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모선생의 일본이야기(17)한국인, 일본인 그리고 유대인
양의모선생의 일본이야기(17)한국인, 일본인 그리고 유대인
(1)민족주의 =민족적 자뻑증
“우리 한민족은 저력이 있어. 그렇게 단기간에 최빈국에서 세계10대 경제대국이 되었으니”
“그러게 말야 대단해...”
한 번쯤 들어봤을 이야기이다. 적어도 한국인이라면. 이런 이야기는 우리의 기분을 상승시킨다. 언 듯 들으면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고 사실 결과만 놓고 보면 틀렸다고도 말하기 어렵다. 우리가 그렇게 짧은 시간에 경제강국의 반열에 오른 것은 사실이 아닌가? 그것은 일본의 고도성장의 신화를 무색하게 했고 일본이 비백인국가로서 선진국이 되어 비백인국가들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한국은 식민지경험국가라는 점에서 약소국들에게 큰 희망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사실이다. 따라서 자부심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동방의 약소국이었고 식민지가 되어 남의 나라의 지배를 그것도 이웃나라 일본에게 당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외침이 있을 때 우리만의 힘으로 이를 제대로 물리치지 못한 경험이 많다. 병자호란 때는 침략자에게 왕이 무릎을 꿇어야 했고 몽골에게는 항복하여 사실상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임진왜란 때는 비록 일본군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명나라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 솔직한 답일 것이다. 민족의 저력을 말하며 만족하기에는 부끄러운 역사가 많은 것 역시 사실이다.
게다가 “우리 민족에게는 저력이 있다”는 말은 다른 민족에게는 저력이 없다는 비하적 의미가 포함된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난 이런 것이 잘났어” 라는 말이 자칫 오만이 될 수 있듯이 이 또한 오만적인 표현이 될 수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두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만회하기 위해 그러한 수난의 역사를 이기고 이렇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어떨까? “우리가 이렇게 단기간에 경제발전을 이루어 경제강국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야.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해” 라고. 이것은 우리의 성과를 칭찬하면서도 조금의 오만도 없는 표현일 것이다. “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이겨내고 오늘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가요” 라고 하는 것은 “난 원래 대단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런 일을 이룬거야”라고 말하기 보다는 훨씬 듣는 사람의 공감을 끌어내기가 쉬운 것처럼. 후자의 경우 ‘그래 너 잘났고 난 못 났다’라는 비아냥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보면 늘 위대한 삶을 산 민족도 늘 초라한 삶을 산 민족도 없는 것 같다. 우리민족도 과거 고구려가 만주를 지배하고 중국과 맞서 100만대군을 물리치는 등의 영광의 역사는 있었다. 그러다가 오랜 침체기-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침체기의 정의가 다르니까-를 거쳐 오늘의 부활을 이루었다. 이탈리아는 로마의 후예지만 오늘의 이탈리아는 로마제국의 영광에는 턱없이 모자란 나라이다. 중국의 경우 오랫동안 세계적인 강국으로 군림했지만 최근 150년간의 역사에서는 영광보다는 굴욕이 많았다. 오늘날 세계최강국을 자부하는 미국도 100여년 전에는 신대륙에 위치한 은둔의 나라-먼로주의를 생각하라-에 불과했다. 고대 찬란한 문명을 이룬 이집트, 한때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이룬 터키는 지금은 평범하거나 가난한 나라로 만족해야 한다.
따라서 민족이란 원래 대단한 존재도 별 볼일 존재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굳이 말하면 시대적 상황과 그 민족의 특징이 어우러져 그때 그때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개인과도 그리 다르지 않다. 다만 개인은 개인의 특징이 평생 유지되지만 민족은 특징 자체가 바뀌기 때문에 보다 복잡한 변화를 겪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마다 자뻑증은 반드시 보이게 마련이다. 그것을 우리는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러왔다. 우리민족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우리민족은 문명의 중심인 중화가 사라지고 자신들이 소중화로서 문명이 중심이 되었다는 조금은 황당한 자부심을 느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정체성을 초래하여 식민지에 이르는 비극을 초래하였다는 분석도 있다. 유대인의 민족적 자뻑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들의 자뻑은 구약성경이라는 세계적인 명저를 낳았고 오늘날에도 그들은 그것은 진심으로 믿고 있으며 후손들에게도 이를 전수하고 있다.
민족적자뻑을 그저 그들만의 착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영향이 너무나 크다. 그것은 때론 엄청난 참화를 일으켰다. 유대인 자신들이 그러한 대상이 되었던 것이 홀로코스트이다. 독일민족의 자뻑이 600만의 유대인을 살해하는 비극을 낳았던 것이다. 물론 민족적 자뻑이 그 민족에게 큰 힘이 되어 발전을 가져온 경우도 있다. 우리가 대표적인 경우가 아닐까 싶다. 민족적 자뻑= 민족주의는 때론 독이 되고 때론 힘이 되는 양면성을 가진 생물(?)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이해를 통해 건전한 방향으로 이끌어간다면 인류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2)한국형 민족주의 =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민족주의
한국은 세계적으로 볼 때 역사가 오래된 민족이다.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함은 민족이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하기 보다는 민족단위의 역사를 오랫동안 형성해 온 민족이라는 뜻이다. 독일의 경우 독일이라는 현재의 민족국가가 역사를 만들어온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그들 민족이 생성된 것은 아마 훨씬 먼 옛날이었을 것이다. 한민족의 역사가 길다는 것의 의미는 전자와의 대비를 통해 얻어지는 생각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민족의 민족주의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것 역시 사실이다. 유라시아의 동쪽 끝에서 수천 년간 정착하여 살아가며 역사를 만들어 갔다는 것, 게다가 민족적인 통일을 이미 천년 이상 유지해왔다는 사실 역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 오랜 세월 동안 자신들의 생활권을 벗어난 적이 없었기에 우리만의 민족주의를 만들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역사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존재는 뭐니 뭐니 해도 중국이다. 중국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그래서 중국 아닌가?-속에 주변민족들에게 ‘천자(하늘의 아들)’가 다스리는 나라로서 군림하여 왔다. 여기서 ‘천자’도 중국도 하나의 민족의 독점적인 타이틀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한족이 차지하긴 했지만 몽골족도 만주족도 그것을 누렸다. 우리민족도 일시적이지만 천자의 타이틀을 훔쳐(?)사용한 적도 있었다. 중국적 세계질서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온 체제로서 수 천 년간 유지되어 왔던 것이고 한국 역시 그 그늘 아래서 민족적인 특징을 만들어 온 것이다.
중화적 세계에서 한민족은 보편적 가치인 중화적 가치에 종속되는 형태로 살아왔다. 그것은 마치 유럽의 중세가 기독교와 교황을 중심으로 발전된 것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중화는 정치와 문화를 만들어내고 이를 주변국가는 받아들이는 형태로 질서가 유지되어 온 것이다. 가끔 이를 깨는 세력이 등장하여 중화의 주인이 바뀌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중화 질서 자체가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한국의 민족주의는 중화적 질서를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에 의해 형성되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도 오랫동안 우리는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올리며 자신들이 중화의 정통적인 계승자임을 자부하였다. 이런 모습에서 중화는 중국인들의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의 보편적 가치를 의미하는 것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스페인이 기독교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전개한 레콩키스타를 통해 민족적 자부심을 형성한 것과 같이 우리는 중화라는 가치를 수호하는 것으로 민족적 자부심을 느낀 것이었다.
그런데 유럽이 중세 말에 이르러 그러한 보편적 체계를 서서히 무너뜨린 데 비해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그것은 로마제국은 부활되지 않았지만 중화적 가치의 본거지 중화제국은 계속 부활하여 존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로마교황의 종교적 권위는 현실적인 힘이 아니기에 무너질 수 있지만 중화제국의 힘은 그렇지 않다. 중화적 가치를 지키는 중화제국이 존재하는 한 중화적 가치 역시 유지되며 한국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소극적 민족주의이다. 중화제국이 주변국을 돌봐야 할 오랑캐들이라고 믿었듯이 우리도 여진족이나 일본 등에 대하여 그러한 우월감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적극 실현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위치는 중화제국과 가치를 섬기는 것이었다. 중화제국도 우리가 다른 민족에게 지도적인 지위를 가지는 것을 환영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신들의 지배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팍스 차이나’의 세계에서 형성된 우리의 민족주의는 소극적 민족주의라 하겠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그것은 중화적 세계가 서양의 침략에 의해 붕괴되어 간 것이다. 중화적 세계를 지켜야 할 청나라 –당시의 중화제국-가 열강에 의해 침략당하며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도전자인 일본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중화적 세계질서에 의지하여 평화와 안정을 유지해온 우리 민족에게 이러한 새로운 상황은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결국 그로 인해 우리가 맞이한 것은 식민지지배였다.
그것은 역시 우리 민족에게는 생소한 경험이었다. 몽골에게 지배된 경험은 있으나 그것은 지배세력내에서의 지배였다. 외형적으로 우리는 우리 민족의 지배자에게 지배되었고 다만 그를 통해 몽골의 착취를 당한 것 뿐이었다. 청나라에게 항복하여 많은 백성이 끌려가는 등 수난을 당했지만 그 역시 일시적인 사건이었을 뿐 조선이 청나라의 통치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소중화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은 완전히 무너졌고 커다란 트라우마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고난의 역사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해방이 되자 국토는 외부의 세력에 의해 분단되었고 한국전쟁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하게 된다. 천 년 이상 이어진 평화와 안정의 역사는 사라지고 불안과 공포로 점철된 역사가 그것도 한 세기도 안 되는 시간에 펼쳐졌다.
그것은 우리를 약소국형 민족주의를 갖도록 하였다. 폐쇄적인 민족주의 바로 그것이다. 유렵으로 치면 폴란드 핀란드 동유럽의 민족주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외부와의 관계를 꺼리고 자신들끼리의 세계에 빠진 오타쿠나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적인 사고를 갖게 된 것이다. 남북이 분단되어 외부세계와 차단된 우리는 그러한 특징이 유럽의 약소국보다 훨씬 강할 수 밖에 없었다. 이웃을 접할 기회가 없으니 자신들이 아는 세계가 전부라는 착각을 불식시킬 길이 없었다. 오늘날 해외로 진출하는 한국인이 늘어 어느 정도 해소되긴 했지만 오랫동안 형성된 특징이 그리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폐쇄적 민족주의가 한국의 발전에 기여한 것 역시 사실이다. 그것은 보편적인 세계에 대한 종속을 벗어나 민족적인 단결과 분발을 낳았기 때문이다. 자립이라 할 수 있다. 부모격인 중화적 세계가 붕괴되어 의지할 수 없게 되었으니 불가피하게 택한 선택이지만 결과적으로 자립을 이루어 분발하였고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한국의 민족주의에는 또 한 가지의 장점이 있다. 그것은 침략성이 약하다는 것이다. 이는 한민족의 본성이 다른 민족에 비하여 착해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중화적 세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형성된 특징인 것 같다. 오늘날 강대국으로 올라왔지만 그 특징은-소극적 민족주의- 쉽게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군사적 패권주의를 추구하지 않았고 지금도 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물론 문화적 경제적인 해외진출은 지금도 꾸준히 추구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의 평화와 행복에 기여할 뿐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다.
반면 우리의 폐쇄적인 특징은 서서히 희석되고 있다. 분단국가라 섬처럼 격리되어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전세계를 누비며 살고 있다. 그것이 폐쇄성을 약화시켜 왔다. 앞으로도 우리 민족이 해외진출을 통해 보다 넓은 세계를 경험함으로써 폐쇄성을 희석시켜 세계무대에서도 당당하게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확신한다.
(3)일본형 민족주의 = 외부팽창형 민족주의
일본은 과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외적 팽창을 시도했다. 지금 제4의 팽창기를 맞이하고 있다. 아베신조정부는 1990년대부터 우경화가 이루어진 것을 기반으로 헌법9조의 개헌을 통해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고 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하는 것인지는 논란의 대상이지만 분명한 것은 전후 유지해온 평화국가로서의 기조에 변화를 주고자 한다는 사실에는 그다지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대외적인 팽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본의 역사는 그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제1의 팽창기는 고대에 이루어졌다. 고대 일본은 한반도와 대륙을 향해 팽창을 시도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사건, 신라를 침략한 일본군을 고구려가 5만명의 군사를 보내 격퇴시킨 것은 일본의 팽창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은 부정되고 있지만 고대 한반도의 역사에 일본이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김현구 고대명예교수는 일본군의 활동을 일종의 용병활동이라고 하였다. 한민족국가간의 대립과 전쟁에 일본군이 용병으로 활약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본은 가난하여 용병을 통해 살아가는 나라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마치 스위스인들이 과거 가난으로 인해 용병으로 먹고 살았던 것처럼.
제1의 팽창의 기반은 한반도와 대륙으로부터의 선진문명의 도입과 그로 인한 발달이었다. 이 시기의 일본이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 에 대하여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반도와 대륙에서 침략한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없어 정설로서 인정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반도와 깊은 관계 속에 일본에 선진문명이 엄청나게 도입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강성해진 일본이 역으로 한반도에 대한 팽창을 시도한 것이 라 할 수 있다. 외부 문명의 유입으로 강성해질 때마다 외부적 팽창을 시도하는 것은 이후로도 일본의 특징이었다.
제1의 팽창은 군사적 패배와 교두보의 상실로 끝났다. 663년 금강전투(백촌강전투)에서의 대패와 백제의 완전한 멸망은 일본의 제1의 팽창은 좌절을 맞이했다. 서기 700년 무렵에 작성된 ‘일본서기’는 징구황후 신라정벌기 등을 통해 좌절감을 극복하고자 한 일종의 자기만족의 기록이었다 할 수 있다. 이후 일본은 자신들의 세계에 오랫동안 머물게 된다.
제2의 팽창기는 도요토미의 침략에 의해 이루어졌다. 도요토미의 침략은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옴)는 아니었다. 이미 그 이전에 오랜 세월 왜구라는 일본의 해적이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위협하여 왔고 그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침략을 가져오게 한 근자감을 주었을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제1의 팽창기가 끝나고 대륙과 거리를 두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하고 있던 일본이지만 대륙과 한반도의 선진 문명과 문물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는 없었고 그로 인해 나타난 것이 왜구였다. 물론 여러 가지의 형태로 무역도 이루어지긴 했지만 침략을 이끌어낸 직접적인 요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의 도공을 다수 납치한 것은 도요토미의 침략이 대륙과 한반도의 선진문화에 대한 동경심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제2의 팽창의 기반은 치열한 싸움을 전개한 전국시대와 앞 선 서양문물의 도입이었다. 15세기 중반 이른바 오닌(応仁)의 난을 계기로 무로마치 막부는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일본은 약육강식의 전국시대로 접어든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서양에서 도입된 기독교와 조총을 대표로 하는 서양문물은 전국시대의 종식을 앞당겼고 그 결과 강력한 권력이 탄생하게 되었다. 물론 제후연합을 기초로 한 권력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그것이 다시 한번 일본을 팽창의 길로 가게 하였다.
제2의 팽창도 제1의 팽창과 같이 패배와 좌절로 끝났다. 제1의 팽창에 비해 제2의 팽창은 대륙에 대한 침략을 목표로 한 점에서 다르다 하겠다. 또한 제1의 팽창과는 달리 교두보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는데 이는 한반도와의 관계가 그만큼 소원해졌기 때문이다. 도요토미는 오랜 전국시대에서 양성된 전투력과 서양문물도입에 의한 병기의 우위로 자신감을 갖고 있었으나 공격이 수비보다 훨씬 어렵고 게다가 적지에서의 싸움은 몇 배의 어려움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 몽골의 일본원정이 두 번이나 실패한 것은 군사력의 문제가 아님을 배웠어야 했다. 게다가 제후연합군의 한계- 통일적 지휘체계의 부재와 군사력집중의 한계-를 깨닫지도 못했다. 한마디로 과대망상과 오만함이 낳은, 처음부터 실패가 정해져 있던 무모한 시도였다 하겠다. 이러한 과오는 제1기부터 제4기까지 계속된다.
제3의 팽창은 말할 것도 없이 식민지 지배와 대륙침략이었다. 이번에도 그 기반은 서양문물의 도입과 메이지정부의 수립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의 성립이다. 하지만 도요토미의 그것과 다른 것은 도요토미가 여전히 대륙과 한반도의 선진문물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던 것에 비하여 ‘탈아입구’라는 구호처럼 이번에는 팽창이 오히려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의식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중국이 서양에게 침탈을 당하는 모습을 본 일본은 서양의 우월성을 확신하고 서양문물의 도입에 국운을 걸었고 그것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탈아를 완성하고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로 입구를 완성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일본은 또 다시 무모한 시도를 하게 된다. 서양문물을 도입하여 열강의 반열에 오르자 이번엔 자신들의 스승인 서양에 대한 도전을 시도한 것이다. 아울러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큰 잠재력을 가진 중국에 대한 계산착오를 저질렀다. 이것은 과거의 팽창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무모함이다. ‘탈아입구’를 넘어서 ‘탈구자립’(서양에서 벗어나 자립하겠다는 것)까지 노린 그들의 팽창은 다시 한번 실패와 좌절로 끝났다. 이번에는 무모함이 도를 넘어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몰랐다“고 해야 할 것 같다.
3차례의 팽창에서 일본은 똑같은 시도와 실패를 반복했다. 외부문물을 도입하여 국력이 강성해지고 권력이 집중되어 결집력이 확고해지면 팽창을 시도했고 그것은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일본은 늘 호시탐탐 팽창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힘이 어느 이상 강해지면 그것을 실천했지만 결국 그것은 역부족으로 좌절된 것이었다. 왜 이렇게 같은 실패를 반복할까?
그것은 일본이 고립되어 있어 제대로 된 사회성을 기르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회성이란 주변과의 끊임없는 접촉과 교류 속에서 길러진다. 작은 성공과 좌절을 맛보며 자신의 삶의 한계를 알게 되고 그로 인해 돌출적인 행동을 최대한 자제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이 중화적 질서 안에서 그것을 키운 것에 비해 일본은 그럴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자기들끼리의 싸움이나 대결에서 승리하면 그것이 모든 것인냥 착각하는 일이 되풀이 되면서 겁 없이 팽창을 시도하고 좌절한다. 그것의 끝판왕은 대미개전이다. 국력이나 모든 면에서 상대가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 무모하게 전쟁을 건 것은 이러한 착각과 판단실패가 가장 극렬하게 나타난 결과일 것이다.
아울러 일본 국내가 안정적인 질서를 가지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대결구도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무사들의 출현을 가져왔고 무사들의 지배는 전쟁이나 침략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주었다 할 수 있다. 세계적인 대국 몽골에 끝까지 저항한 것이 고려와 일본의 무사의 정권시기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려의 경우 무사정권이 붕괴되자 바로 항복하고 전쟁을 종식시켰다는 점도 이를 간접적으로 입증해 준다.
일본과 같은 섬나라 영국도 이런 점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영국은 앵글로색슨족에 의해 통일 왕국을 이루고 노르만에 의해 정복된 후 끊임없이 대외팽창을 노렸다. 사자왕 리처드는 십자군전쟁에서 맹활약하는데 이는 그의 팽창욕을 대리만족시킨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후 100년전쟁을 통해 프랑스지역에 대한 지배를 확대시키려고도 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좌절된다. 백년전쟁의 패배는 영국으로 하여금 대륙에 대한 영토적 미련을 버리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금강전투(백촌강전투)의 패배와 비슷한 영향을 미쳤다 하겠다.
그 후 영국은 지리상의 발견에 편승하여 해군인지 해적인지 모를 세력을 키워 대외팽창을 다시 시도하였는데 이번에는 성공을 거둬 훗날 대영제국의 기초를 만들게 되었다. 지리상의 발견에 의해 대외적 팽창을 한 나라들 스페인 포루투칼 역시 레콩키스타의 내전을 마치고 중앙집권국가를 세운 나라들이었다. 네덜란드의 경우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대외팽창을 하였다는 점에서 비슷한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는 뒤늦게 지리상의 발견에 의한 팽창에 가담했으나 워낙 강력한 권력의 성립 때문에 영국과 마지막까지 패권경쟁을 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역시 오랫동안 내분을 거쳐 강력한 권력이 세워졌던 것이 대외팽창의 계기였고 그 과정에 백년전쟁은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반면에 유럽의 내륙국가들은 대외팽창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내부대결구도를 통해 강력한 권력의 나라를 세우는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신성로마제국은 여전히 연합왕국에 불과했고 러시아는 아직 그렇게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지 못했으며(몽골의 침입이 계기로 일단 단결이 이루어지긴 했지만)지리적 거리 때문에 지리상의 발견에 의한 팽창 대신 그 지역에서의 팽창이 이루어진 것으로 안다. 물론 그것이 강대국 러시아에의 길이었지만. 이탈리아는 분열되어 있어 대규모 해외팽창을 할 힘이 없었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친 산업혁명은 이러한 유럽국가들의 대외팽창을 폭발적으로 진행시켰다. 그 결과 19세기 후반 세계는 이들에 의해 분할지배 되었다. 이것은 일본으로 치면 외부문물의 도입이 강력한 권력형성과 맞물려 이루어진 결과와 유사하다. 다만 일본은 외부에 의존하여 팽창이 가능했으나 유럽국가들은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다를 뿐이다.
이러한 대외적 팽창은 모두 민족적 우월감에 의해 일어났다. 도요토미의 침략 근대일본의 침략 나아가 서양국가들의 신대륙과 제국주의적인 침략에는 우월감을 바탕으로한 침략사상이 뒷받침되었다. 일본의 경우 일본서기에 기초한 선민사상이었다. 그것은 근대일본에 이르러서도 근본적으로 변함이 없었고 거기에 일본식 오리엔탈리즘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은 기독교와 서양문명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과 우월감에 바탕을 둔 침략사상이다. 이를 일본은 일본판으로 바꾸어 일본의 침략을 합리화시켰던 것이다.
일본형 민족주의 또는 강대국형 민족주의는 곧 침략주의를 탄생시켰다. 한국형민족주의가 소극적이고 폐쇄적이라면 이것은 개방적이고 적극적이라 할 수 있다. 즉 민족적 자뻑을 바탕으로 대외적인 팽창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월한 존재이고 너희는 열등한 존재이니 당연히 지배할 수 있고 또 지배하여야 너희도 우리처럼 훌륭해질 수 있다“라는 터무니없는 우월감이 오만함과 결합하여 세계를 전쟁과 침략 그리고 착취로 가득차게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식민지지배에 앞장 선 서양국가들이 식민지지배의 역사를 합법이라고 우기는 근거가 바로 여기 있다. 자신들은 미개한 민족을 문명화시켰으니 인류발전에 공헌한 것이라고.
600만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의 나치즘은 이러한 민족주의의 가장 나쁜 사례일 것이다. 독일인은 우월하다. 따라서 세계를 지배할 권리가 있고 그래야 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억지 주장-신이 그들에게 그러한 사명을 주었다는 근거가 있기는 하나?-을 그들은 실현하였다. 반대로 유대인은 열등한 민족이니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학살하게 되었다. 이 정도면 민족주의를 넘어선 종족주의라 하겠다. (종족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독일만이 이러한 종족주의에 사로잡힌 것은 아니다. 일본과 서양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이런 식의 우월감에 바탕을 둔 학살과 침략을 자행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러한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도 사과하지도 않고 도리어 합리화시킨다. 민주주의와 현대문명을 세계에 퍼트렸으니 우리는 세계의 발전에 공헌한 것이라는 괴변도 서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을지 모르나 –식민지 지배를 당했던 나라들이 과연 이전보다 좋은 상태인지도 의심스럽지만- 그것이 침략과 착취의 정당한 명분이 되는가 묻고 싶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종족주의를 잘 실천하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전쟁과 내정 간섭을 통해 자신들의 국익을 실현하면서도 자신들은 민주주의와 인권 등을 위해 그렇게 하고 있다고 우기고 있다. 국민이 정당한 선거로 세운 민주정부를 자신들의 국익에 반하는 정책을 쓴다고 하여 군부를 부추겨 무너뜨린 칠레의 예만 보아도 이것이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은 수 많은 인명을 납치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지만 미국은 그에 대하여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뿐 만 아니라 베트남 전쟁 등 갖가지 전쟁을 주도하여 세계평화를 깨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을 전범 재판에 넘길 수 없어 그대로 허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민족주의 중에서 가장 피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러한 유형의 민족주의라고 생각한다. 아니 종족주의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과거의 실패와 좌절에 대한 기억을 잊었는지 일본은 제4의 팽창을 준비하고 있다. 또 다시 우월적 사상이 고개를 들고 일본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헌법 9조의 존재 때문에 아직은 섣불리 나서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우리에게는 어느 정도 정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의 제4의 팽창이 또 다른 파멸로 이어질지 아니면 과거의 경험을 살려 무난하게라도 성공을 거둘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방향으로 가든 누군가는 그 피해를 입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을 듯 하다. 우리는 이러한 일본에 경계의 눈초리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4) 유대형 민족주의 =국가와 국경을 넘어선 유대관계
유대인학살에 대하여 긍정하는 사람들이 갖는 편견이 있다. 유대인들은 죽을 짓을 했기 때문에 죽었다는 식이다. 예전에 독일유학을 한 선배가 ”터키사람들이 차별을 받는 것은 차별받을 짓을 하기 때문“이라고 해서 충격을 받았는데 유대인학살에 대한 긍정론은 이보다 더한 편견일 것이라고 믿는다.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셰익스피어 소설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유대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물론 그런 모습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유대인이 금융업에 종사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대인 전체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그렇다고 그러한 것이 유대인학살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살인을 한 사람도 법과 재판에 의하지 않고는 죽일 수 없는게 정의인데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죽여도 좋다는 생각은 ’종족주의‘적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유대인은 배타적이다 선민사상이 강하다 주변공동체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상한 풍습 –안식일 준수 특이한 식사습관 등-을 따른다 등등 그들을 미워할 이유를 나열하는 것은 그들을 죽여도 좋다는 이유가 될 수가 없다. 남과 다른 삶을 산다고 인간을 죽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것이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정면으로 해치는 것이 아닌 이상은 말이다.
그런데도 유럽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학대가 오래전부터 이루어졌다. 명분은 그들이 자신들이 믿는 기독교에서 구세주라고 믿고 있는 예수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경에 보면 예수를 죽일 때 ”그 피를 우리가 받겠다“는 식의 이야기를 예수의 살해에 가담한 유대인들이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보기에 따라서는 나중에 자신들이 그로 인해 살해당해도 좋다는 식의 표현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겨우 종교적인 기록에 의거하여 무죄한 인간을 죽여도 좋다는 것은 억지일 뿐이다. 게다가 그 당시에 가담했던 유대인들은 이미 주고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후손을 조상의 죄로 처벌하는 것은 연좌제이기에 허용될 수 없다. 만일 기독교가 예수의 죽음과 대속으로 인류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유대인들은 그러한 역사를 이룬 공로자일지언정 죄인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것 역시 억지이지만.
노벨상 수상자의 30%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유대인은 우수하다. 유대인의 교육이 우수하다? 유대인은 세계를 좌우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노벨상 수상자를 유대인으로 선정하도록 음모를 꾸미고 실쳔한 결과이다? 갖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다. 노벨상은 인류의 발전과 행복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주는 상이다. 따라서 유대인이 그 상의 30%를 받았다는 것은 유대인이 인류에 공헌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유대인들이 살해되어야 할 적인지 의문이다.
우리는 유대인으로서 인류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 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레닌 모두 유대인이다. 석유왕 록펠러 금융왕 JP모건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유대인이다.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지만 원자폭탄을 처음 만든 것도 유대인들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존재인 빌게이츠 스티브잡스 역시 유대인이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 중에 위대한 사람을 찾기가 더 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만일 유대인이 없었다면 인류의 발전이 훨씬 늦어졌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싶다.
유대인은 왜 이렇게 위대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을까? 탈무드교육법? 토라(구약성경)에 의한 교육? 자주 이유로 들먹여지는 것들이다.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맞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럼 왜 유대인은 우수한 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정말 교육만이 전부인가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오래전부터 자신들의 조국인 이스라엘에서 흩어져 사는 이른바 ’디아스포라‘를 해 왔다. 팔레스타인지방에서 기원한 이 민족은 이집트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다 다시 팔레스타인지방에 들어와(그들이 말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 가나안)오랫동안 왕국을 세우고 살았다. 하지만 남북으로 분열된 후 북방의 이스라엘왕국이 앗시리아에게 정복되었고 훗날 바빌론왕국에게 남방의 유대왕국도 정복되어 많은 사람들이 납치되어 바빌론에 살게 되었다. 이것이 최초의 디아스포라인 것 같은데 그들 중 대다수가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 ’에스더‘라는 부분에서는 바빌론 왕국에 살던 유대인들이 학살당할 위기를 당했으나 에스더의 지혜로 구출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이 당시 상당한 유대인들이 디아스포라적인 삶을 살았다 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유대인들이 세계로 흩어진 것은 서기 70년경 로마에 의한 이스라엘토벌 때문이다. 거듭되는 반란과 저항에 지친 로마는 대대적인 토벌을 통해 이스라엘지역에 살던 모든 유대인들을 이스라엘 밖으로 내몰고 말았다. 단결된 힘을 근본적으로 봉쇄하고자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나라 없는 민족으로 2천년간을 떠돌게 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이른바 시오니즘이라는 이스라엘 건국운동이 시작되었고 그것이 홀로코스트를 계기로 급속히 추진되어 오늘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만들어진 것이다.
’디아스포라‘는 유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고향을 떠나 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그 절박감이란 말로 다할 수 없게 된다. 주변에 그들을 도와줄 친지 친척도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민족적인 유대감을 더욱 돈독히 하였고 정신적인 지주인 유대교를 독실하게 믿음으로서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기원전 3,4세기에 쓰여졌다는 구약성경과 유대인들의 지혜를 모은 탈무드는 그러한 유대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좋은 수단이었다.
혈연 지연에 의지할 길이 없는 유대인들이 믿을 것은 오로지 실력이었고 따라서 그들은 교육에 모든 것을 쏟았을 것이다. 신앙적인 이유로 유럽 사회에서 꺼려진 금융업에 다수 종사한 것도 성공의 한 원인이 되었다. 구약성경에는 동족에 대한 금융업은 금지 되어 있으나 이민족에게는 가능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금융업에 종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정치적인 출세가 불가능했던 것도 그들이 학문 등에서 업적을 쌓은 이유가 될 수 있다. 정치적인 지위를 차지하기 어려운 유대인에게는 우수한 인재들이 학문 등의 분야에 진출할 가능성을 높였을 것이다. 정치가 우수한 인재를 피의 숙청으로 씨를 말리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유대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졌던 국제적인 유대관계이다. 그들은 국적에 관계없이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서로에게 필요한 정보와 도움을 주었고 이것은 큰 힘이 되었다. 워털루전투에서의 승패를 미리 안 로스차일드가는 그를 역이용해 거부를 쌓았는데 이는 유대인 네트워크의 도움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가 진정한 유대인인가를 알려면 다른 곳의 유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냐를 보면 안다.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도 온 몸이 고통을 느끼듯이 유대인이라면 그래야 한다.“ 반대로 배신적이거나 신용을 지키지 않는 유대인에게는 가차없이 제재가 가해진다는 것도 유대인의 국제적 네트워크를 강화시키는 원인이라 하겠다.
결론적으로 말해 유대인들에겐 학살당해야 할 어떠한 죄악도 없다 할 수 있다. 고유문화와 전통을 지키는 것은 죄악이 아닐 뿐 아니라 권리이다. 다르다는 이유로 정죄할 수는 없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나라 대신에 유대인들에게 더 충성한다는 것은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학살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때 일본계 미국인들을 격리하여 수용한 적이 있지만 그것에 대하여 사죄하고 금전적인 배상도 하였던 역사를 상기해 보자. 수용소에 격리한 것조차 사죄의 대상인데 하물며 학살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 구체적인 증거가 있어 스파이 혐의로 처형하는 것은 불가피하더라도 민족 전체를 그런 식으로 학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유대인만이 민족적 학살의 유일한 희생자는 아니다. ’인종(민족)청소‘는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비극이다. 전쟁으로 학살을 행하는 것도 때론 전범재판으로 처벌되는 데 하물며 민족을 송두리째 학살하는 죄는 인류가 범한 가장 큰 죄일 것이다. 이러한 학살에는 일본형 민족주의 즉 우월감에 기초한 다른 민족에 대한 멸시와 천대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국경을 넘어 자신들의 유대를 통해 인류에 공헌한 민족이다. 오늘날 그들이 팔레스타인주민들에게 저지르는 죄악은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 그들은 또 다시 홀로코스트의 악몽으로 인해 생기는 과잉방어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실제로 그들은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오랜 세월의 유랑생활 속에 정당한 이유없이 당했던 박해가 그들에게는 엄청난 트라우마로서 민족의 DNA에 남아 있을 것이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모습은 유대인 전체의 모습도 아니고 유대인들의 공헌을 지워버릴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문제도 아니라고 본다. 더구나 집단학살 침략 등에 의해 저지른 일본형 민족주의에 비하면 그 죄는 매우 가볍다 할 것이다.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프랑스혁명을 주도한 것이 유대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워낙에 차별과 학대를 당했기에 자유평등박애의 세상을 바라는 나머지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그러한 세상을 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바라는 인류의 최고의 가치이기도 하다.
유대인형 민족주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는 우리가 함께 추구해야 할 가치이기도 하다. 그것이 비록 그들 민족의 생존을 위한 것이라도 말이다. 한국형 민족주의 일본형 민족주의는 그런 점에서 미래에는 폐기되어야 할 인류의 부의 유산일지 모른다. 그것이 시대적 상황에 의해 필요해서 만들어지고 그로 인해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해도 말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세상은 끝나야 한다. ’강탈의 역사‘에 대하여 우리는 고별사를 읽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오랜 디아스포라 가운데에서 인류의 발전에 공헌하면서 차별과 억압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유대인들! 국가를 넘어서 서로 돕고 협력해 살아온 그들의 연대의식 이러한 정신을 보다 높은 수준으로 승화시킨다면 우리는 평화와 행복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5) 문제는 우월감이다. - 민족주의 종족주의를 넘어서 인류주의로
영화 ’25시‘에서 주인공 루마니아인 요한(안소니퀸 분)은 모함에 의해 유대인으로 분류되어 수용소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얼굴골격이 이상적인 게르만인의 골격이라고 간주되어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그와 닮지 않았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그것이 문제가 되어 전후 전범재판에 회부되는 수모를 당했다. 다행히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판단이 내려져 석방되었지만 그를 맞이한 아내는 성폭행으로 낳은 아이를 데리고 온다. 요한과 아내는 오랜만의 상봉에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미국기자가 나타나 사진을 찍기 위해 웃어 달라고 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웃음이 나올 리가 없다. 결국 울음과 웃음이 섞인 표정을 짓고 사진이 촬영되면서 영화가 끝난다. 인종학 골상학 등에 의해 우월한 인종, 우월한 민족 등을 규정하려고 했던 것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다.
과거에 나는 가출청소년들과 함께 지낸 적이 있다. 그들에게는 사연이 많아 듣고 보면 기가 찰 일이 많이 있었다. 11살과 5살 아이를 두고 가출한 부부 그로 인해 매일 눈물로 살아야 했던 11살 소녀는 ”잘 때 눈이 떠지지 않기를 바랬어요“라고 하소연하였다. 초등학생 딸을 혼자 놔두고 일주일 넘게 남자친구와 놀러 다닌 엄마, 술만 먹으면 초등학생 딸을 개패듯이 때리는 돌싱아빠 등등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주로 딸들이 희생되었다 - 그러한 끔찍한 경험을 들으면서 내가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면 이 아이들보다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겸손해지는 것 같았다.
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게츠비‘에는 ”네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싶을 때 그가 네가 갖는 유리한 조건을 가지지 못했는지 생각하라“는 말이 있는데 나로서 그 말이 실감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로 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노숙자나 행동이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왜 그렇게 사니? 참 한심하다‘라고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 사람에게도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기구한 삶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무조건적인 비난은 하기 어려워졌던 것이다.
인간이란 태어난 환경이나 사회를 넘어서기 어렵다. 민족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민족이 일본처럼 독립된 지리적 위치에서 살았다면 우리도 사대주의에 의지하지 않고 보다 자립적인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그러면 우리도 대외팽창에 몰두했을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일본민족이 중국이라는 넘어서기 어려운 강대국의 그늘에 살았다면 그들 역시 무능과 부패로 외국의 침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민족이 되었을 수 있다.
우월한 민족이니 뭐니 해도 영원히 우월한 민족도 열등한 민족도 없다. 결국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서 우월해지기도 하고 열등해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우월성을 내세워 다른 민족을 경멸하고 그것을 이유로 짓밟고 억압하고 하는 행위가 마치 민족의 영광인냥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적대시해야 할 것이 아닐까 싶다.
링컨대통령은 ”죽음을 어쩌지 못하는 인간 어찌 그리 오만한가’라는 시를 무척이나 사랑하여 “만일 내가 이런 시를 쓸 수만 있다면 평생 빚에 쫓겨 살아도 좋다”고 했다. 링컨은 세익스피어를 비롯한 문학작품에 조예가 깊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창작할 소질은 없었기에-그의 글쓰기 능력은 아마 연설이나 변론문에 치우쳤나 보다- 이런 말을 한 것 같다. 죽음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인간이 겨우 100년 남짓한 인생을 살면서 마치 자신이 삶을 좌우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오만이고 착각임을 이 시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민족이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민족의 저력’ 운운 하지만 다른 민족도 상황이 주어지면 ‘민족의 저력’ 이 발휘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반대로 그 저력의 민족도 다른 상황이 되면 저력(底力)이 아니라 저력(低力)의 민족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그것을 무시하고 오만함을 계속 간직할 것인가?
법률적으로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대세를 이루는 우리나라에서 왠지 모르게 민족이나 국가를 논할 때는 가해자 중심주의로 바뀌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아니 어쩌면 세계가 그럴지도 모른다. 남의 나라를 짓밟고 피해를 준 민족이나 국가가 비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당한 민족에게 “네가 못났으니 당했지”라는 식의 비난을 당하는 현실이 믿기 싫지만 일어나고 있다. 그러니 그에 대한 답은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가 아니라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한다”라는 것이 된다.
물론 그러한 답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피해 가능성에 대하여 조심하라고 주의하는 것이 반드시 피해자의 책임을 근본적인 원인으로 돌려 가해자의 행위를 합리화시켜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여성이 “요즘 우리나라 위험해졌어. 밤에 돌아다니기가 무서워”라고 하자 외국여성이 “미쳤어? 밤에 왜 돌아다녀”라고 했다는 것은 피해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불이 날 것을 대비해 불조심을 가르친다든지 절도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문단속을 잘하도록 주의를 주는 것은 방화범이나 도둑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피해를 막는 것이 우선이라면 그러한 주의는 들어서 지키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하지만 피해를 당한 민족을 비난함으로써 가해자민족을 합리화시키는 것은 인류의 이상과는 정반대로 나아가는 커다란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마치 “짧은 치마를 입어서 성폭행을 당했으니 네가 잘못이다”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묻고 싶다. 백보를 양보해서 짧은 치마를 입은 것에 자극을 받은 범인이 성폭행을 했다고 해도 당한 사람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서는 그리고 세계는 지금 그러한 주장이 버젓이 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만의 착각일까? “힘없는 민족이니 당해도 어쩔 수 없었다”라는 식의.
이 모든 문제의 중심에 민족적 우월주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민족은 우월하다. 그러니 남의 민족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 는 식의 잘못된 가치관이 21세기의 오늘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 서글픈 일이다. 그러한 생각은 다른 민족과 국가에 대한 비하 폄하로 이어지고 혐오에 이르기도 한다. 나아가 실제로 그것은 전쟁 침략 등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 종족주의는 이러한 바탕으로 독버섯처럼 자라나 세상을 파괴와 살육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게 된다.
민족적 자부심으로 미래를 향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환영하나 우월감에 빠져 다른 민족을 비하하는 식의 낡은 가치관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단기간에 경제강국이 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야. 그러니 앞으로도 열심히 살면 보다 나은 미래가 열릴 거야”라고 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지만 “우리민족은 저력의 민족”운운하며 우월감을 과시하는 것은 제발 멈추기를 바란다. 그러한 생각은 반드시 다른 민족에 대한 멸시로 이어진다. “저 민족은 게으르니 저렇게 살지” 라는 식의 라벨을 붙이는 것은 그러한 우월감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백인이 다른 인종에 비하여 우월하다는 신화가 믿어지던 시대가 있었다. 세계 선진국들 민주주의가 잘 이루어진 나라들은 거의 다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백인들의 나라였으니 자연스럽게 그런 신화가 성립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백인의 골상이 그러한 우월적 지위를 가져온다는 식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신화를 믿는 사람은 과거에 비해 훨씬 줄어들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에 반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기 때문이다.
반대로 흑인은 열등한 종족이라는 편견이 버젓이 통하던 시대도 있었다. “깜둥이들이 설쳐서 밤에 다니기도 무섭다” 미국에서 살다 잠시 귀국한 친척 아저씨의 말이다. 연이어진 이야기는 ‘깜둥이’들은 근본적으로 글러먹은 종자들이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깜둥이’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깜둥이’들이 얼마나 많은 지를 그 아저씨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한 편견이 차별을 낳고 세상을 불행하게 만들었음을 잊지 말자.
타이거 우즈가 나타나기 전에 흑인은 골프를 못 한다는 편견이, 윌리암스 자매가 나타나기 전에 흑인은 테니스에 소질이 없다는 생각이 버젓이 통용되었다. 그것이 흑인에 대한 보다 큰 편견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어쩌면 흑인들에게 일종의 ‘유리천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운동신경이 좋은 흑인에게 “흑인이니까 테니스나 골프 대신 농구를 하라”는 식의 권유를 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흑인들이 골프나 테니스 분야에 진출이 늦어진 것은 농구나 야구 같은 단체 운동에 비해 개인이 스스로 훈련이나 교육을 받고 장비도 스스로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가난한 흑인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타이거 우즈나 세레나 자매의 부모가 비교적 유복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민족과 종족을 넘어 인류가 하나 되어 함께 번영하고 행복한 세상을 그려보자. 가족끼리는 우열을 나누지 않는다. 민족 내에서도 그러한 행위를 노골적으로는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민족간에 우열을 나누어 서로를 폄하하고 비하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까 묻고 싶다. 물론 선의의 경쟁을 통해 서로가 보다 나은 삶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인류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니 권장해도 좋을 듯 하다. 하지만 잊지 마라. 우리는 지구라는 같은 배를 탄 인류라는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