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우리는 왜 선한 일을 하지 않을까요? -편중된 신앙의 결과

닥터 양 2022. 7. 22. 08:41

우리는 왜 선한 일을 하지 않을까요? -편중된 신앙의 결과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36 37)

 

  제가 존경하는 분 중에 배우 정애리 권사가 있습니다. 그녀는 아시다시피 한 때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 중 한 분이었고 지금도 꾸준히 작품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인기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세월의 무게로 과거와 같은 명성은 없으나 여전히 우리에게 훌륭한 연기와 멋진 모습으로 즐거움을 주는 배우로서 자리잡고 있습니다. 연예인에게 그다지 팬심이 없는 저이지만(저는 오히려 스포츠 스타에게 더 관심이 많습니다) 정애리 권사는 제게 팬심을 심어준 몇 안 되는 연예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애리 권사를 존경하는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존경이 아니라 사랑을 느꼈겠지요. 물 론 사랑은 존경과 함께 이루어지기는 합니다. 하지만 제게 정애리권사는 닮고 싶은 롤모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제가 삶고 싶은 삶을 거의 그대로 살아가는 분 그것이 정애리 권사를 존경하는 이유입니다.

  정애리 권사의 책을 여러 권 탐독하며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연예인이 책을 그것도 한 권도 아니고 여러 권을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외국에서는 연예인이 책을 내는 경우가 제법 있는 것 같고 연예인에 대한 팬심 때문인지 몰라도 판매도 꽤 잘 되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최근에 정애리 권사가 낸 [/에세이] ‘채우지 않아도 삶에 스며드는 축복은 우리가 주모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그녀가 그토록 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녀의 에세이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립니다. 솔직하고 담담한 표현으로 자신의 삶에서 느꼈던 것을 써 내려가는 것이 마음에 크게 와닿는다고 해야 할까요? 저도 글이라면 누구보다 많이 썼지만 도저히 훙내 낼 수 없는 감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정결해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런 그녀의 작품 중에 제게 가장 큰 감동을 준 것은 사람은 버리는 게 아니잖아요라는 것입니다. 크게 세편으로 나뉘어 있는 이 책은 제게 인생을 바꾸게 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바로 그녀가 제가 살고자 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삶이 이상하거나 특별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라는 자신감을 주었습니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그녀가 공동체 생활을 위해 세운 하래의 집입니다. 전세로 마당이 딸린 독채 전세를 빌려 그곳에 두 명의 할머니와 고아인 아기와 소녀 그리고 그들을 돌보기 위해 입주한 젊은 부부 이렇게 6명이 살게 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어떠한 비용도 지불하게 하지 않고 오롯이 정애리 권사가 모든 것을 부담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알콩달콩 하면서 살아가고 정애리 권사 역사 그 안에 자주 참여하며 행복을 누립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자주 찾아다니는 성로원이라는 고아원의 이야기입니다. 드라마 촬영을 위해 얼마 동안 다녔던 곳인데 현 장을 보고 느낀 게 있어 그곳을 다시 찾았고 결국 일주일에 한 번씩 꾸준히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아들을 돌보면서 자신도 많은 감동과 배움을 받았다는 그녀의 경험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매우 감동적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각종 자선단체의 홍보대사가 되거나 활동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월드 비전을 비롯한 이름있는 단체에는 거의 다 얼굴을 내민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녀는 분주하게 자선활동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때론 연탄을 골목길에서 나르느나 땀을 뻘뻘 흘리지만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고 합니다. 참으로 멋진 삶이 아닌가요?

  저는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지만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려고 카페에 들어가려다가 나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저 마시면 끝나는 커피를 위해 4천 원이나 되는 돈을 써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판기 커피로도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되돌아서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 쓰기로 했다

  정애리 권사의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녀에게 4천 원은 전혀 아까워하여야 할 돈이 아닙니다. 아니 웬만한 수입이 있는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아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다.

  우리는 자선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늘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좋은데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라고. 하지만 정애리 권사가 먹고 살기가 어렵지 않아서 자선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4천 원의 커피값을 아낄 이유가 없죠. 그녀가 자신의 삶을 있는 대로 쪼개서 그렇게 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 글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럴 수 있으십니까?

  아마도 그렇게 할 생각이 1도 없을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하죠. 애당초부터 자선이란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인 것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니까요. 그것은 크리스천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다는 아닙니다. 정애리권사도 권사라는 직분을 가진 크리스천으로서 사랑을 실천하고 살고 계십니다. 아마 그녀와 비슷하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사랑의 실천에 힘을 기울이시는 크리스천들은 어느 정도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녀처럼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절제하면서까지 사랑을 실천하는 분이 얼마나 될지요. 그저 자선단체에 어느 정도 기부를 하고 만족하고 있는 것이 태반이 아닐까요? 정애리 권사가 커피를 절제한 것은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삶에서 사치스러운 부분을 억제하여 절제를 가능케 하는 것이 됩니다. 사치를 허용하게 되면 언젠가는 삶 자체가 사치스러워지고 그렇게 되면 자선에 쓸 돈을 마련하기는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변증가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삶을 바꾸는 압박이 없는 기부는 진정한 기부가 아니라고. 물론 그렇지 않는 기부가 가치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기부들이 거의 대다수이기에 없다면 곤란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진정한 기부를 하려거든 자신의 삶의 일부라도 바꾸어 기부를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정애리 권사는 그것을 몸소 실천한 진정한 기부자라 하겠습니다. 그것도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돈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한 것이니 더욱 놀랍지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했지만 정애리 권사에게는 그것이 개미가 집 문턱 넘어가는 것보다 쉬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크리스천들은 의외로 자선에 관심이 적을까요? 오해하시지 말 것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통계를 보면 개신교가 가장 많은 기부나 자선을 하고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적으로는 모르겠으나 개인들에게 그러한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교회에 헌금을 열심히 하나 기부나 자선에는 소극적입니다. 제가 큰 착각을 하고 있나요? 그런 통계자료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저는 어떤 교회를 다닐 때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할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국가가 할 일이 교회가 할 일은 아닙니다.”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지 그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됩니다여러분은 이런 설교에 공감하십니까? 저는 지금 1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이것에 대하여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분명히 성경에는 이웃을 돕고 사랑하라는 명령이 적혀 있는데 이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을 돕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이웃사랑이라고 하셨고 이웃사랑이 하나님 사랑에 버금가게 중요한 성경의 2대 교리라고까지 하셨습니다. 나아가 사도바울은 60이 넘는 참과부의 이름을 교회에 등록시키고 도우라고 했습니다. 아주 구체적이지요? 물론 가족이나 친척에게 일차적 책임을 가지도록 하기는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염소와 양의 비유는 나의 가장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여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사람들을 염소라 하고 지옥에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구약에는 주님이 바라는 기쁜 금식은 이웃에 대한 속박을 풀어주고 그들을 돕는 것이라고 하시며 그것을 하지 않기에 굶는 금식을 아무리 해도 들어 주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돌보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셨습니다. 레위기에는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아서 가난한 사람들이 그것을 먹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허다한 가르침이 이웃 사랑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왜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교회가 그러한 가르침을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제대로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목사의 예는 그것을 말해 줍니다. 여러분은 교회 설교에서 이웃 사랑에 대하여 얼마나 자주 듣습니까? 분명히 이웃 사랑은 교리의 양대 축인데 과연 하나님 사랑과 비교할 때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다니던 교회 중에 그마나 이웃 사랑을 자주 언급한 곳이 여의도 순복음 교회입니다. 실제로 이 교회는 엄청난 규모로 자선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두 가지일 것입니다. 우선 이웃 사랑을 아까 말씀 드린 목사처럼 중시하지 않거나 아예 신경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설교를 성도들이 싫어한다고 합니다. 특히 부유층들이 많은 교회일수록 그것은 거의 금기어이며 만약 언급하면 성도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이영훈 목사는 그로 인해 빨갱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나눔이나 분배를 논하면 그렇게 되는 모양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탐욕에 가득 차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부동산에 대한 세금을 올린다고 해서 표심을 옮겨 버리는 나라 아닙니까? 대의명분보다 자신의 눈앞에 이익에 사로잡혀 사는 나라 그것이 대한민국의 민낯입니다. 그러니 이웃 사랑은 그들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이웃 사랑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하는 교회를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나의 가장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자를 영벌에 처하는 장면이!

  코로나사태가 한 참 진행될 때의 일을 기억합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자영업자들에 대한 보상이 거론되자 이런 이야기가 튀어나왔습니다. ”자영업자가 벼슬이냐? 나도 자영업자가 되고 싶다라는. 자영업자 뿐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힘들었고 직장을 잃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직장을 잃은 것과 장사를 못하고 심지어 폐업을 한 자영업자들의 피해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영업이 안 되면 유지비를 감당할 수 없으니 매달 돈이 나가야 합니다. 페업을 할 경우 투자한 자금을 거의 다 잃는 것인데 대부분 그것이 빚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막대한 빚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됩니까? 저도 해 봐서 그 피해를 압니다.

  그런데도 이 같은 반응은 그저 몰랐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코로나라는 난국에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할 때 가장 피해를 봐야 할 사람들에게 우리는 감사해야 하고 그들의 고통을 나눠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증세라도 해서 그들을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초창기에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모든 세금의 10%를 코로나 지원특별세로 징수하여 피해자들에게 나눠주자고. 세금이 100만 원이면 거기에 10만 원을 얹어 내도록 하는 것이죠. 큰 돈 같지만 100만 원이나 세금을 내야 할 정도면 제법 큰 거래이니 그 충격은 완화됩니다. 여러분이 1,000만원짜리 물건을 사는데 세금 10만 원이 큰 부담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종교적 행위를 위해 엄청나게 애를 씀니다. 헌금을 하고 예배에 꼬박꼬박 참가하고 때로는 금식기도를 합니다. 온갖 정성을 다하죠. 그런 것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가 아닙니까? 물론 대단히 좋은 것입니다. 부디 더 힘쓰십시오.

하지만 이웃 사랑은? 그것의 반이라고 하고 계십니까? 아니 반의반이라도 하고 계십니까? 반의반이라도 하신다고 하면 둘 중 하나입니다. 자신이 이웃사랑에 관심이 많거나 거꾸로 종교적 행위에 소홀하거나. 종교적 행위를 소홀히하면서 이웃사랑만 하는 것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이니까요. 하나님의 사랑없이 이웃사랑만 한다면 그저 자선사업가에 불과할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웃사랑에 이처럼 소홀할까에 대하여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신앙은 지나치게 현세의 축복과 내세의 구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올인할 정도로의 비중을 가지고 있을까요?

  어떤 분이 성경에서 경제문제에 대한 내용을 잘라 버리니 성경이 부스러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이 그 정도로 경제문제에 비중을 두고 있는데 설마 그 경제문제가 경제성장이겠습니까? 아니면 경제안정이겠습니까? 바로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는 후생경제학이 아니겠습니까? 결코 성경은 현세에서의 삶을 우습게 보거나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날과 그때는 아버지만 아시니 너희는 깨어 있으라하셨습니다. 그 분은 종말에 초점을 맞춰 살라고 하시지 않고 도리어 현재의 삶에서 말씀에 충실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환란날에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셨겠지요.

  사도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일하라는 것이 포인트가 아니라 평소의 삶을 충실히 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말만 바라보며 산다면 다미선교회의 시한부 종말론의 과오를 되풀이할 것입니다. 종말이 언제 오든지 자기의 삶을 잘 살면 말씀대로 기도하며 살면 된다는 것이 그의 진짜 의도 아니겠습니까?

계시록이요? 계시록에는 특별한 것은 없으면 다만 666표를 받지 말라고 합니다. 당연하지요. 배교를 전제로 666표를 받으라고 할 때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받겟습니까? 이는 요령이 결코 아닙니다. 평소에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여 투철한 믿음이 있다면 그걸 받을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잠깐 편하자고 지옥의 고통을 받아들인다면 엄청난 손해 아닐까요? 이 역시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해보면 우리의 삶은 결코 종말에 맞춰질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맞춰져야 할 것입니다. 물론 종말이 올 것이라는 생각은 확고하게 갖고 있어야 합니다. 시험이 언젠가 오니 그럴 때를 대비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것처럼. 만일 시험이 없다면 누가 열심히 공부할까요? 3과 고3 교실은 고입과 대입의 부담이 사라지는 순간 무질서해집니다. 시험이 없으니 공부를 해야 할 동기도 의지도 사라지는 것이지요. 그렇듯 종말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믿음생활의 강력한 동기가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 아니 가장 중요한 것인가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이웃 사랑은 결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구원이 걸린 중대한 문제입니다. 나의 가장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는 주님 말씀을 떠올리십시오. 이웃사랄을 하지 않는 것은 엄연한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행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노력을 하면서 선행을 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으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는 교회는 큰 과오를 저지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혹시 성도들의 이웃사랑이 교회에 대한 관심이나 헌금의 감소로 이어질 것이라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웃사랑을 성도의 당연한 의무로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바꿔가면서 실천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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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사항, 이웃 사랑

 

기도 하나님! 우리가 이웃 사랑을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무인 것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기 위

해 우리의 삶 자체를 바꿀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