의식적으로 이러한 것을 강조하는 부부는 적어도 과거에는 없었다. 사르트르와 보바르가 계약결혼을 해서 화제가 되었지만 결혼은 태생적으로 계약이고 가족은 그것을 이행하기 위한 사회조직인 것이다.

  자녀라고 이익을 떠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없다. 1990년대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여성이 자신의 2살짜리 딸을 우물에 던져 죽인 사건이 있었다. 그 이유는 아들을 낳지 못한 스트레스였다고 들었다. 그만큼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이 심했다는 사실을 요즘의 젊은이들은 꿈에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딸을 더 필요로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아들을 딸을 요구하는 변화를 우리 세대는 보아왔다.

  이것은 자녀가 이익의 대상임을 생생히 보여 주는 증거이다. 딸에 대한 차별은 인간적인 미움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이해타산에 의한 것이었다. 딸은 언젠가 며느리로 신분을 바꿔 남의 집의 귀신이 될 존재였다. 남에게 줄 물건(?)에 필요 이상으로 투자를 할 가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생각을 하는 부모는 없거나 매우 드물 것이다. 이제 딸은 출가외인이 아니라 소중한 자산이다. 그러니 더 투자해서 그 이익을 누려야 한다. 여기서 이익이란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정신적 만족감도 포함된다.

  장애인 자녀를 차별하던 것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도 장애인 자녀는 차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지만 옛날에는 딸보다 더한 차별의 대상이었다.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처럼 결혼하기전까지는 그래도 집안에 공헌이 가능한 딸과 달리 그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도움은커녕 손해 또는 방해 일 뿐이니 차별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장애를 가진 아이에 대한 친권을 포기하는 부모는 적지 않았다. “병신 자식 떠안게 되었다는 소리를 떳떳하게 하는 부모를 본 적도 있다. 오늘날은 좀 달라졌을 것이다. 그것은 인식의 변화도 있지만 그만큼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2. 가족이 부담이 되는 시대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를 “There is no free lunch”(공짜 점심은 없다)라고 표현한다. 겉보기에는 무료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어디선가 그 비용은 반드시 지불되어진다. 지불하는 사람과 혜택을 받는 사람이 다를 경우라도. 뇌물이 그러한 예이다. 뇌물은 뇌물을 받는 자가 이익을 보나 그 대가는 뇌물의 피해자가 지불한다. 공무원이 뇌물을 받으면 국민이 회사의 간부가 받으면 소비자나 회사의 다른 구성원들이 지불 한다. 그러기에 뇌물은 범죄이고 처벌의 대상인 것이다. 일종의 도둑질인 셈이다. 컨닝의 경우 금전적인 피해는 아니지만 시간을 도둑질한 것이고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이다.

  가족이라고 예외가 아님은 앞에서 어느 정도 언급하였다. 가족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절대 무료가 아니다. 여성은 남성의 월급을 받는 대가로 가사와 육아 내조를 해야 했고 남편은 그것을 위해 세상의 찬바람과 싸워야 했다. 부부의 성관계는 그러한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상당히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종류의 성매매이다. 다르다면 일반 성매매와 달리 관계할 때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누가 성매매자이고 성매수자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하지만 오늘날 가족의 서비스가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과거 가족은 소비집단이자 생산집단이었다. 하지만 전업주부들이 하는 가사와 육아의 대부분이 이제는 아웃소싱되고 있다. 취학 전 아동은 보육시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취학 후에는 학교와 학원에서 그 책임의 대부분을 짊어지고 있다. 가사도 점점 가정에서 사라지고 있다. 하루 세끼를 책임지던 주부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어졌고 외식이나 배달음식은 늘어만 가고 있다.

  여성들은 그럼에도 자신이 지어야 할 가정에서의 의무를 부담스러워한다. 남편의 월급을 위해 자신들이 삶을 희생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대가를 치룬다고 생각하기보다. 이 역시 과거와 달라진 점이다) 차라리 스스로 삶을 책임지는 게 낫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물론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재벌이나 그에 준하는 재력을 가진 남자가 나타난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들이 그런 유혹에 패하여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촌스러운(?) 가정주부의 길을 택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물론 남성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남자신데렐라는 그리 흔하지 않은 것 같고 있어도 자랑스러운 존재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남성들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남성이 결혼으로 얻는 이익은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대부분 마음의 위로와 기쁨이다. 자신을 닮은 자녀의 모습에 흡족함을 느끼고 아내의 정겨운 말에 위로받고 정기적인 성관계로 욕구불만을 해소한다. 거기에 아내의 내조가 때로는 사회생활에서의 성공에 큰 도움이 되지만 이것은 보너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처럼 아내의 조언으로 성공하는 남성이 얼마나 될까? 결국 내조라는 것은 가정에 신경 안 쓰고 일에 전념하도록 해 주는 것이니 아내에게도 큰 이익이 된다.

  딱히 현실적 이익이라면 아내가 살림을 알뜰하게 해서 비용을 최소화함으로써 생기는 잉여소득일 것이다. 더 수완이 있는 아내라면 재테크를 통해 재산을 증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이른바 복부인이라는 부동산재테크 전문가들이 활약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들은 남편의 쥐꼬리만한 월급을 뻥튀기하여 가정경제에 공헌한 주부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녀들은 전체 주부 중의 극소수이지만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때론 그녀들의 실패로 일가가 고통을 받아야 하는 흑역사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가정의 생산적 기능이 소멸되는 지금 남성들에게 가족이 주는 이익은 부담에 비해 너무 크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쥐꼬리만한 월급을 절약하기는커녕 소비하기 바쁘다.     가정의 기능이 외주화되는 지금 남편들은 더 많은 수입을 가져오도록 압박을 당해야 한다. 특히 교육비의 증가는 저녁이 없는삶을 그들에게 강요한다. 그렇게 평생 일하다 은퇴하면 가족들은 그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심지어 소외시키기도 한다. 밥조차 편하게 먹지 못한다.   ‘삼식이라는 비아냥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자식들은 이미 아내의 추종자들이 되어 있어 아버지를 있어도 없어도 그만” “있는 게 민폐라고 여기는 일도 드물지 않다. 아버지 남편의 자리는 가정에서 사라졌고 그는 결국 밖을 맴도는 외로운 처지가 된다. 이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남자 아이들에게 결혼과 가정은 부담만 주는 존재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어느 잡지에서 충격적인(지금이라면 아무렇지 않았겠지만)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온 엄마들의 표정이 예전보다 어둡다는 기사였다. 그것은 아이를 맞이하는 마음이 행복으로 가득 차기보다는 아이를 돌봐야 하는 부담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 나 자신도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있었지만 그런 부담을 느낀 적이 없었다. 마중을 나갈 때마다 아이들과 보낼 저녁 시간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차 있었기에 기사에 대한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자녀도 부담이 되어감을 의미하는 이 기사는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자녀가 함께 있어 행복한 존재가 아니라 지겨운(?)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다. 자녀들의 학업성적을 자랑하는 부모는 있어도 자녀의 존재를 기쁨으로 이야기하는 부모는 드문 것 같다. 왜 그런지 깊은 의미는 모르겠지만 자녀보다 더 큰 즐거움의 재료가 많으니 자녀의 존재가 부담스러워진 것은 아닐까 싶다. 그만큼 세상은 다양해지고 풍요로워진 것이다. 자녀와 세상이 경쟁을 하는 시대라고 해야 할까?

  나아가 자녀와 부모는 전쟁이라 할 정도의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불효자방지법인가 하는 법이 생기려는 것은 그것을 상징하고 있다. 과거 부모 봉양은 자녀의 당연한 의무였고 그걸 전제로 부모는 자식에게 모든 것을 다 주어 성공을 도왔다. 상호간의 계약인데 오늘날 자녀들은 받을 것은 다 받지만 의무는 하려고 하지 않는다. 부모가 재산을 다 주고 부양받을 것은 약속받았지만 부모를 외면하는 자녀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자 불효자방지법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 법에 대한 젊은 세대의 생각은 의외로 냉담하다. “효를 강요하다니 말이 되나?” “자신들이 고도성장의 혜택을 받았으니 우리에게 주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의 주장이 눈에 들어왔다. 불효자방지법’(제목이 맘에 안 든다. 효는 아들만 하나? 그냥 불효방지법이라고 하지)효를 강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받은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인데 이런 반응이 나온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한 마디로 먹튀하겠다는 소리 아닌가? 고도성장의 혜택이란 말은 어불성설이다. 그 혜택이 대부분 누구에게 돌아갔겠는가? 바로 자녀들이다. 여간한 고소득자 아니면 고도성장세대들은 자신들보다 자녀에게 소득의 대부분을 쓰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런 기막힌 사실을 그들은 아는지 모르겠다.

  가족이 부담이 되는 시대가 찾아왔다. 가족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허상이 깨지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동안 가족은 이러한 허상을 바탕으로 유지되어왔다. 가족은 결코 모두가 행복한 집단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희생이 되고 누군가는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그 실체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채 꽁꽁 숨겨져 왔다. 민주주의의 발달 개인주의의 발달 그리고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사람들이 더 이상 가족이 주는 부담을 지고 싶어하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서 세상에 공개되고 비판되기 시작했다. ‘희생이란 더 이상 미화될 수 없는 부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서로에게 희생을 요구하지만 자신은 하지 않겠다고 버티면 그 조직은 사라질 수 밖에 없다. 대가족이 그랬듯이 오늘날에는 핵가족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 그 정도의 희생조차 부담스러워진 시대이기 때문이다. 특정인이나 집단의 책임은 아닌 것 같다.

3. 가족이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 반사회적 집단으로서의 가족

(1) 역기능가족 결핍과 과도한 애착의 결과

  ‘역기능가정이라는 말을 접한 것은 7년 전(2012)이었다. 도서관에서 열리는 독서토론회에 참가하여 심리상담사의 지도 하에 심리학 서적을 읽게 된 나는 가족의 허상에 대한 책들을 접하게 되었다. 가족 안에는 반드시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자신에게 종속시켜 이익을 보려는 자가 있기 마련인데 그것이 도를 넘으면 역기능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역기능가족은 특수한 것이 아니며 90% 가까운 가족에 역기능적인 특징이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은 가족= 문제적 집단이라는 의미가 된다. 즉 문제의 가족이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가족은 문제 가족이라는 것이다. 물론 어느 집단이나 문제는 있기 미련이고 가족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하지만 역기능가족이란 그것이 도를 넘는 수준에 이른 상태이기에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더구나 가족의 존재는 한 인간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에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은 가족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가족에게 양육된 아이는 문제의 성인이 되어 사회를 어지럽힐 가능성이 크다. 그가 권력이나 부를 가질 경우는 더욱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연산군은 친모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었고 계모인 정현왕후의 손에 자랐다. 정현왕후는 훗날 중종으로 즉위하는 진성대군을 출산함으로써 연산군과는 미묘한 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었으니 연산군에게 모정을 제대로 느끼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모정이란 그런 것이다.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만큼 남의 자식을 미워하는 특징이 있다. 더구나 상대가 자기 자식과 왕위를 다툴 존재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인종의 계모 문정왕후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연산군이 폭군으로 전락한 것에는 이러한 가족사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역기능 가족의 피해는 자녀들이 가장 많이 받는다. 폭군에게(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다) 지배되는 아이들은 제대로 된 인성을 가지고 자립한 성인이 되기 어렵다. 조숙한성인아이가 되어 버려 겉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속은 썩어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눈에 보이는 학대는 없으니 제3자가 나서서 해결할 수도 없다. 나는 가정방문교사를 하면서 이런 가정들을 여러 번 목격했으나 나 역시 다른 방법이 없어 묵과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병약한 아이가 폭군이 되기도 한다. 병약한 아이는 자신의 병을 이유로 가족들을 지배하는 폭군이 된다. 가족의 모든 것이 그 아이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니 아이는 그것에 권력의 쾌락을 느껴 무의식적으로 병의 치유를 거부하기도 한다. 그것은 어른들에게도 피해를 주지만 같은 자녀들에는 더욱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자신이 정당히 받아야 할 부모의 사랑마저 빼앗긴 것에 의한 아픔은 그것이 표출되든 아니든(안 된다는 것이 더 큰 문제)내면에 자리잡고 나중에 엉뚱한 곳에서 폭발하기도 한다.

  ‘대체 배우자라는 말을 아는가? 남편이나 아내가 제대로 배우자노릇을 하지 않거나 할 수 없게 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당사자는 배우자에게 충족시킬 욕구를 자녀에게 요구하게 된다. 이것은 특히 여성들에게 잘 나타난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 것을 자녀에게 채우고자 한다.    이 경우 아들은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강요당하고 그것은 아들의 삶을 왜곡시킨다. 모자의 근친상간이 드물지만 발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더 드물게 부녀 근친상간도 있지만 부녀간에는 상간보다는 성폭행이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상간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 아내나 남편 역할을 강요당하는 (물론 본인들은 의식하지 못한다)경우가 적지 않다. 그것이 도가 지나칠 때 자녀들은 문제의 성인으로 자랄 수 밖에 없다.

  ‘대체 배우자역할은 달콤하지만 그 결과는 절대 달지 않다. 그것은 자신이 다른 자녀에 비해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고. 해당 부모에게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니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상간은 그것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비극이다. 경계가 사라진 두 사람은 더 가까워지는 것을 원하게 된다. 설령 내키지 않는다고 해도 거부가 지금까지 누리던 자신의 모든 기쁨을 포기하는 것이 되기에 그리 쉽지 않다. (이것은 일반적인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거기까지 가지는 않는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는 자신의 삶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모든 것은 해당 부모의 뜻에 의해 결정되고 자신은 그저 꼭두각시일 뿐이다. 사랑받는 인형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어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실제 배우자는 자신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사랑해주는 달콤한 존재가 아니다. 반대로 자신의 의사를 접고 상대에게 무조건 의존해서도 안 되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 그녀는 그렇게 이미 길들어져 있다. 그들은 또 다른 불행한 가정을 만들거나 사회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할 가능성이 크고 그것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2) 학대 한 인간에 대한 인격적 살인

  지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이혼한 전 남편을 살해하고 그의 친자식이자 자신의 의붓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그녀의 수법이 워낙 잔인해서 그렇지 계모가 자식을 학대하고 살해하는 사건은 생각보다 드물지 않다. 몇 년 전에 그런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서 결국 법이 바뀌기까지 했다. 아동학대가 의심되는 경우 제3자가 신고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멀쩡히 보고 있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요즘엔 계부들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학대를 방치하는 친엄마의 태도도 한 몫하고 있다. 왜 방치할까? 계부가 즉 새 남편에게 받는 혜택이 너무 커서 (경제적인 문제가 중심)묵과한다고 한다. 심지어 딸을 성폭행해서 출산까지 하도록 방치하는 엄마도 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손주인가 자식인가? 남편의 아이니 자식일 것 같은데 딸의 아이니 손주일 것 같다. 이 경우 딸은 어쩌면 아버지의 공백을 채워줄 의붓아버지의 손길을 거부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역시 역기능 가족의 사례가 될 수 있다.

  십대 임신에 있어서 이러한 역기능 가족의 영향은 매우 크다. 가족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해 방황하던 소녀는 친절한 오빠(대개 오빠뻘이다)의 손길에 마약 같은(절대 건전하지 않다) 행복을 느낀다. 그가 그녀의 몸 깊숙이 파고들 때 그것을 뿌리칠 용기가 없다. 그것은 자신이 잠시 누리는 행복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마음의 허전함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욕망의 빗장을 풀어버리는 열쇠이기도 하다. 그것이 오빠가 아니라 아빠라고 해도 있을 수 있는 결과이다. 피가 통하든 아니든.

  다시 학대로 돌아가 보자. 나는 사형제 폐지론자이지만 한 가지 죄만큼은 사형에 처하고 싶다. 바로 아동학대이다. 특히 영유아에 대한 학대는 치를 떨게 한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아이에게 가해지는 학대가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하기도 싫다. 아이들은 왜 자신이 이런 고통을 느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지옥의 삶을 강요당한다. 누구에게도 호소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저 피해가 사라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인간들은 사형도 아깝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똑같은 고통을 맛보게 하고 싶다. 그래도 그들의 고통은 영유아의 그것이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세상에는 무자격부모가 너무나 많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자녀의 몫이다. 자녀들은 무슨 죄가 있어 그러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 없다. 부모를 잘못 만난 것 외에는. 하지만 자녀는 부모를 고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동학대는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가장 중대한 범죄라는 점에서 극형에 처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동학대가 생각보다 가볍게 여겨지는 것은 부모카르텔 때문이다. 대다수의 성인은 부모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서로의 잘못에 눈을 감는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아동학대를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우울증으로 아이들을 살해해도 오죽하면 그럴까? ’ ‘사회의 책임이지 엄마는 잘못이 없다’ ‘아내를 방치한 남편의 책임이다라는 식으로 온갖 변명을 다 늘어놨다. 전혀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겠지만 그러한 것이 죄를 합리화시킬 수 있다면 세상에 처벌할 죄는 하나도 없다. 더구나 상대는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들이다. 약자를 자처하는 여성도 그들에겐 절대적 강자이다. 가정폭력을 비판하지만 그녀들 자신도 가해자의 하나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3) ’가족은 부정과 비리를 타고

  박정희와 전두환 그들의 공통점은 군부를 이용해 집권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박정희는 516쿠데타 전두환은 1212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하고 그 후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다. 국가혁명위원회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개혁기구를 만들어 실질적인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의 힘을 강화하고 아울러 국민의 지지를 얻은 것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명백하게 다른 점이 있다. 박정희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개혁 의지를 불태우며 그것을 실현시킬 길을 모색한 것과 달리 전두환에게 그러한 의지가 있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516쿠데타의 사례를 벤치마킹하고 그에 따라 집권을 한 권력 지향의 정치군인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통치는 박정희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박정희가 지도자오야붕이라면 전두환은 큰 형님이었다. 쿠데타세력 가운데 박정희는 절대적이 존재였다. 모든 계획은 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나머지는 그의 수족에 불과했다. 그러기에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노릴 수 있었다. 모택동이 김일성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에게 친구나 동생은 없고 부하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전두환은 집단의 큰 형님으로서 아우들을 이끌었다. 그들은 상하관계라기보다는 협력관계였고 맏형인 전두환이 권력의 간판으로 그들을 지켜주는 것에 불과했다. 물론 집권이 전두환을 특별한 존재로 만든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박정희는 냉혹했고 전두환은 의리의 사나이가 되었다. 박정희는 친인척은 물론 혁명 동지라도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자는 용서하지 않았다. 김형욱을 내쳐 망명하게 하고 윤필용을 감옥에 처넣고 혁명의 주역인 김종필을 억누른 것은 그 증거이다. 유신체제가 세워지자 그는 황제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전두환은 측근을 감싸고 지켜주었다. 그의 치하에 제거된 측근은 거의 없다. 모두가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종구같이 창군 이래 최고의 스팩을 만든 정치군인도 있었다. 물론 본인도 한 재산 챙기면서.

  자신의 패거리를 챙기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정신적으로 격려를 하거나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도와주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국가나 공적인 또는 부정한 방법에 의한 것이라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명백한 범죄이다. 그 피해는 패거리 밖의 사람들이 고스란히 입어야 한다.

  전두환의 행위는 깡패의 의리였다. 깡패의 손에 들어온 모든 이익은 누군가의 피와 눈물이 담겨져 있다. 그것을 의좋게 나눈다고 해서 본질적인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혼자 독식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래 봐야 오십보백보이다. 그것은 깡패들의 번영을 위한 투자이지 진정한 의리는 아닌 것이다.

  가족도 조폭처럼 범죄단체가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실제로 미국의 마피아에는 가족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마피아뿐이 아니라 각종 비리의 중심에 가족이 있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사학비리를 보면 가족이 동원되어 학교를 좌우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것은 가족만큼 믿을 수 있는 존재도 없고 함께 나눠도 결국은 하나라는 이점도 있기 때문이다.

  정치가들의 뜨거운(?)가족 사랑이 문제가 되고 있다.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지만 민주화가 진행되며 그것이 적나라하게 폭로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를 더욱 확대시키고 있다. 자녀의 진학 취업에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압력이나 청탁을 넣어 뜨거운 부정과 모정을 보여준 그들에게 칭찬을 해야 할지 욕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농담이다.

  하지만 자녀 사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재벌이다. 그들은 늘어나는 자녀와 손주들을 위해 기업을 늘려가는 재미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얘들아 이것이 너희가 가지게 될 기업들이란다그런 사람들에게 취업과 진학을 위해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취업을 시킬 게 아니라 아예 기업을 물려줘야 진짜 부모지..”라고 그들은 비아냥대고 있을까? 물론 그것을 위해 누군가는 희생되고 누군가는 피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다. 그도 저도 아니면 국가에 가야 할 돈이(세금) 축나기도 한다. 그 경우 피해자는 국민이다.

  부정이나 비리가 아니더라도 피해는 적지 않게 일어난다. ‘부모찬스를 사용해 합법적으로 꽃길을 걷는 자녀들로 인해 그것이 없는 자녀들은 실패의 쓴 맛을 보아야 한다. 돈 많은 부모덕에 지뢰를 피해 인생을 걸어가는 사람들 그 뒤에 무수한 지뢰를 밟아 만신 창애가 된 사람들 그 차이는 누구의 책임인가? 법은 그것을 심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본인들의 잘못도 아니다. 학대나 역기능가정의 피해처럼 재수 없게(?) 그런 부모를 만난 죄 밖에 없다.

4. 가족 사라져야 할 존재인가?

  가족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고 느끼고 있는 모든 것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리 먼 옛날로 가지 않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일단 가족의 범위가 3, 40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 핵가족이 진정한 핵가족이 된 것은 길어야 30년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전에도 형태로서의 핵가족은 일반적인 가족의 형태였지만 실제로는 대가족이었다. 가족이라면 집에 돌아올 때 허락을 받지는 않는다. 역으로 말해 그것이 가족의 범위라고 할 수 있다. 문이 열려있거나 열 수 있다면 열고 그대로 들어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가족이다. 현재 그런 범위는 핵가족에 한정되어 있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고모도 삼촌도 그것이 불가능해진 지 오래다. 이런 신성불가침한 영역이 되었을 때 비로서 핵가족은 실체를 가진 존재가 되었다.

  물론 핵가족 내에서의 모습도 불과 수 십 년 동안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집안의 중심이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바뀌었다. 가장은 이름 뿐이고 실질적인 가장은 아내이고 남편은 그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일 뿐이다. 자녀들은 어머니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에 있게 되었는데 오죽하면 엄마의 정보력, 할아버지의 경제력, 아빠의 무관심이 자녀교육 성공의 3요소가 되었을까? 엄마 아내라는 지휘관의 지휘 아래 가족들은 각자의 미션을 수행하는 것이 현대 우리나라 가족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아버지 밥상을 따로 차리던 옛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가족이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핵가족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 같다. 집단에서 개인으로 분열되어 온 인간이 이제는 핵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규모의 집단마저 벗어던지려고 하고 있다. 속박보다는 자유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기에 나타난 자연스러운 결과이지만 규모의 크기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가족이라는 집단의 테두리에서 살아온 인류가 과연 그런 매개체 없이 살아갈 수 있을지도 주목된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생산력의 발전이 있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생산력의 발전은 사회 제도 문화라는 상부구조를 변화시킨다. 대가족 소가족 아니면 종족 문중 이런 집단이란 생존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집단이다. 분모가 크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가 쉽다. 우리가 잘 아는 보험도 그런 원리로 만들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위험에 대비하여 보험료를 적립하여 두고 필요시에 사용하는 것이 보험이다. 가입자가 많을수록 보장도 커지고 안전하다. 국민건강보험은 전국민이 대상이라 분모가 워낙 커서 가장 보장과 안전성이 좋은 것이다. 가족도 분모가 클수록 보장과 안정성이 좋아지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생산력이 높아지면 경제가 발전하면 생존을 위한 단위는 작아질 수 있다. 규모가 크면 그만큼 자유가 제약되니 그러한 불편을 감수할 절박함이 사라진다면 분열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부족이 씨족이 씨족이 가문이 가문이 대가족 소가족으로 분열되고 핵가족에 이르렀다. 제 핵가족도 부담스럽고 귀찮으니 1인 세대로 가고자 하고 있다. 비혼이 늘고 가족이 해체되는 모습이 흔해진 지금 핵가족도 수명을 다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족이 오늘날 그나마 유지된 것은 생존문제가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고아원에서 보육원에서도 아이들은 잘 성장한다. 적어도 육체적으로는. 요즘 고아원의 식사는 웬만한 가정집보다 낫다고 한다. 집밥이 사라져가는 지금 가정집 식사가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나는 집단급식을 하는 곳에서 살 때마다 살이 쪘다. 그 정도로 가정식은 빈약해지고 있으니 고아원에게 추월을 당한다고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돈 받고 밥해주는 사람이 더 정성껏 해 주는 것은 식당에 가봐도 알 수 있다. 일 년에 두 번 정도 있는 현장학습(이른바 소풍)에 가져갈 도시락도 김밥00에서 사 주는 엄마들이 있을 정도니(전업주부라도 그렇다)알 만 하지 않는가?

  가족의 기능이 대부분 아웃소싱 되어도 한 가지 어려운 것이 있기에 가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일까? 바로 가족의 사랑이다. 가족이란 가족이란 이유로 웬만한 일은 용서되고 받아들여진다. 아무리 못난 사람도 가족에게는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어느 곳에 이런 말이 써 있었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엄마를 만들었다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가족을 만들었다라 고.

  하지만 가족이 선택이 되는 지금 더 이상 이런 로망도 기대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이혼은 급증하고 가족의 해체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급기야 새로운 가족을 만들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가족은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사랑이 넘친다 해도 속박은 속박이다. 그 최소한의 속박마저 버리고 보다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가족을 소멸시키는 선택을 오늘도 하고 있다.

  게다가 가족이 갖는 범죄성은 가족에 대한 회의를 더 하고 있다. 그것이 가족의 소멸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이다. 사람들은 윤리적이고 양심적인 이유로 가족을 해체시킬 생각이 없다. 엄마가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면 눈감아주고 싶을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지금의 비혼은 가족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문제라면 자신에게 이익이 될까이다. 하지만 가족이 갖는 범죄성이 사람들에게 가족에 대한 회의를 갖도록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가족이 없어지면 세상이 망할 것 같다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가족이 존재하고 서로 의존하고 사는 한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의미에서는 단순한 의존이다. 예전에 부모님이 함께 사는 것을 당연시하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는 것과 같이 그런 사회가 오면 또 그것에 적응해 온 것이 인간의 역사이다. 20년 전 만해도 우리가 휴대전화를 가지고 모르는 남하고 SNS를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일상화되었고 그것이 직접 만나는 교제를 대신해 가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예전에 사내체육대회가 있던 시절이 있다. 설마 지금도 그런 것을 하는 회사가 있을지 모르지만 과거에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그것도 모처럼의 일요일에 (5일제 아님)쉬지 않고 나와서 했지만 불만을 터트리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회사 동료가 가족 이상으로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금은 회사동료의 결혼에 축의금 내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우리보다 아직 애사심(?)이 남아 있나 보다. 내 딸이 일본사람과 결혼하는 바람에 일본회사의 (딸도 일본회사이다. 지금 일본에 거주중)동료들이 참가했는데 갖가지 이벤트를 해주며 축하해 주는 모습이 우리와 사뭇 다른 거 같았다.

  하지만 사내 체육대회가 없어도 외롭지 않으며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인 것이다. 얼마나 많은 제도가 사라졌는가? 사내 체육대회 뿐인가? 학교 운동회도 거의 의미를 잃어간다. 예전에는 동네잔치였던 학교 운동회. 아이들은 물론 가족 친지까지 동원되어 한바탕 흥을 돋우던 학교 운동회 하지만 지금은 학부모조차 제대로 참가하지 않게 되어 학생들만의 놀이로 바뀐 것 같다. (아이들 운동회와 소풍을 기대한 나는 적지 않은 실망을 하고 말았다. 아직도 나는 원시인가 보다)

  가족이 사라지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점도 고려해 보자. 자식이 없으면 부정도 부패도 지금보다는 훨씬 덜하지 않을까? 가족이 없으면 가족을 위해 필요 없는 희생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자신의 삶을 위한 소득만 있으면 되니 하고 싶은 일만 해도 될지 모른다. 가족이 없으니 눈치 보지 않고 살아도 된다. 가족이 없으면 좋은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가족이 없으니 죽을 때 아쉬워할 일도 또 가족이 죽어서 느끼는 아픔도 없어지니 그 또한 좋은 일 같다. 혼자 죽어간다면 민폐도 끼치지 않으니 다행이다. 어차피 사라질 것이라면 좋은 마음으로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5. 새로운 사회적 연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포스트 패밀리시대를 대비하여

  대학 시절 절친한 친구와 함께 공자와 묵자에 대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나는 공자의 사상이 가족 중심이라 마음에 들지 않고 묵자의 겸애설(박애주의)를 지지한다고 했다. 친구는 동양철학(엄밀히 말하면 한국철학)을 전공하였는데 자신은 공자의 가족중심주의가 현실적이라고 반박했다. 물론 그도 겸애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가족의 사랑이 우선이고 그것이 제대로 되야 보다 큰 사랑도 가능하다고 이야기했다. 나 역시 가족의 사랑이 필요하다고 하나 그것보다 박애주의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족의 사랑이란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 근거였다.

  지금이나 그때나 생각은 같다. 가족이라는 조직이 배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자신의 영역에 보다 많은 것을 쌓아 놓고자 하니 세상이 불평등해지고 살기 어려우니 이 틀을 깨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좋지만 가족만 사랑하니까 누군가는 비만이 되고 누군가는 뼈만 남아 살아가게 된다. 세상에는 모든 사람들이 먹어도 남을 식량이 있지만 한편에서는 식량이 버려지고 한쪽에서는 없어서 굶주리고 있다. 한 나라에서도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 원흉이 나는 가족이 아닐까 싶다. 혼자라면 그런 탐욕을 부릴 이유가 적어지거나 사라질 것이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나는 가족의 배타성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초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같다. 동생이 옆 집 아이에게 맞았어도 동생이 잘못했다면 어쩔 수 없다고 물러난 사람이다. 나중에 유관순열사가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읽고 안심했다. 부모님이 내게 혼을 낸 것이-왜 동생편 안 드냐? 가족이면 무조건 편들어야 한다-잘못된 것이고 나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남을 때리는 아이를 말렸는데 그 아이의 형들이 몰려와 나를 때린 것이 얼마나 분했는지 모른다. 내가 그 아이를 때린 것도 아니고 그냥 말린 것 뿐

인데 왜 그들은 몰려와 나를 때렸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하지만 지금은 가족의 배타성은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다. 법이 지금처럼 정비되어 있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자력구제가 중요한 생존수단이었고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경에는 예수가 나그네 고아 과부를 소중히 여기라고 한 것이다. 그들은 자기편이 없거나 적으니 불이익을 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로서는 내 가족이니 무조건 편들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자식까지 생겼으니 좀 더 편을 들어도 될 것이지만 물론 과거에 비하면 편들기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다. 물론 내 아이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만사를 제껴두고 나설 생각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냉정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가족은 사랑의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조직이다.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 가난한 이웃을 대접하라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것 같다. 가족이 독점하는 것을 나누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하는 것을 예수는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만일 가족이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모두를 위해 자신의 것을 지금보다는 더 내 놓을 여유가 생길 것 같다. 유학시절 나는 지금보다 더 이웃과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내겐 의지할 부모님도 친척도 없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가족이 없으면 우리 모두가 가족처럼 되어 함께 의지하고 도우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의 근거는 바로 이런 경험이다.

  하지만 가족이 없으면 어려움을 느껴야 할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남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 못난 사람들 가족이라면 그나마 사랑받겠지만 그조차 없다면 그들은 과연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걱정이다. 그런 사람들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을 우리는 만들어야 한다. 가족을 대신할 또 다른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대안 가족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결혼으로 맺어진 남녀와 미혼 자녀들로 구성된 핵가족이 아니고 그렇다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이들이 함께 하는 조손가정도 아닌 가족 결혼과 혈연이 가족의 유대관계를 이어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도와가며 살기 위해 이루어진 남들끼리의 가족 그것이 대안가족이다. 장점은 서로에게 필요 없는 간섭을 하지 않고 일반가족이 주는 부담도 지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가족이 늘어난다면 기존가족의 해체도 급속히 진행될 것이다. 일단 만들기가 쉽다. 결혼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많은 비용과 절차가 필요한가? 유럽과 달리 동거도 생활화되기 어려운 이 나라에서는 이러한 대안 가족이 보급되면 결혼이라는 허들을 넘기 어렵거나 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것은 가족이니 뭐니 하는 것에 의지하지 않고도 살 수 있도록 사회적 연대가 굳건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일단 누군가와 함께해야 한다면 아무리 느슨한 관계라도 속박은 피할 수 없다. 가족에 길들여진 의존증환자들에게는 어려운 과제일지 모르나 습관이 되면 그것이 얼마나 편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는 종교적 목적이 아니니 오해 말기 바란다- 바울이라는 사람이 결혼에 대하여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 적혀 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 혼자된 사람들은 결혼하지 말라. 바울 자신도 비혼주의자였는데 물론 그것은 오늘의 비혼주의자와는 목적이 다르다. 그가 비혼을 권유하는 이유는 하나님에게 집중하도록 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당시 바울은 최후의 심판이 곧 올 거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결혼을 하기 보다 혼자 살며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낫다고 이야기 한 것이다. 결혼하면 배우자에게 마음을 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기 어렵다는 것이 금혼의 이유이다.

  나는 이것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결혼하지 말라. 가족을 만들지 말라. 그러면 모두가 가족이 되고 형제가 될 것이다. 모두가 서로를 돕고 아낀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라 고. 배우자를 위해 마음을 쓰지 말고 이웃을 위해 마음을 쓴다면 우리는 거대한 사회적 연대하에서 안심하고 살 것이다. 어차피 가족이 사라진다면 이런 마음으로 미래를 맞이하는 것도 좋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