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남편과 아내는 한 몸입니다.

닥터 양 2022. 4. 26. 11:09

 남편과 아내는 한 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194-6)

 

목 차

1. 대한민국의 가정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2. 가정으로 돌아오는 남편들 가정을 떠나는 아내들!

3. 부부의 유대관계가 깨지다. - 부부인가요? 동거인인가요?

4. 해결책은 오직 하나! 더 이상 바람피우지 말고 돌아오십시오.

 

1, 대한민국의 가정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나 늘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며 검은 머리가 팟뿌리가 될 때까지 함께 살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전에 이런 말을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 또는 결혼을 하는 신혼부부들에게 하였습니다. 결혼에 대하여 이처럼 잘 표현한 말도 드물 것입니다. 결혼생활은 내외로부터 많은 위기와 도전에 직면하게 마련인데 그것을 함께 꾸준한 사랑으로 극복하고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까지 지켜내는 것이다 라고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했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지금도 형식적으로는 그렇게 하자고 합니다. 여전히 결혼서약에서는 그렇게 되어 있고 신랑과 신부는 그것에 동의하는 의식을 합니다. 물론 그 권위는 이미 예전만큼 크지 않습니다. 결혼식 자체가 엄숙함을 잃고 잔치나 파티 같이 되어 가는 현실은 이러한 사실을 상징합니다. 두 남녀가 하나가 되어 평생을 함께 하자는 의식이 어떻게 한낱 웃고 떠들고 즐기는 시간이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자유로운 서양에서조차 결혼식 자체는 엄숙 그 자체입니다. 다만 그들은 결혼식이 끝나고 벌어지는 피로연에서 마음껏 놀고 즐깁니다.

  우리의 경우 결혼식은 엄숙하지 못하고 피로연은 즐겁지 않습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인사나 하는 요식행위일 뿐인 것이 우리의 피로연이니 어정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전에 결혼식은 엄숙함이 그나마 좀 있었습니다. 하객은 식의 진행에 관계없이 어수선하게 굴었지만 적어도 두 사람과 주례만큼은 엄숙함을 지켰습니다. 지금은 주례를 없애고 식 자체도 엔터테인먼트가 되어 버려 엄숙함의 그림자도 없어졌습니다. 한마디로 장난이 되어 버린 거죠.

  그것이 결국 높은 이혼률도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이라는 산보다 더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되는 결혼식이라는 의식이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가볍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취임하는 의식이 그저 웃고 떠드는 시간이 된다면 납득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마 터무니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두 남녀가 일생을 함께 하고자 하는 결혼식이 대통령의 취임식에 비해 의미가 약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결혼식이 그토록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되었습니까?

  결혼에 대한 가치 의식의 변화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이 맺어준 인연은 사람이 나누지 못하며 결혼은 둘을 하나로 만들어준다고 말이죠. 그런데 우리에게 결혼이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며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는 그저 하나의 계약에 불과하다고 생각되는 값어치 없는 것일까요?

  극단적으로 말해 결혼이 성매매의 하나가 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외모가 출중한 여성을 돈 많은 남성이 사는 것이 현대식 결혼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극단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오죽하면 이런 말이 나오겠습니까? 성형외과에는 외모를 바꾸려는 여성들이 줄을 섰고 있고 남성들은 그들을 잡기 위해 연봉을 올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결혼을 생각하는데 결혼이 운명이라느니 백년해로를 하느니 어떠한 고난도 함께 이겨내자느니 하는  말이 먹혀들 여지가 있기나 하겠습니까?

  그러니 가정이 자신들의 욕망이 채워주지 않으면 언제든지 해쳐 모여 할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물론 가정이 욕망을 채워주는 것은 가정의 중요한 기능입니다. 하지만 가정이 욕망을 전면에 내세우면 세상의 많은 조직이나 집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가정은 일단 부부를 중심으로 가족이 형성되어 그들이 함께 희노애락을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런 면을 유지해야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그것을 이겨내고 유지되고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의 일을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제게 가정은 가족은 좋으면 유지하고 맘에 안 들면 해체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절대적이고 어떠한 현실적 이익도 그 앞에서는 무기력해지는 숭고한 가치를 가진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가정은 욕구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니 세상의 많은 조직이나 집단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가정의 해체를 막을 길은 없습니다. 언제든지 해채되어도 좋다는 것이 지금의 가정인 것입니다. 그런 마인드는 가정의 해체를 보다 용이하게 하는 악순환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습니다.

2. 가정으로 돌아오는 남편들 가정을 떠나는 아내들!

  ’낚시 과부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남성들이 즐기던 낚시로 인해 아내가 주말에도 남편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 생긴 말입니다. 낙시 과부는 당시 남성들이 가정생활을 얼마나 소홀히 했는지를 말해주는 상징적 단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남성들은 가정에 머물러 지내기보다는 밖으로 다니며 지내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직장이나 사업을 위해서는 물론 인간관계도 주로 밖에서 구하고 지냈기에 남자들의 우정은 매우 끈끈했습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중년 남성들이 손을 잡고 다니는 모습도 드물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여보 일찍 들어오세요라는 말 요즘 아내들은 할까요? 설마 여보 늦게 들어오세요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특히 전업주부라면 내심 남편인 늦게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아내들이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남편들에 비하면 들어와 봐야 해 주는 것은 없고 일거리만 만드는 남편들을 왜 그토록 애타게 기다렸을까요?

  그것은 그녀들의 삶에서 가정이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전업주부들의 가사와 육아의 부담은 지금의 여성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웠습니다. 가전제품이 거의 없던 시절 가스렌지도 없었던 그 때 모든 것은 주부가 몸 하나로 해야 할 일 들 뿐이었습니다. 저는 어려서 그런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았기에 제가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였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아이는 왜 그렇게 많습니까? 저는 겨우(?) 삼남매였지만 (지금은 무려 삼남매이겠지요)대부분 5,6명씩은 자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주부들에게 가정은 삶의 전부였습니다. 지금처럼 문화센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있었다고 해도 그런 곳을 드나들 수 있는 것은 가정부를 두고 사는 일부 유복한 계층의 이야기이었습니다. 게다가 출가외인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니 친정 나들이도 쉽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무서운 시어머니가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가사와 육아를 소홀히했다가는 경을 칩니다. 학교 동창을 만나는 것도 눈치를 보며 겨우 하는 수준이니 밖에 나가도 별 볼일(?)없었고요. 가끔씩 장을 보러 가는 것이 그나마 합법적으로(?) 외출을 하는 좋은 명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람난 여성들은 장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감으로써 의심의 눈초리를 피했던 것이죠.

  그런 그녀들에게 남편은 자신의 삶의 단조로움과 지루함 피곤함을 해결해 줄 거의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니 아빠 밥상이 등장한 것입니다. 아이들에겐 주지 않는 좋은 반찬이 오르고 또 같은 반찬이라도 양이 풍성한 아빠 밥상은 오늘까지도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당시 아빠들 남편들이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졌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아빠 밥상을 노리며 다가가는 아이들은 엄마의 눈치와 질책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성들은 더 이상 가정에 머물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잘해야 1,2명 심지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3명이면 원시인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가전제품이 잘 발달되어 있고 가스렌지를 비롯한 많은 생활도구들이 잘 되어 있어 더 이상 그녀들은 가사에 속박되어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캠브리지 대학교 교수인 장하준 선생은 그의 저서에서 세탁기가 IT혁명보다 더 혁신적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여성을 가정에서 사회로 나아가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생각해 보면 그 파괴력이 얼마나 엄청난지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밖에 나가 봐야 별 볼일 없던 시절과 달리 그녀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카페가 과거와 달리 가볍게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곳이 되었고 문화센터가 늘어 소일거리가 많아졌습니다. 공공도서관에 가보면 서고에는 남성들만 있고(중고년의 경우) 문화강좌에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과거에 여성들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니 책 읽는 것은 어려워도 문화강좌야 충분히 소화해 낼 수 있기 때문이죠.

  더 중요한 것은 그토록 무섭던 시어머니가 힘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눈치 보며 가던 친정은 이제 당당히 갑니다. 살림을 조금 소홀히 해도 (예전에 비하면 1/4수준이지만 그래도 신경쓰이는)불호령이 떨어질 일은 없어졌습니다. 출가외인은 옛말이고 출가하면 더 친정이 그리워지니 제집 드나들 듯이 드나듭니다. 동창회는 이제 더 이상 눈칫밥을 먹을 필요 없이 참가합니다. 심지어 남자동창들과 어울려 남편에게 얻지 못한 만족감을 대리로 얻기도 하고 때론 그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옛날처럼 장바구니 들고 나가서 알리바이를 조작해야 할 필요도 그다지 없게 되었습니다.

  ’대리운전이 아닌 대리만족이 이토록 넘치니 남편의 효용은 예전같지 않습니다. 더 이상 그녀들은 여보 일찍 돌아오세요를 말하며 애절한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당신 아니라도 난 충분히 행복하니까 공연히 일찍 들어와 신경쓰게 하지 마라고 하는 마음으로 남편의 출근을 맞이할까요?

  그녀들이 가정에서 멀어지는 것과 대조적으로 남편들은 가정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사회가 그렇게 변하기 때문에 그들은 가정생활을 예전처럼 소홀히 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직장이나 사업체에서의 일이 끝나면 종종걸음으로 집에 돌아오는 남성들이 과거에 비해 늘었습니다. 돌아와서 가사와 육아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남성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비록 아내가 전업주부라도. 그런 좋은 남편이 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우리의 아버지들과 너무 대조적입니다. 아내들이   밖으로 돌게 된 공백을 그렇게 해서라도 메우려고 하는 것일까요?

남편은 부재중아내는 부재중이라는 말로 바뀌어 갑니다. 남편들은 가정으로 향해 가지만 아내들은 가정에서 멀어집니다. 살재로 가정에 머무는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이 떠나 것이지요. 그렇다고 멤버 체인지는 아닙니다. 여전히 가정주부는 대부분 여성이니까요

3. 부부의 유대관계가 깨지다. - 부부인가요? 동거인인가요?

  누군가 바람이 났다고 합시다. 그러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상이 배우자를 소홀히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이성에 대한 갖가지 욕구를 채워줄 상대가 따로 있는데 배우자가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평소에는 잠자리를 요구하던 아내가 갑자기 담담해집니다. 아내에게 다가와 밀어를 속삭이던 남편이 차가워졌습니다. 그런데도 뭔가 싱글벙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의구심이 생기겠지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냐고 물어봐도 시원치 않게 답이 돌아옵니다. 설마 나 바람나서 행복해하고 사실을 말할 수는 없겠지요.

   요즘 우리 아내들이 바람이 나서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남편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정에서도 멀어졌습니다. 집에 머물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녀들까지 멀리합니다. 방치되어 버린 아이들이 늘어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동학대도 늘어납니다. 왜냐하면 바람난 사람이 지신의 삶을 즐기는 것을 방해당하면 분노가 끓어오르기 때문이지요. 남편은 외면해도 좋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니 그 분노를 아이들에게 폭발시키는 겁니다. 요즘 아이들이 유달리 귀찮아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즐거움이 생기니 귀찮게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해되죠? 날씨가 추워져 오한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기에 걸려 체온이 올라가니 추운 것처럼.

  남편도 피해를 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처럼 밖에서 즐거움을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종종걸음으로 일찍 귀가를 하지만 아내는 남편에게 차갑기만 합니다. 예전처럼 아내와 아이들이 나와서 남편과 아빠를 맞아주는 풍경은 더 이상 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아이들은 제 방에서 컴퓨터하기 바쁘고 아내는 텔레비전 드라마에 빠져 있습니다. 남편은 벨이 아니라 비밀번호를 누르거나 열쇄로 현관문을 따고 들어와야 합니다. 그의 등장에 관심을 주는 것은 기르는 강아지나 고양이 정도라고 하네요. 그래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집이 늘어난 모양입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가정 나아가 부부의 모습이라면 너무 극단적인 표현일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큰 틀에서는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배우자외에 만족을 줄 상대가 있으니 배우자를 제1순위로 두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바람난 부부라 하겠습니다. 그 상대가 친정이든 친구이든 자녀이든 문화센터이든 상관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배우자와의 관계를 가로막는 것이라면 바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오해는 마십시오. 친구 친정 자녀 문화센터와 담을 쌓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우선순위이지요. 아무리 배우자가 중요해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배우자하고만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한 경우 부부 관계 자체가 위험해지거나 깨졌습니다. 몇 년 전에 죽은 유명 여배우의 경우 그녀가 결혼한 인기가수와의 결혼관계가 깨진 이유 중 하나가 둘이 항상 같이 다닌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24시간 함께 있으니 서로의 소중함을 모르게 되고 서로를 바라보게 되니 다툼이 생깁니다. 그런 식으로 함께 다니던 연에인부부들 중에 깨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배우자에게 찾게 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하지만 우선순위는 지켜야 합니다. 배우자외의 것과 배우자 간에 충돌이 생겼을 때 배우자를 최우선으로 해야 그것이 부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녀조차 그렇습니다. 자녀를 돌보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상태에서 선택을 해야 할 경우를 말합니다. 자녀가 아파서 누워있고 간호를 해야 하는데 배우자랑 수다 떨며 놀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상이 아닌 경우는 가족조차 외면해야 할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정상적인 경우라면 배우자가 남은 물론 자녀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식이라는 말을 아시죠? 정년 퇴직하고 집에서 세끼 밥을 먹는 남편(보통 남편이겠지요?)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물론 긍정적인 의미는 결코 없습니다. ’삼식이는 있어도 삼순이는 없을 겁니다. 만일 아내가 삼순이라 세 끼를 집에서 해결한다면 삼식이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아이들이 장성하고 나니 생긴 여유를 이용해 자신의 삶에 푹 빠져 사는 아내들에게 정년퇴직하고 집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남편이 귀찮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바람을 피우느라 배우자를 소홀히 하는 것과 같다고. 뭐가 다릅니까? 배우자 외의 것에서 만족을 갖게 되어 배우자를 소홀히 한다는 점에서. 그래서 졸혼이라는 것을 합니다. 결혼의 혜택은 누리면서 의무는 하지 않겠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되죠. 졸혼한다고 자신의 생활비도 자신이 버는 아내가 있습니까? 아마 드물겠지요. 생활비는 받고 남편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니 얼마나 영악합니까? 바람난 배우자의 모습이 이것이 아니면 뭡니까?

  일본에서 시작되어 우리에게도 전염된 이른바 정년이혼은 그러한 바람난 부부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정년이 되어 더 이상 남편에게 수입을 기대할 수 없으니 퇴직금과 연금을 반으로 나누어 본격적으로 바람난 상대와 행복하게 살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한 마디로 딴 살림차리겠다는 것이죠. 이런 것이 버젓이 행해지는 세상이니 결혼이니 가정이니 하는 것이 얼마나 값어치 없어진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4. 해결책은 오직 하나! 더 이상 바람피우지 말고 돌아오십시오.

  저와 아내는 외국유학생활로 신혼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힘들었지만 (결혼과 외국생활이라는 두 가지 낯설은 경험을 동시에 했으니)나중에 생각해 보면 가장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아내도 저도 그런 정신적 바람을 피울 여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내의 경우 더욱 그랬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친정식구들하고만 지낸 사람이 친정과 분리되었으니 남편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친정에서는 비교적 관심을 받지 못하는 처지여서 (6남매의 4)그녀의 관심은 온통 저에게 쏠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보낸 10년의 세월은 비록 어려움은 많았지만 아니 어려움이 있었기에 부부의 유대관계를 끈끈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교회를 다니고 교우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의지할 수 있는 친정도 시댁도 없고 친구도 없는(적어도 흉금을 터놓을) 상태이니 서로를 의지하고 또 우선순위를 배우자에게 두게 되었습니다. 두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내의 산후조리는 오롯히 저의 몫이었고 그 덕에 미역국을 눈 감고도 끓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함께 하는 육아는 부부의 유대를 강화시키는데 더 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죠.

  그런데 귀국하고 나서 이러한 호조건은 사라졌습니다. 아내에겐 친정이 다시 생겼고 친구도 많아졌고 문화센터도 생겼습니다. 저도 그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저는 밖으로 돌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아내의 순위는 점차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유학시절에 가졌던 끈끈한 부부관계는 해체되기 시작했고 그것을 알아차린 때는 이미 늦었죠. 그러면 그럴수록 둘은 대리만족을 할 상대를 늘려갔고 그것은 사태를 악화시켰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우선순위를 회복시켜야 했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대리만족을 늘리는 도피적방법을 택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바람난 상대에게 빠져서 부부관계가 잘못되었으면 바람을 멈추고 배우자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다른 상대를 계속 늘려 만족을 추구했으니 상태가 더 나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도 비슷한 짓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1순위로 살아야 하는데 자꾸만 세상에서 만족을 구하니까 우리와 하나님 사이는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과 담을 쌓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자신이 만족한다면 그것은 매우 바람직하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고 또 된다고 해도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니 세상을 즐거움음을 즐기더라도 최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면 되는 타협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세상 것이 싫어지면 하나하나 버리면 될 것입니다. 저도 그런 식으로 해서 세상과 멀어졌고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사랑을 더욱 뜨겁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배우자에 대하여서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를 제1순위로 하지 않는다면(하나님을 제외하고)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바람피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순위는 몰빵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최우선을 할 때는 하나님과 그것이 대립적으로 되었을 때 하나님을 위해 그것을 내려놓는 것을 말하듯이 배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와 다른 것이 (사람이든 무엇이든) 부딪힐 때 우리는 배우자를 우선하여 다른 것 사람을 내려놓는 결단이 필요할 것입니다.

  남편이 삼식이라 힘들다고요? 그것은 당신이 남편을 자신의 취미 친구 등에 비해 소중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녀라면 어떨까요? 그래도 외면하시겠습니까? 아마 그렇게 하지 못할 겁니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에게 자녀는 1순위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1순위도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부의 1순위는 하나님이지만 인간적으로는 배우자여야 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세기 2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194-6)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너무나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이혼을 하지 말라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부는 한 몸이니 나눌 수 없으니 서로를 1순위로 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몸을 남의 몸보다 우선시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배우자를 제껴두고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을 우선시합니까? 그것은 정신적인 불륜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이외의 것을 우선시할 때 그것이 무엇이든 우상숭배라고 하여 경계하고 있습니다. 돈이면 돈 명예면 명예 자녀면 자녀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영적 간음이라고까지 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한 몸인 배우자를 우선순위에서 밀어내고 다른 것 사람에게서 만족을 느낀 나머지 배우자를 후순위로 밀어버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영적불륜이라고 해야 할까요? 용어는 무엇이든 좋지만 이제는 남편과 아내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배우자의 위치를 점검하고 회개하고 돌아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렇지 못한 과거를 회개하고 있습니다. 유학시절 의지할 것이 없어 서로를 의지하고 그로 인해 1순위로 여겼던 배우자에게서 멀어져 다른 것을 사람을 만족의 대상으로 여겨온 자신의 과거를 회개합니다.

  삼식이가 싫으십니까? 그렇다면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세요. 남편이 사회생활엔 베테랑이지만 가정생활은 어린 아이 같으니 아내가 어머니가 되어 보살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남편이 삼식이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누리고 즐길 수 있게 안내역할을 해주면 결과적으로 아내도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당신의 취미 친구 자녀도 결코 남편에 대하여 우위에 놓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약과 신약에 관계없이 진리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이 땅의 부부들이 배우자를 1순위로 두고 존중함으로써 부부 나아가 가정이 처한 위기를 벗어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