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랑은 희생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희생입니다.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 하도다(룻기 3장 10절)
예전에 가출 청소년들과 지낼 때의 일입니다. 그 아이들은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유달리 이성에 대한 그리움과 집착이 강한 것 같았습니다.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으면 곧 뜨겁게 애정을 나누는데 때론 너무 진한 육체적인 관계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워낙에 피가 뜨거운 시기인데다 외로움 소외감 등이 겹치니 더 그럴 수 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그야말로 미숙하고 지극히 이기적입니다. 사랑의 대상에게 자신의 유익과 즐거움을 구할 뿐 상대에 대한 배려나 양보 희생은 찾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너무나 당연시 하고 있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여자 아이들에게 그것이 좀 더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신데렐라 드라마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서 여성들은 극진한 대접을 받기 때문이죠. 이것은 그 아이들이 나빠서라기 보다는 상황이 너무 힘들다는 것과 제대로 된 사랑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특히 후자가 중요한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나라 부모님들은 자녀가 사랑에 대하여 특히 남녀의 사랑을 배우는 것에 저항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배울 필요가 없고 때가 되면 알아서 안다고 한다는 편견과 어린 아이들에게 그런 사랑을 가르치면 도리어 그에 대한 호기심과 욕구를 자극시키기 때문에 되도록 언급을 자제하려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성교육에 대한 저항과 소극적인 태도와 같고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이성과의 사랑은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일까요? 물론 이성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은 나이가 어느 정도 차서 사춘기가 시작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성숙한 사랑은 절대로 저절로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사실상 성인남녀라도 제대로 된 사랑을 나누는 경우는 오히려 소수가 아닐까요? 대부분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미숙한 사랑을 하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으며 이는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영어나 수학과 같은 지식만 소중히 여기고 사랑과 같은 인간에게 매우 비중이 높은 삶의 요소에 대한 교육에는 무관심한 사회적 풍토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정방문 교사로의 경력을 많이 갖고 있는 저로서는 현장에서 그것을 실감했습니다. 아이하고 그런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 보면 가끔 부모님의 핀잔 아닌 핀잔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선생님! 그런 거는 나중에 다 알아서 해요.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라고. 이렇게 말씀 하시는 부모님이 (대부분 어머니들) 평소에 자녀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까요? 하더라도 잡담수준에 머물겠지요. 지지하게 나눌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면 이런 핀잔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아이들은 제대로 된 사랑에 대한 생각 태도 가치관을 가지지 못한 채 어른이 되고 맙니다. 그들이 사랑에 대하여 배우는 자료들이라고는 영화 드라마 소설(그것도 N소설 수준)친구나 선후배 등의 얄팍한 지식 등이 아니겠습니까? 영화나 드라마 소설도 훌륭한 자료가 될 수 있어야 하지만 요즘에 나오는 작품들은 대부분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환타지만 부추기는 것들이 대부분이라 도리어 왜곡된 사랑의 이해를 가져올 위헙이 매우 크니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재벌 2세나 왕자님 때론 임금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으면서 공주나 여왕대접을 누리는 드라마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는 철저히 잘못된 가치관을 주입시키고 있으니 차라리 안 보는 것이 나을 정도입니다. 남녀평등이 강조되는 세상에 아직도 신데렐라 이야기가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점령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자기의 일방적 이익을 위한 도구로 여긴다는 생각이 팽배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사랑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즐거움 쾌감 만족 자부심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는 왜곡된 애정관은 우리의 사회를 얼마나 멍들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남녀의 교제에는 물론 결혼과 출산 가정 생활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부작용을 가져온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중고년 부부들의 이혼이나 사실상의 이혼상태가 바로 이러한 왜곡된 애정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랑이 서로의 배려와 희생을 바탕으로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한쪽을 희생시켜 자신의 욕구 허영심을 채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가득한 데 어떻게 두 사람의 가정이 아름다운 사랑을 통해 행복으로 그려질 수 있겠습니까?
가출청소년들의 생각이 그저 갑툭튀는 아니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들이 보고 배운 사랑은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들의 부모 역시 그런 모습을 보이는데 어떻게 아이들이 이상적인 사랑을 할 수 있고 또 생각할 수 있단 말입니까? 콩 심은 데 콩 나고 가라지를 심은 곳에 가라지가 날 뿐입니다. 가라지를 심고 알곡을 거두려고 하면 될까요?
지금도 없어지지 않았지만 (아마 그럴 것입니다. 결코 사라지지 않겠지요)한 때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이른바 ‘원조교제’(청소년 성매매)가 왜 나타났겠습니까? 어른들의 왜곡된 가치관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첫째 돈이면 다 된다. 그러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을 벌어라. 또 하나는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있다. 성매매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 작용)남녀의 연애와 결혼에 돈이 개입되니(연봉이 얼마냐? 얼마나 예쁘냐? 성형수술하자 등등)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까? 결혼이 마치 성매매처럼 돈과 미모의 교환이 되는 풍조에서 돈을 위해 몸을 파는 청소년이 나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사실 청소년이라고 하지만 조선시대라면 모두 성인으로서 결혼도 할 나이 아닙니까?
이런 문제 때문에 오죽하면 미국에서는 ‘No Dating’(데이트 안 하기)운동이 기독청년들 사이에서 일어났을까요? 데이트가 연애가 자기중심적 쾌락주의의 도구가 되니 차라리 고전적인 방식으로 결혼을 하자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싶은 상대와 만나 서로의 의사를 타진하고 어느 정도 만남을 통해 그것을 확인한 뒤 결혼에 합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남녀의 사랑과 교제는 쾌락의 수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루는 준비과정일 뿐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서는 물론 교회에서 조차 쾌락지상적인 사고방식이 팽배하여 ‘즐길 것 다 즐기고 결혼하라’는 식의 생각이 거리낌 없이 들어와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청춘은 즐기기 위한 도구입니까? 몸은 즐거움의 도구가 아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즐거움을 다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즐거움이 몸의 중요한 존재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우리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며 즐거움은 힘든 인생에 활력소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목적인 냥 살면 방탕 타락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잘못된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고치기는커녕 ‘너도 즐겨’라는 무책임한 생각이 일반화된 느낌이 드는 것은 저 한 사람 뿐일까요?
서론이 지나치게 길어졌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참다운 사랑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실천하고 보여준 한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라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룻이라는 여성은 자신의 시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녀와 삶을 함께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3,40년 전의 우리사회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법한 이야기지만 오늘날에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제대로 공감할 여성이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의 여성들- 아니 전부라고 해도 좋을 것이지만-에게 룻의 삶은 악몽이거나 어리석음의 극치입니다. 희생과 섬김이 사전에나 있을 법한 세대에게 그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죠. 상대가 친부모라도 어려운데 하물며 시어머니 그것도 남편이 자식도 남기지 않고 죽었는데!
물론 이 이야기를 그대로 오늘날에 가져와 그대로 하라는 말은 저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지만 바람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룻의 마음가짐입니다. 그녀가 보여준 희생적인 사랑을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법은 달라도 마음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 동일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아스는 바로 그런 룻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룻의 나이는 아마 30을 넘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면 보아스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40은 넘었을 것입니다. 같은 나이차이라도 젊어서의 차이는 매우 크게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룻은 어머니에 대한 도리를 다하기 위해 그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과부라지만 젊디 젊었고 게다가 자식도 없는 그녀에게 선택지가 달리 없었겠습니까? 동서였던 오르바처럼 그대로 떠나서 새출발을 해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룻은 나이들 어 남편도 자식도 없이 홀몸으로 절망에 빠질 시어머니를 선택했습니다.
더 무슨 긴 이야기가 필요하겠습니까?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보다 적어도 사랑을 자기의 즐거움과 이익에만 집중시키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이 일반화된 우리 사회가 룻에게서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랑을 느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그것을 우리의 어린 아이들에게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훨씬 따듯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만드는 하나의 중요한 결단이 아닐까요?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생각을 적극 수용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