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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세계 문명화에 선두주자가 되어야 한다

닥터 양 2019. 11. 4. 20:08

대한민국은 세계 문명화에 선두주자가 되어야 한다.

1. 침략의 피로 물들어지지 않은 대한민국의 발전

  2019년 우리나라는 총 GDOP 순위에서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보다 위에 있는 11개국가들의 면면을 보면 미국, 중국, 일본, 독일, 인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브라질, 캐나다, 러시아 등이다. 인도와 브라질을 빼면 세계적인 강대국들이고 4개국(+일본, 중국)을 제외한 7개국이 백인국가이다. 인도와 브라질이 엄밀히 말하면 백인국가이거나 혼혈인 점을 감안하면 비백인 국가는 2개국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얼마나 높은 위상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가 국토면적이나 인구 면에서 가장 열악하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이들 나라 중 이런 점에서 뒤지는 나라는 거의 없다. 캐나다만이 인구에서 우리에게 뒤지고 있으나(3,600만정도)면적은 미국보다 더 크고 미국과 사실상 같은 경제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캐나다의 적은 인구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미국만큼의 국토에 인구는 미국의 4배 이상이고 인도나 브라질도 많은 인구와 국토면적을 자랑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른바 ‘3만 달러 5천만 인구클럽에 들어간 7번째 나라가 되었다. 우리나라 말고 다른 멤버를 살펴보면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있다. 캐나다를 제외한 G7의 멤버와 겹치는 걸 보면 명실상부한 선진국 클럽이라고 해도 좋을 듯 하다. 우리가 그런 가운데 들어 있다는 것은 한 때 세계 최빈국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경이롭기조차 하다.

  마지막으로 놀랄만한 이야기를 하겠다. 우리의 발전은 그 어떤 나라에 대한 침략이나 약탈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위의 멤버와 캐나다를 합한 G7국가 중에 그러한 전과(?)를 가지지 않은 나라는 오직 캐나다 뿐이다.

  하지만 캐나다가 완벽하게 무죄라고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캐나다 자신은 침략은커녕 식민지 출신국가라는 점에서 우리와 같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캐나다 그리고 미국이 식민지 출신국가라고 해서 그러한 과거의 죄악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미국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캐나다 역시 식민 자체가 침략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행한 원주민 학살은 오늘날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않지만 명백한 죄악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멤버는 아니지만 선진국으로서 번영을 누리는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그들의 손 역시 적건 크건 침략의 피로 물들어져 있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런 점에서 완벽하게 무죄라 하겠다. 옥에 티라 하면 베트남 파병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누가 봐도 침략은 아니다. 베트남을 정복하러 간 것도 지배 하러 간 것도 아니고 베트남 내전에 한 편을 도와주러 갔는데 침략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까? 러시아 혁명 당시 반혁명군인 백군을 도우러 들어간 국가들의 행위를 침략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통해 그 나라를 지배하거나 현실적 이익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침략이 발전에 불가피하다는 괴변에 대한 살아있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들은 무수히 많으나 그중에서 선진국 클럽에 진입한 나라는 오로지 대한민국밖에 없다. 역으로 말하면 식민지 출신 국가가 경제발전을 이루어 번영을 얻기가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렵다는 것이기도 하다. 한 번 굳어진 서열 관계 속에서 그것을 헤쳐나가기 어려운 것은 국내나 국외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나마 국내는 교육 등을 통한 서열의 변동이 (이마저 사회가 고착화되면 어려워진다) 있을 수 있지만.

  대한민국의 역사가 침략과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발전할 수 있었음을 세계는 주목해야 한다. 민족과 국가가 애매했던 고대를 제외하면 이토록 오랜 역사를 그것도 한 지역에서 만들어가면서도 민족적 정체성의 확고함까지 포함해서-침략과 무관했던 민족이 있는지 의문이다. 태평양에 있는 섬들에 있는 나라들조차 부족 간의 혈투가 벌어진다고 하는데 우리는 내전조차 생소하기 이를 데 없다. 그저 정쟁만이 존재하였지만 그로 인해 생긴 살육은 내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비슷한 역사를 가진 중국조차도 내전은 물론 정쟁의 피해자도 자릿수가 틀릴 정도임을 감안 하면 더욱 그렇다.

  물론 대한민국이라고 해서 강대국이 지배하는 세계 경제에서 마냥 선량한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불공정무역의 혜택을 이용하여 성장발전을 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즐겨 마시고 있는 커피는 그 대표적인 상품이다. 거의 거저나 다름없는 원가로 만들어져 엄청난 이익을 가져오는 커피라는 상품은 생산국들의 피와 눈물로 가득차 있고 그 피와 눈물을 우리는 매일 마시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대한민국은 왜 평화주의 국가가 되었는가?

  대한민국 내부를 들여다보면 대한민국이 평화주의국가가 된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나만 그런가?)대한민국은 부정부패가 상당히 심한 나라이다. 물론 제3세계처럼 부정부패가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나라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한 때 그런 수준을 자랑(?)한 적도 있지만 법과 질서가 세워지고 경제가 윤택해지면서 적어도 양적으로는 많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선진국 클럽의 국가들중에서 아직은 부끄러워해야 할 수준이 아닐까 싶다.

  국회의원들조차 몸싸움을 하며 정쟁을 거듭하는 모습은 평화와는 웬지 거리가 멀어 보인다. 더구나 모 당에서는 그런 것을 표창하며 적지 않은 금액의 상품권까지 주었으니 폭력의 정상화인 것 같아 매우 안습이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공천가산점운운하여 비난을 받았으니 가히 코미디수준이 아닐까? 이정도면 폭력의 미화라고 해야 하는가? 그것도 사회적 약자도 아닌 국회의원들께서 그러시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몸을 던져 국가와 민족의 발전에 공헌하였다고 하면 좋을까? 누가 옳은가 그른가를 차지하더라도 우리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이미지가 웬지 조작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건(?)이라 하겠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도 심지어 개인조차 자신의 의지만으로 그 성격이 규정지어지지는 않는다. 역사를 잘 살펴보면 민족과 국가에게도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이는 지정학적인 위치와 주변 국가의 특징 등에 크게 좌우된다. 중국이라는 대국이 중심이 된 동아시아와 작은 나라로 나뉘어 있던 유럽은 그 걸어온 길이 전혀 다르다. 전자는 안정을 후자는 경쟁으로 인한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월레스타인은 이를 세계제국과 세계경제의 차이라고 규정하였다. 분명한 것은 그것을 중국이나 동아시아 유럽국가들이 자신들의 의지로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것이 지정학적인 위치에 의해 정해지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평화주의 국가가 된 것 역시 우리의 자의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개인에게도 DNA가 있듯이 집단이나 국가에게도 그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야구팀 중에 두산베어스라는 팀이 있다. 이 팀은 같은 서울에 본거지를 두고 인기면에서 오히려 앞서고 있는 LG트윈스라는 팀보다 압도적인 성적을 보이고 있다. LG트윈스가 코리안시리즈 우승을 겨우 2번하고 그나마 2002년 이후 진출도 못하고 있는데 두산 베어스는 6번 우승을 거둔 데다가 최근 5년 연속 진출하는 등 10년간 6번 진출하는 화려한 성적을 과시하고 있다. 화수분 야구라는 말처럼 특별히 대형 FA영입에 힘을 기울이지도 않는 두산이 이토록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은 팀이 승리에 대한 DNA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른 말로 하면 전통이다. 타이거즈라는 팀은 해태 시절이나 지금이나 코리안 시리즈에 강해 11번 우승에 준우승이 한 번도 없다. 즉 타이거즈는 코리안 시리즈에 강한 DNA를 갖고 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불변하는 영원한 것은 아니다. 혁신에 의해 바뀌는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가 고도성장을 이룬 1960년대부터 명백하게 우리민족의 DNA는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이끈 것이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지도자의 중요성은 스포츠나 국가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삼성라이온즈는 2000년까지 수없이 코리안 시리즈에 올라갔으나 단 한번도 우승을 못한 기괴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라이벌 타이거즈의 김응용감독을 영입하고 나서 (2001) 2002년 드디어 첫 우승을 일구고 나서 무려 7번의 우승을 이루는 변신을 이룬다. 김응용감독은 2004년을 끝으로 물러났지만 그가 심어놓은 우승 DNA가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스토리는 산처럼 많아 일일이 소개할 수 없을 정도이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말은 국가보다 위대한 국민은 없다” “민족보다 위대한 개인은 없다고 해도 좋을 듯 하다. 임진왜란 때 납치된 도공들이 일본에서 세계최고수준의 도자기를 만들어 도자기의 본고장이라 할 (도자기의 영어표현이 차이나 이다)중국과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정도가 되었지만 정작 그들의 고향인 조선은 그런 수준을 보이지 못 했다. 빌게이츠 스티브잡스 같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면 과연 애플이나 마이크로 소프트 같은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같은 나라에서도 그런 논리는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이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났어도 삼성그룹같은 대재벌회사의 총수가 될 수 있었을까와 같은 식으로 말이다. 수성을 잘 한다고 창업도 잘 하는 것은 아니란 점은 누구나 알 것이다. 물론 역으로 창업을 잘 한다고 수성에 능하다는 법도 없다. 모택동 이승만은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각각의 나라를 세워 반석위에 올려 놓는데 성공했지만 그 후 결코 성공적인 수성을 하지는 못했다. 차라리 적당한 때 물러났으면 명예로운 건국의 아버지로 남았을 것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뒤늦게 재평가 되는 것은 다행이지만 박수 칠 때 물러나라라는 말의 소중함과 그것의 어려움이 새삼 느껴진다. 과감한 용퇴로 아름다운 이름을 길이 남긴 인물도 있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적다.

  우리 민족이 평화주의 국가를 만든 것은 지정학적 요소가 90%이상 작용한 결과이다. 중국이라는 절대 강국의 보호- 오늘로 치면 미국의 핵우산-아래 스스로를 편입시켜 국가안보를 맡긴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백제 멸망은 중국에게는 적대적 세력의 제거이고 한민족에게는 침략과 전쟁의 DNA말살이었다. 기마민족의 후예라 할 고구려 백제의 소멸은 한반도에서 가장 약한 가장 비호전적인 신라의 DNA가 한민족의 DNA를 지배하게 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후 고려가 건국하여 북방민족의 DNA가 부활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주류세력은 아니었기에 사대주의를 바탕으로 한 평화주의-나쁘게 말하면 굴종주의-가 조선의 멸망까지 이어져 간다. 오랜 평화는 그러한 DNA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고 식민지화를 부르는 결과를 가져왔다 할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가 고구려의 멸망이 이어진 발해의 멸망과 함께 한반도라는 소외된 지역으로 영토가 한정되게 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는 중원으로 가는 길과 방향이 다르다. 북방민족들이 민족적 통일을 이루면 한결같이 중원으로 치달았는데 한반도는 방향이 다르니 관심을 그다지 두지 않았다. 고구려와 발해가 망한 것은 그들이 중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중원국가에게는 눈에 가시이고 중원을 노리는 북방민족에게는 반드시 밟고 가야 할 국가들이었던 것이다.

  지도를 보면 한반도는 동아시아에서 절묘한 위치에 놓여 있다. 일본처럼 바다건너 나라이기에 소외된 것도 아니고 중원으로 가는 통로도 아니기에 직접적인 대륙의 태풍에 휘말리는 위치도 아니다. 다만 중원을 치러 가는 민족에게 중원국가와 유달리 친한 한반도국가를 한 번 손 봐줄 필요를 느끼게 하는 위치이기는 하다. 그것이 우리에게 외침을 불렀지만 애당초 목표가 아니니 굳이 멸망시킬 필요가 없어 무력적 약화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상 한반도 국가인 우리나라를 고려이든 조선이든-목표로 한 침략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 임진왜란조차 주 타깃은 중원국가인 명나라이고 우리는 다만 지원부대로서의 역할이 기대되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우리의 역사가 수난의 역사라는 견해는 반만 진실이라 할 것이다. 생각보다 우리는 많은 외침을 받지 않았다. 중동에 위치한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된다. 이스라엘은 개방된 중동지역에 존재하여 수도 없이 침략을 받았고 그것이 유대인의 강력한 민족적 정체성을 낳아 오늘까지 생명력을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굵직한 침략이 몇 번 있었을 뿐인데 그것이 도리어 기억에 강하게 남아서 수난의 역사라고 여겨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침략다운 침략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뿐이며 그 기간을 합하여도 채 10년이 되지 않는다. 임진왜란이 7년이라 하지만 실제로 전쟁을 한 것은 반도 되지 않으니 사실은 5년 정도로 봐야 할 것이다.

반도국가이기에 침략을 많이 당했다는 것도 황당한 이야기. 이미 언급한 대로 우리는 본격적인 침략의 대상이 된 일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침략을 당한 것은 중원국가(중국이 아니다)와의 유대관계를 통한 안전보장을 꾀하였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반도국가는 대륙에서 해양으로 뻗어 나갈 때 해양국가가 대륙으로 진출 할 때 교두보가 되기 때문에 침략을 자주 당한다고 한다. (힘이 없을 때 그렇고 힘이 있으면 양방향으로 팽창)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적어도 역사적인 사실은 아니다. 동아시아에서는. 모든 관심이 중원을 향한 동아시아에 우리를 교두보로 해양으로 진출을 시도한 것은 고대 정도일 뿐 그 후로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반면 일본이 우리를 교두보로 침략을 한 경우는 역시 고대 이외에는 임진왜란과 근대 뿐 이다. 유럽에서 로마가 스페인이 그러한 예로 들어지긴 하나 그것은 유럽이라는 지역적 특징일 뿐 보편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원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며 해양진출이 무의하게 여겨졌던 동아시아에서는 그러한 법칙은 적용되지 않는다.

  도리어 반도국가이기에-그것도 중원과 반대 방향이고 숨겨진 것 같은 위치이기에 오히려 큰 전화를 면해 민족을 보전했다고 보는 쪽이 맞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말갈족, 거란족, 여진족 등 수많은 북방민족이 사라졌다. 그들은 오늘날 국가를 가지지 못한 채 거대한 중국의 일원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불행인지 행복인지는 모른다. 꼭 독립국가를 이루고 있어야 좋은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한민족이 중국의 일부가 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개개인의 불행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오늘이 큰 길에서 비켜난 곳에 위치한 반도라는 적절한 은신처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지리적 이점과 중원국가의 관리로 오랜 세월 평화를 누린 우리민족은 중원국가의 문명을 수용하여 이를 실현하면서 최고의 문명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중원국가조차 이루지 못한 결과이다. 그들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끊임없는 북방으로부터의 침입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내란의 퍼레이드 속에서 그들은 야만을 간직할 수 밖에 없었다. 문명과 야만의 혼재 그것이 중국의 참모습이었다면 우리는 평화 속에서 그들에게서 전수받은 문명을 꽃피우게 된다. 말하자면 평화의 DNA를 깊게 간직하게 된 것이다. 개인이 아니라 민족으로서.

  이것이 평화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탄생배경이다. 그것은 결코 개개인이 선량한 민족이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이 전쟁국가가 된 것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에 가 보면 그들이 무척 선량해 보여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그 끔찍한 전쟁을 식민지지배를 했을까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사무라이의 DNA가 남아 있고 그것은 언제든지 침략의 길을 가게 할 수 있다. 오랜 세월의 내란으로 문명이 파괴되고 야만이 정착했던 나라이기 때문이다. 결코 개개인이 폭력적이거나 야만적인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DNA가 그렇게 형성되었다고 해야 하다. 우리는 그 반대일 것이고.

3대한민국은 세계 문명화에 선두주자가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현존하는 최고의 문명국이라고 한다면 모두가 의아해할 것이다. 종족주의적 자뻑이라는 비난도 누군가로부터 쏟아질 것 같다. 중국은 너희 문명의 많은 부분이 우리한테서 나왔는데 무슨 소리야?” 라고 할 것이고 서양국가들은 그래 봐야 우리의 짝퉁 아닌가?”라고 볼멘소리를 낼지 모른다. 일본사람들은 아직도 일본문화가 곳곳에 남아있는데 화제영어로 가득찬 야구만 봐도-” 이래저래 비판받을 소리같다.

  문제는 문명의 정의이다. 예전에 문명과 문화의 차이를 묻는 질문을 자주 받았는데 정해진 답은 이것이다. “문명은 물질적인 것이고 문화는 정신적인 것이다하지만 이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렇다면 물질문명’ ‘정신문명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는데 이 두 단어는 시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문명에 치우쳤다’ ‘정신문명의 타락등등에서처럼. 반대로 문화가 꼭 정신만을 의미하지 않는 것은 정신문화연구원이라는 기관의 이름에서 알 수 있다. 문화가 정신만을 의미하는 것이면 이 기관의 이름은 명백한 오류이다. ‘정신철학이란 말은 없는 것처럼. 철학이라면 당연히 정신이 아니겠는가? ‘물질철학이라는 말이 존재하는가 의문이다. ‘물질에 대한 철학은 있을 수 있다. 물질을 바라는 시각으로서의 철학이니 그것은 곧 정신이다.

  ‘문명과 야만이라는 단어의 조합은 있을 수 있다. ‘문명인과 야만인. 물론 그 보다는 문화인과 야만인이라고 하는 것 좀 더 자연스럽지만. 문명을 생각하기 보다 먼저 야만을 생각해 보자. 야만이란 무엇일까? 문명화되지 못한 것을 말한다. 문명화란 무엇일까? 그것은 법과 질서가 잡히고 문화가 꽃피운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물질문명의 뒷받침도 필요할 것이다. 폭력이 군대라는 법적 제재를 받는 기구에 집중하고 치안을 바로 잡는 기구가 존재하고 아울러 이를 뒷받침할 통치기구가 필요하니 물질적 기반이 필요하다.

  따라서 문명이란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 하나가 되어 만들어진 법과 질서에 의해 평안과 번영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고 하겠다. 야만이란 이러한 요소가 없거나 불안정하여 불안과 파괴가 존재하는 상태라 해야 할 것이다. 말이 거칠고 행동이 난폭한 사람들을 가리켜 야만인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닐까 싶다. 부자라서 문명인이라고 불리지 않고 가난하다고 야만인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부자들은 여유가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해 종종 그렇게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곧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구노력이 요구될수록 야만이고 사회가 질서를 잡을수록 문명에 가까울 것이다. 즉 사회시스템이 개인을 지켜주어 폭력과 무질서가 적을수록 문명이라 하겠다.

  이런 정의로 말하면 대한민국은 가히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라 하겠다. 첫째 치안이 세계최고의 수준이기에 사람들은 불안에 떨지 않고 살 수 있다. 그것은 법과 질서가 제대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국민들의 준법정신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도 중요하다. 신고정신 또한 투철하여 지명수배자의 검거율이 높다고 한다.

둘째로 치안이 비교적 좋은 일본조차 총기 도검 같은 흉악한 무기가 범죄에 자주 사용 되는데 비해 우리는 그러한 무기 특히 총기에 관한 통제는 상당히 잘 되어 있어 총기범죄는 자취를 감추다시피 하고 있다. 50년대 60년대 영화만 봐도 총기를 사용하는 영화가 제법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거의 사라졌다. 있다면 국제적인 무대의 영화, 합법적으로 총기를 다룰 수 있는 경찰이나 군인이 등장하는 영화 정도이다. 실제 범행에 사용되는 흉기나 둔기는 식칼이나 야구방망이처럼 일상적인 도구이다.

  셋째 치안이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윤리 의식이 비교적 높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유교윤리에 의해 교화된 민족이니만치 죄에 대한 반감이 높고 부정부패를 미워하는 마음이 비교적 잘 확립되어 있다. 법보다 윤리에 의해 범죄가 억제되는 경향이 상당히 강하기에 치안의 수준이 높아진 것이다. 다만 이런 점은 점점 약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질문명이 점차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정신문명이 쇠퇴하고 그에 따라 반인륜적인 범죄가 늘어나고 있어 과거에 비해 치안이 불안해지는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생계형 범죄가 줄어드는 것은 물질문명의 발달의 덕분이라 하겠다.

  눈을 들어 세계를 들여다보면 이렇게 치안이 잘 유지되는 나라는 생각보다 적다. 미국같이 총기가 난사되어도 규제를 하지 않고 그것을 자유의 하나라고 여기는 나라도 있다. 일본의 폭력단은 지금도 총기를 들고 다니는 것 같고 때때로 우익테러에 총기가 사용되고 있으니 치안에서 우리보다 몇 수는 아래라고 해야 할 것이다. 3세계의 경우는 경찰이 믿음직한 기관이 아닌 경우가 종종 있다. 콜롬비아나 브라질은 마약밀매단이 경찰을 매수하여 무력화시킨다는 이야기도 있다.

  미국은 법이 강조되고 형벌이 매우 무거운데 이는 윤리적 전통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전통사회는 법보다 관습 도덕 윤리 등이 안전을 지키는 요소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미국은 그러한 전통사회를 굳건히 구축할 시간이 없이 급속하게 발전하는 바람에 모든 것을 법과 형벌로 통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사회의 성숙도가 매우 떨어진다 하겠다. 이는 자연적인 상태- 약육강식-에 가까운 것이고 따라서 야만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카우보이가 총으로 질서를 지키던 시대에서 그리 먼 시간이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본이 150년 전만 해도 사무라이들이 칼로 질서를 잡던 것처럼.

  무엇보다도 한국이 최고의 문명국인 증거는 침략과 지배에 대한 사고가 문명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침략과 지배의 DNA가 거의 없다. 일부 호전적인 사람들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매우 드물다. 설령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도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우리 국민들은 오히려 외국의 침략과 지배를 걱정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웃 일본의 경우 호전적인 기질이 상당히 남아있다. 개인이 아니라 국가적으로. 우리나라에는 침략이나 전쟁을 입에 담는 우익은 존재하지 않지만 일본에는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가 세계를 지배하거나 그럴 자격이 있다는 주장을 하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으나 일본에는 엄연히 존재한다. 미국에도 그런 세력은 존재한다. 과도한 우월감과 침략주의가 결합한 호전성은 세계평화를 위협할 위험요소이지만 의외로 그런 호전성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우리는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다. 정신문명을 뒷받침할 물질문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된다. 아무리 도덕적 윤리적으로 살려고 해도 물질이 빈곤하면 쉽지 않다. “삼일 굶으면 남의 집 담을 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했고 의식이 족해야 예의를 안다는 말도 있듯이 물질도 문명의 중요한 기반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의 문명은 피의 희생을 가장 덜 치루고 이룬 것이라 더욱 값지다. ‘3만달러 5천만인구클럽 회원중에 침략주의를 실행에 옮기지 않은 나라는 오직 대한민국 뿐이다. 우리 보다 GDP가 높은 나라 중 인도와 브라질만이 그러한 원죄에서 자유롭지만 이 나라들은 인구와 면적이 월등히 우월한 나라이기에 우리보다 질적으로 우위에 섰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전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선진국이라 할 수 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 했다. 우리의 야만은 긴 시간 익힌 습관에 의해 문명화하였다. 오랜 세월 문명의 중심인 중원제국의 보호아래 그 문명을 직수입하여 그것을 익힌 우리는 문명국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왔다. 조선시대 권력에 대한 견제가 미약했던 것에 비해 부정부패나 반문명적인 살상이 상대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의 민주화가 엄청난 인명의 희생을 강요했고 메이지유신 역시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많은 희생을 동반했지만- 무진전쟁, 서남전쟁 등-우리는 그러한 비극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다.

  한국은 936년 고려의 통일 이후 천 년 이상 내란에 의한 정권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정도로 안정된 역사를 이루었다. 정변이나 반정 같은 사건은 내란에 비해 많은 피를 동반하지 않는 비교적 평화로운 정권 교체였다. 무신란에 의해 결과적으로 의종이 폐위되고 명종이 즉위하나 무신란 자체가 정권교체를 목적으로 한 반란으로 보기 어렵고 그 규모도 기껏해야 정변수준이었으니 반란이라 보기 어려울 것이다.

  내우외환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이 우리나라에 긍정적인 영향만을 미친 것은 아니다. 권력에 대한 견제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국방이나 경제발전에 대한 동기가 미약해져 국가의 물리적인 힘이 쇠퇴한 것이 결국 식민지화나 외침을 불렀던 것은 확실히 부정적인 영향이었다. 무능과 부패로 점철된 역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이 야만이라 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로마제국 멸망 이후 무질서로 회귀하여 천년에 걸친 전쟁과 침략으로 역사를 채우고 결국 유대인 600만의 학살과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그 막을 내린 유럽과 서양의 야만과 비교하면 얼마나 문명적인가? 지금도 그들의 사고는 야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힘의 논리 안에 갇혀 있다.

  그러기에 한국은 세계 최고의 문명국에 오른 것이다. 동아시아가 세계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지역이었으나 중국이 근대사에서 얻은 트라우마로 인해 야만으로 퇴행하려고 하고 있으며 일본은 퇴행과 진보를 거쳐 다시 퇴행의 길로 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이야말로 최고의 문명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 아닌가? 동아시아>유럽>미국 이고 한국>중국>일본 이런 도식이 성립될 것 같다.

  아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라빈드라나드 타고르는 동방의 등불이란 시에서 한국을 이렇게 찬양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오늘날 이 시를 어떻게 봐야 할까? 우리의 역사관은 근현대에 치우쳐 있기에 이 시가 단순히 아부성 립서비스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몽골의 불세출의 영웅 징기스칸의 손자 바투가 유럽원정을 하다 칸의 죽음으로 되돌아 온 이야기는 유명하다. 만일 칸의 죽음이 없었다면 유럽은 바투의 발아래 짓밟히고 세계사는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다. 유럽은 그 당시 이를 신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바투는 다시 유럽을 원정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먹을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보다는 중동지역이 훨씬 탐나는 지역이라 하여 말머리를 중동지역으로 돌렸다. 13세기 유럽은 그렇게 빈약한 지역이었다. 군사력 경제력 문화 모든 점에서 후진지역이었으니 가성비가 낮아 정벌의 대상조차 되기 어려웠을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당시의 한반도를 지배하던 고려왕조는 훨씬 찬란한 문명을 구축하고 있었다. 고려청자, 금속활자 등을 비롯한 문화와 몽골과의 오랜 전쟁을 견딜 군사력(비록 패전이 훨씬 많았지만)팔만 대장경을 새길 정도의 신앙심과 유학을 주야로 배우는 것에 의한 높은 윤리의식 등 고도의 문명국가 고려의 모습이 존재했다. 타고르가 회상하는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란 그러한 시절의 모습이 아닐까?

그가 동방의 등불을 지은 1929년의 한민족은 일제강점아래에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타고르는 과거의 영광을 기대했고 그 기대는 오늘날 이루어졌다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라는 기대이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을 나는 바로 세계최고의 문명국가로서의 우리민족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동방의 밝은 빛이란 단어는 결코 물질적인 풍요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타고르는 결코 우리를 물질적인 이유로 찬양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러한 것을 미래에 기대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그렇다면 바로 문명국가로서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세계의 문명권 중 가장 강력해진 유럽문명은 역사를 퇴행시켜 야만의 상태를 가져왔다. 세계대전, 식민지지배와 제국주의 이러한 것은 지역으로서의 유럽의 야만을 그대로 드러냈다. 로마제국의 멸망 후 1400년간 야만으로 퇴행한 유럽이 세계를 향해 쏟아부은 야만의 공격이 낳의 결과는 참으로 끔찍했다. 평안했던 세계를 비극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유럽의 야만은 이제 조금씩 문명화의 길을 걷고 있다. 유럽의 야만에 편승했던 미국과 일본이라는 아류들도 한동안 문명화의 길을 걸어야 했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세계 문명화의 선두주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침략과 지배 없이 이룬 경제번영은 세계에 자랑할 문명의 상징이라 하겠다. 남의 것을 빼앗지 않아도 살육과 지배를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번영할 수 있음을 세계 최고의 문명국 대한민국은 보여주었고 지금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동방의 밝은 빛에 머물지 않고 세계의 밝은 빛이 될 지도 모른다. 매우 막중하고도 영광스러운 역할이 아닌가? 자부심을 가져보자.

야만의 세계에서 문명의 세계로는 힘이 아닌 윤리와 도덕 그리고 평화와 안전이 가득찬 세계로의 이행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세계에서 가장 잘 실현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과거의 역사가 무능과 부패만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피해자가 가해자 취급을 받아서는 되겠는가? 남을 해치는 것이 죄이지 당한 것이 죄는 아닐텐데 우리는 그리고 세계는 당한 자를 탓하고 무능하니까 그렇지 너도 힘을 길러봐하며 야만을 권하여 왔다. 뭔가 거꾸로 된 느낌이다. 남을 짓밟고 부유함을 얻는 게 언제부터 찬양의 대상이고 피해를 당하는 것이 잘못처럼 되어 버린 것 같다. 마치 범죄피해자가 가해자처럼 공격을 당하는 것이 상식이 되어 버린 현실에 우리는 모순을 느껴야 할 것이다.

  ” ,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는구나. 지난 수천 년 갈고 닦으며 길러온 인도적 정신이 이제 새로운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는구나. 새봄이 온 세상에 다가와 모든 생명을 다시 살려 내는구나. 꽁꽁 언 얼음과 차디찬 눈보라에 숨 막혔던 한 시대가 가고, 부드러운 바람과 따뜻한 볕에 기운이 돋는 새 시대가 오는구나. “

[네이버 지식백과] 3·1 독립선언서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우리는 좀 더 당당해 질 필요가 있다. 야만의 시대를 끝내고 문명의 시대를 끝낼 문명국가 대한민국은 이미 31운동이라는 저항에서도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 세상이 야만에서 문명으로 흘러가야 할 당위성 필연성을 역설한 이 선언문은 우리가 살아온 문명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링컨의 게티스버그연설이나 마틴루터 킹의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를 능가할 아름다운 미래에의 꿈을 선포한 독립선언서는 세계사에 길이 남을 유산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남은 것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독립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세계사를 바꿀 문명국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를 향해 문명을 선포하는 문명선언서를 새롭게 작성해야 할 것이다. 공허하다고?‘ 모든 원대한 꿈은 첫 시작은 공허하게 보였으나 끝은 결코 공허하지 않았다. 2천년 전 예수의 이웃사랑도 공허하게 들렸고 230년 전 프랑스 혁명의 자유평등박애도 공허했고 100년 전의 31독립선언서도 공허하게 느껴졌으며 50년 전 청년 전태일의 외침도 공허했으나 그것은 모두 현실이 되었음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