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아름다운 믿음 소망 사랑이 만들어줄 아름다운 세상

닥터 양 2022. 6. 6. 09:24

아름다운 믿음 소망 사랑이 만들어줄 아름다운 세상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 전서 138-13)

  여러분이 서울에 사는데 부산에 가야 할 일이 생겨 운전대를 잡고 출발하였다고 합시다. 이 단순한 행위 하나에도 믿음 사랑 소망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볼 일이 있어 가는데 무슨 거창하게 그런 말을 해?” 이렇게 반문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의 삶은 모두 믿음 소망 사랑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그래야 합니다.

  ‘볼일이라고 하셨죠? 볼 일은 왜 생기나요? “별 볼 일 없다고 하는 비아냥이 있습니다. ‘별 볼 일 없는 사람’ ‘별 볼 일 없는 인생등등 이렇게 자주 쓰는 표현인 별 볼 일 없다는 제가 중학생 시절 즈음부터 유행한 말인데 워낙 이 표현이 실용도가 높아 오늘까지 우리의 입에서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세대를 뛰어 넘는 일종의 스테디셀러가 된 셈이지요. 제가 좋아하는 에이스 크래커처럼. 해태 제과의 에이스 크레커는 1970년대 처음 출시된 과자인데 지금도 커피와 잘 어울리는 과자로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는데 별 볼 일 없다도 지금까지 말의 뜻과는 달리 별 볼 일많은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볼 일이라는 것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볼 일을 만들어낼 갖가지 이유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 이유들도 그냥 생기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 지금 처한 환경 현재 생겨난 유동적인 조건 등이 하나가 되어 발생합니다. 뭐가 그리 복잡하냐고요?

  만일 여러분의 볼 일이 친구를 만나는 것이라고 합시다. 그럼 우선 부산에 친구가 산다는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최소한 친구가 부산에 그날 그 시간에 가야 할 일이 있거나 그곳에서 만나야 할 조건이 생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선행되어야 할 조건입니다.

  그런 조건은 우연히 생길까요? 서울에 사는 여러분이 부산에 친구가 있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지요? 그가 원래 부산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만 그렇지 않고 서울에 살던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직장이나 다른 이유로 아예 이사를 간 건지 아니면 잠시 전근을 간 건지 등등 그 이유는 다양합니다. 물론 실제로 적용되는 이유는 하나이겠지만.

  그가 전근을 했다고 합시다. 그것도 다양한 요소가 개입된 결과입니다. 그는 왜 전근을 받아들였는가? 부산으로의 전근이라면 자신의 뿌리인 서울에서 제법 먼 곳인데. 그런데 알고 보니 그가 원래 부산 출신이고 다만 대학에 가기 위해 직장을 위해 서울로 왔었기 때문에 부산에 가는 것이 도리어 귀향이 되는 고로 문제가 없다는 이유도 있을 수 있죠.

  이러한 조건이 갖춰져도 굳이 부산까지 가서 친구를 만나는 이유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알고 보니 여러분은 지금 새로운 삶을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직장을 사직하고 그것을 알아 보고 있다 그래서 친구와 그 문제로 상의하고 싶어졌다 마침 사직을 했으니 시간도 널널하게 많다 아니 가진 것은 시간 뿐이다 이런 조건이 갖춰졌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지요.

  그런데 이것도 그냥 저절로 생기는 조건이 아닙니다. 새로우 삶을 생각하여 직장을 과감히 그만두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웬만하면 그냥 참으며 지내죠. 아니면 새로운 일이 나타날 때까지 그대로 지내기는 것이 좀 더 일반적이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직장을 그만두고 시간을 보낸다면 그 절실함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을 절실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혹시 그것이 선교사로서의 소망은 아닐까요?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가족과 함께 행복한 삶을 꿈꾸었다면 결코 하지 않을 선택을 한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혹시 어려서 받은 뜨거운 은혜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그것으로 뜨거운 믿음이 생겨났고 그 믿음으로 인해 여러분은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기를 바라오라는 찬양처럼.

  그 사랑은 믿음의 기초 위에 생겨난 사랑일 것입니다. “하고 싶은 사랑이 아니라 해야 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남녀의 사랑 부모 자식의 사랑은 하지 말라고 해도 합니다. 심지어 죽인다고 해도 합니다. 발렌타인데이의 기원을 아십니까? 발레타인 사제가 결혼을 금하는 황제의 명을 어기고 결혼식을 집전해 주다가 순교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물론 사제만이 아니라 결혼하는 남녀도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결혼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고 싶은 사랑본능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에 의한 보편적인 사랑은 그렇게 쉽게 할 수 없습니다. 본능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남녀 간의 사랑이나 부모 자식의 사랑처럼 일반적이기는 어렵지요. 그러니 믿음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랑은 도리어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랑을 우리는 정욕이라고 하지요? 정욕은 믿음 없는 사랑의 실체일 것입니다.

  그러면 부산에서 만나게 될 친구가 과연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요? 알고 보니 그는 목회자이거나 선교사 경험이 있는 친구 또는 현재 선교사로서 사역을 하지만 잠시 귀국해서 그 자신의 볼 일을 보고 있고 그것이 부산에 머물게 했기 때문에 부산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런 시나리오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의 믿음 소망 사랑이 여러분의 그것과 속된 말로 아다리가 맞아 둘은 부산에서의 만남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여러분은 운전대를 잡고 부산에 내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때요? 이만하면 만남이 가지는 복잡한 배경이 이해되시죠?

  믿음이란 살아가는데에 기본이 되는 철학 사상 신념 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삶을 이끄는 기반이 됩니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불교를 믿는다면 선교사가 되는 소망을 가질 이유가 없죠.

  불교는 선교사라는 소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초창기에는 이차돈 같은 순교자가 있었고 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선교사 비슷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 있었겠지만 불교는 종교의 특징상 선교사가 그다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불교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굳이 선교사를 보내 적극적으로 불교를 전파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기독교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으니 선교의 절실함이 있습니다.

  그 믿음이 여러분을 선교사라는 소명과 이어지게 하는 더 큰 이유는 사랑입니다. 죽어가는 영혼들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영혼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뜨거운 사랑이 없다면 굳이 선교사라는 어려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냥 자기 혼자 잘 믿어 구원받아도 되니까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교사가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한 사람이 이역만리에 선교사의 사명을 띠고 나아간다며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이 하나가 되어 만들어진 결과라 하겠습니다. 믿음이 있으니 선교사의 길을 가게 되지만 그것은 불신자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좀 더 넓은 범위의 개념이지만 그것을 선교라고 하는 좁은 범위의 소명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사랑입니다.

  선교사가 아니라도 이러한 법칙은 그대로 적용됩니다. 내가 삶 가운데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이러한 믿음 소망 사랑의 법칙이 결정합니다. 무신론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신을 믿지 않으니 자신이 인생의 기준이 됩니다. 그럼 당연하겠지만 이기주의자 자기중심적 사고의 소유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가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랑을 가지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소망이란 자신이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 가를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큼니다.

  물론 무신론자라도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 수는 있으나 그것은 매우 어려운 선택일 것입니다. 신이란 인간의 삶을 규제하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그러한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을 하는 것은 그의 자아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아가 필요 이상으로 강한 사람이 남에게 희생적이 될 수 있으까요? 자신에 대한 애착인 자기애가 엄청나게 강할 수 밖에 없을텐데. 만일 그가 희생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일종의 자기애에 기초한 위선적인 행위일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혼란에 빠진 것은 믿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자가 늘어났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은 자신의 것이며 그러기에 마음껏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의 기준은 자신의 행복 자신의 이익 나아가 자신의 즐거움에 귀결될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의 삶은 남을 수단화시키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가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쾌락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삶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다 할 소망이 없으니 뭐든 즐겁게 해 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소망이라면 소망이겠지요. 그런 사람에게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요? 자기애 말고요. 없겠지요.

  대한민국은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실종된 사회가 되었습니다. 자기애 또는 자기애에 가까운 우리만의 사랑은 넘침니다. 자기 자신 자기 가족에 대한 사랑은 오히려 더 뜨거워진 느낌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이든 불교이든 유교이든 종교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사랑은 그 어느 때보다 약해졌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즐거우려면 남에게는 매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들 쓰기도 바쁜 데 남을 위해 쓸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더 야박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혐오사회는 그러한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내 삶에 방해가 되고 내 즐거움에 해가 되니 혐오하게 됩니다. “참을 수 없는 너의 존재를 혐오한다라고 해야 할까요? 남이 나의 즐거움이나 이익의 도구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존재는 혐오해야 할 상대가 아니고 뭘까요?

  바울은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중요성과 그 본질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한 때 이 가르침이 결혼식장에서 자주 울려 퍼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마저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정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오래참고첫 마디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오래” “참다라니? 지금 같은 시대에 오래 참는다는 것은 극악의 가르침이겠지요.

  결혼식에서 주례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결혼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수단인데 주례 선생님의 딱딱한 가르침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결혼식 자체가 너무나 가벼워져 경건함은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그냥 자신들끼리 하는 놀이가 된 느낌입니다.

  이런 마인드로 결혼을 하니 이혼이 늘고 해체되는 가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은 아닐까요? 결혼이란 그 자체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고생 끝 행복 시작이 아니라 어찌 보면 더욱 더 큰 짐을 짊어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하나가 되려면 얼마나 큰 진통을 겪어야 할까요? 그런데 결혼식에서 보여주는 신랑 신부의 얼굴에는 그러한 것에 대한 경각심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신혼의 단꿈에 젖은 모습만 보이는 것일까요? 바로 결혼에 대한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만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기적인 생각이 좌절로 이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믿음에 기초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에 의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에 의한 소망은 반드시 보편적 사랑에 기초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 사랑이 없는 소망은 결코 크리스천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는 믿음 소망 사랑이 하나가 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자신의 욕구를 위한 도구이고 우리의 소망은 자신의 욕구를 포장한 것이고 우리의 사랑은 믿음에 기초하지 않은 정욕적인 것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보편적인 사랑을 떠난 정욕적이 믿음 그러한 믿음에 기초한 정욕적인 소망 믿음에 기초하지 않은 정욕적인 사랑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된 것이 지금의 우리의 현실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올바른 믿음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이 모든 것의 출발입니다. 올바른 믿음이 아름다운 소망과 사랑을 낳을 것입니다. 믿음은 삶의 뿌리이고 소망은 삶의 줄기이며 사랑은 삶의 꽃과 열매입니다. 아름다운 소망과 그에 따른 사랑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이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세상을 만드는 사명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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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위선적 행위, 우리만의 사랑, 혐오사회, 삶의 뿌리와 줄기, 꽃과 열매

 

 

기도 우리가 믿음 소망 사랑을 통해 삶의 꽃과 열매를 맺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