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으로만 믿는다고 믿음인가요? 참된 믿음과 행위
입으로만 믿는다고 믿음인가요? 참된 믿음과 행위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서 2장 14-17절)
여러분은 믿음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믿음이 무엇이냐고 하면 쉽게 정의 내리지 못합니다. 그냥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냥 믿는 게 믿음 아닌가요?”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그럼 도대체 뭘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요? 그에 대하여 얼마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분은 생각보다 많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글자 그래도 하나님의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그분의 가르침 그분의 행적 그 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사랑 권세 등등을 모두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신뢰와 결코 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는 000이를 믿어’라고 말할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내가 친구를 믿으니까 그에게 돈을 빌려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돈을 빌려 주지 않죠. 은행은 저와 친하지 않지만 제 돈을 믿고 빌려 줍니다. 왜냐하면 은행은 그렇게 제가 빌려준 돈을 언제라도 돌려주게 되어 있고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오히려 친한 친구보다 더 그런 점에서는 더 믿을 수 있습니다. 빌려준 돈을 갚을 가능성에서는 친구보다 은행이 더 믿음직하죠.
믿을 수 있는 투자전문가에게 우리는 돈을 맡깁니다. 그것은 그가 투자를 통해 많은 이익을 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믿고 맡기는 000’이라고 하는 말이 그래서 나온 거죠. 그에 대한 신뢰가 커지면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고 맡기고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도 되죠.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수익을 보장하는 수완 좋은 투자전문가이니까요?
하지만 이 모든 존재 –친구 은행, 투자전문가 등-보다 더 믿을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믿음이 간다면 저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점은 믿는데 다른 것은 못 믿어” 라고 하면? 투자를 할 때 투자전문가의 말을 더 신뢰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을 실은 배가 미항을 떠나고자 할 때 그는 배가 폭풍을 만나 큰 피해를 볼 것이라고 했지만 모두가 항해전문가의 말을 믿고 떠나 결국 피해를 보았지요? 모든 전문가보다 가장 뛰어나신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세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는 위기의 순간에 누구의 말에 더 믿음을 가지느냐입니다. 하나님을 더 믿고 그의 말에 따른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전문가나 친구나 동료의 말을 더 잘 들으면 그에겐 믿음이 없는 겁니다. 대부분의 거짓 믿음은 바로 여기서 판명이 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시험에서 실족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기도하느냐 아니냐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꽃입니다. 세상에는 말씀도 보고 찬양도 좋아하는 불신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란 한마디로 말해 자신을 내어놓고 주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아쉬운 소리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결코 불가능합니다. 믿는 사람이 아닌데 함부로 여러분은 그에게 사정을 호소할 수 있습니까? 그러기에 기도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가장 중요한 표식은 바로 말씀대로 사느냐 입니다. 우리가 의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를 누구보다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이것을 먹으라고 하면 먹습니다. 먹지 말라고 하면 먹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 역시 믿음의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반대로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불신의 증거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또한 실족합니다. 가르침을 무시하고 살아가면서 자신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제자에게 스승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죽으라고 하시면 죽는 시늉도 합니다. 아니 실제로 죽기도 합니다. 순교가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모두 순교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순교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지상명령이 아닙니다. 순교가 필요하면 하지만 요즘같은 세상에서 순교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할 일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은 순교말고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배고프고 추운 형제에게 먹을 것을 주고 옷을 입혀주는 간단한 가르침을 지키는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실제로 할 수 있을만큼 우리에게 사랑이 있느냐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어느 정도 보일 수 있습니다.
물론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아니라는 것이죠. 세상 사람들 중에서도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까요. 불신자 박애주의자들 말입니다. 행위=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활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은 곧 행위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행위는 믿음없이 가능하지만 행위가 없는 믿음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사랑과 감기는 감출 수 없다고 하지요? 여러분이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면 그 형태는 곧 행위입니다. 행위로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는다면 드러나지 않는 사랑이 거짓이시듯이 거짓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행위로서 믿음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신앙을 점검해야 합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인지 말이죠. 행위로 드러나지 않는 사랑이 거짓인것처럼 여러분의 믿음이 거짓을 가능성이 매우 큼니다. 저와 여러분이 행위로서 믿음이 드러남으로써 우리의 믿음이 확신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키워드 – 믿음, 하나님, 투자 전문가, 항해 전문가, 위기의 순간, 거짓 믿음, 기도, 믿음의 꽃,
믿음의 증거, 불신의 증거, 스승의 가르침, 순교, 불신자박애주의자들
기도 – 하나님! 우리가 믿음을 행동으로 드러냄으로써 그것을 확신할 수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