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참다운 신앙의 목적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참다운 신앙의 목적
10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라디아서1장10절)
지방의 어느 교회를 다닐 때 일입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푹 빠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주님과의 교제에 몰두하고 있었죠. 직장을 다니면서도 최소 기도시간을 매일 3-5시간 때론 7,8시간 가지려고 노력하였죠. 통근 버스안에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고 점심시간에는 아예 식사를 하지 않고 간단한 간식으로 요기를 하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길을 걸을 때는 찬송이나 설교 동영상을 들었습니다. 휴일에는 도서관에서 빌린 신앙서적으로 마음의 양식을 채웠죠. 평일에도 짬을 내어 조금씩 읽다가 휴일에는 몰아치기로 몇 권씩 탐독하며 제 신앙의 살을 찌워 갔습니다. 그야말로 제 신 그런 저에게 뜻하지 않게 여러가지 제재가 들어 왔습니다. 그 하나는 제가 이어폰을 꽂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마치 엄청난 잘못인 것처럼 지적을 당한 것입니다. 장로님을 비롯하여 목사님 어머님까지 나서 저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꾸지람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이어폰을 꽂고 예배를 드리면서 다른 것이라도 듣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새벽기도 시간에도 이어폰을 꽂고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의 지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터무니없는 오해였습니다. 제가 그렇게 은혜를 받고 있는데 예배시간에 다른 것을 들을 리가 있습니까? 더구나 새벽기도에 나와서 말입니다. 이어폰을 꽂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단순 실수. 늘 이어폰을 꽂고 다니기 때문에 그것을 빼는 것을 가끔 잊어버립니다. 귀에 늘 꽂고 사니 아예 그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알람 때문입니다. 한 번은 새벽기도를 하다가 그만 깜빡 잠이 들어 통근 버스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날 저는 출근을 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근무지가 한적한 시골 마을이라 당연히 그곳까지 가는 대중교통은 아예 없습니다. 결국 거기에서 가장 가까운 읍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한 시간이 넘게 걸립니다) 택시를 타서 간신히 도착했는데 출근 시간보다 한 시간 가까이 늦고 말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새벽기도시간에 아예 이어폰을 꽂고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에 열중하여 이어폰을 꽂는 것을 잊으니까요. 이어폰을 꽂지 않으면 기도소리가 시끄러워 알람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를 모르니까 지적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예배시간이나 기도시간에 남의 행동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이 예배와 기도에 집중합니다. 물론 초신자 시절에는 저도 그런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예배와 기도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또 교제하는 것임을 알게 되자 그러한 관심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예배도 기도도 설령 모여서 한다고 해도 그것은 사람이 중심이 된 모임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향하여 이루어지는 행위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마 그렇게 저에게 지적을 한 분들은 아마 그러한 의미를 잘 모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이어폰은 매우 작은 것이라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보인다는 것은 얼마나 그분들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았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드리는 예배와 기도를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하실까요?
덧붙여 이야기하면 설령 그 행동이 맘에 들지 않더라도 노골적으로 예배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지적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아이나 청년이라면 모를까 (그들은 정말 모를 수 있으니)적어도 장년 이상이라면 스스로 깨우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에 집중하지 않는 것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하나님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본인이지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칫하면 이렇게 사람을 향하기가 쉽습니다. 남을 의식해서 기도를 하고 (칭찬이 필요하고 질책이 두려워)헌금을 하고 예배에 나오기도 합니다. 심지어 남과의 경쟁을 하듯이 헌금을 하면서 자신이 제일 많이 내고자 하거나 한 것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헌금은 많이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 하여서 내는 것이 최선인데 액수를 가지고 경쟁을 하고 자랑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향하고 있는 것이죠.
서울에 돌아와서도 비슷한 경험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평일에 기도를 하기 위해 여기저기 교회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저는 홀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제 기도 소리가 시끄러워 다른 교인들이 기도를 못 한다거나 다른 교회사람이 왜 남의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한다거나 하는 식의 핀잔을 듣게 된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기도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권사님이 (여성입니다) 남자가 함께 기도하는 것이 꺼려진다고 해서 거부당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기도를 해도 문제가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희 동네 근처에 대형마트가 하나 있는데 그곳 1층에 큰 휴게실이 있습니다. 1층의 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데 그곳에서는 무엇을 해도 상관없습니다. 주변에 식당이 있지만 꼭 그곳의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가지고 온 음식이나 음료수도 허용됩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서 그것도 큰 소리로 기도를 했지만 단 한 번도 항의를 듣지 않았습니다. 음악이 흘러나온다고 해도 완전한 방음은 되지 않을텐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죠?
이러한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앞에서 이야기한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사람을 향하고 있는지를 말이죠.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하고 있다면 이런 소리들이 나올 수 있을까요? 기도소리가 시끄럽다고요? 하나님에게 집중하는데 남의 기도소리가 방해가 될까요? 남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가 인간의 소유입니까? 여성이니까 남성이 꺼려진다? 기도에 집중해도 그런 말이 나올까요? 기도보다 주변 환경에 눈이 가고 사람에게 신경을 쓰니까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교회 남자 성도들은 기도실을 이용할 수가 없겠네요?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서라고 이것은 공공시설에 대한 기본적인 마인드가 잘 못 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모두가 사용하는 곳이라면 다소의 개인적인 불편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독교는 철두철미하게 개인 구원의 종교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모여도 자신이 하나님과 제대로 된 교제를 하지 못하면 나머지 전부가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 사람은 그 시간에 실패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실패해도 자신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 이론이고 실제로 예배 분위기 기도의 열기는 개인에게도 큰 영향을 주기는 합니다. 제가 서울의 대형교회(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닌 대형교회)을 다닐 때 예배와 기도의 열기로 큰 힘을 얻는 것은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각 개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제 친구 중에 그 교회를 다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족은 모두 그 교회를 다녔는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는 그러한 분위기에서도 별로 감동을 느끼지 못했고 그래서 늘 불평불만을 늘어 놓았습니다. “교회가기 싫다”라고. 이것은 그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리 집단적으로 뜨거워도 개인적 관계가 없으면 그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권유로 교회를 다니게 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교회에 가면 모두가 반갑게 맞아주고 환영을 해 줍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면 제법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져서 기쁘니 교회에 빠지지 않고 갑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런 태도는 사라지고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취급되게 되면서 감격이 사라지고 그래서 교회 가는 것이 예전처럼 즐겁지가 않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생기기 전에 믿음이 주는 기쁨을 느끼면 다행이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 문제입니다.
오래 다닌 사람이라고 다를까요? 아니 오래 다녔기 때문에 자신이 이번에는 정죄하는 사람이 됩니다. 누구는 왜 이러냐 저 사람은 왜 저러냐 하는 식으로 남을 판단하게 되고 자신의 평판에 신경을 써서 행동하게 되면서 주님과 멀어집니다. 새벽기도를 나가면 칭찬을 들을 것 같아 나가고 헌금을 많이 하면 좋은 평가를 얻을 것 같아 그렇게 합니다. 이래저래 사람들을 향하느라 하나님을 향할 틈이나 여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자신이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물론 사도바울이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영혼구원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히브리인에게는 히브리인처럼 할례자에게는 할례자처럼 무할례자에게는 무할례자처럼 행동하기도 할 정도입니다. 그는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고기를 평생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향해 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형제사랑이라는 것과 전도를 위한 수단이지 궁극적인 목적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강하게 말해야 할 때는 어김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철저히 하나님을 향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것처럼 우리도 믿음의 동료를 아껴줘야 합니다. 그들에게 베풀고 배려하고 사랑으로 대하여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야 하지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계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믿음의 동료들은 어려운 신앙생활에 둘도 없는 동반자이기에 서로를 이끌어 주어 끝까지 함께 달려갈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사람을 향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인 삼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시지 사람이 그러한 존재는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향하면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합니다. 저에게 이것저것 지적하신 분들이 과연 예배에 집중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계실까요? 남의 기도 소리에 기도를 못하고 이성이 함께 있으면 기도 못하고 남의 교회 사람이 오면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하나님에게 집중아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두가 아직은 성숙한 신앙인이 아니지요. 저와 여러분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함으로써 보다 성숙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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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신앙인,
기도 – 하나님! 우리가 사람을 향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