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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완벽하지 않아도 됩니다 ‘손 내밀기’

닥터 양 2022. 3. 23. 10:01

당신은 완벽하지 않아도 됩니다 손 내밀기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누가복음 195)

 

  1990년대라고 기억합니다. 제가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인데 한국뉴스를 일본신문에서 읽었는지 한국신문을 읽었는지 기억이 애매한데 어쨌든 일본 사람이 쓴 기사인가 컬럼이었습니다.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20년 이상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일간의 문화적 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은 우리 사회에서 일상화되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예전에 우리에겐 무척 낯익은 풍경입니다. 학교 교실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옆에는 그 반 아이 중 한 명이 서 있습니다. 아주 슬픈 표정일 가능성이 큼니다. 그 아이는 집안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선생님께서는 그 아이를 돕자고 말씀하십니다.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합니다. 그래서 비록 적은 액수지만 돈이 모여지고 때론 물건으로 마음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제겐 이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어요. 어려운 친구를 돕는 것이 왜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런 마음이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일본인 필자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돕는다는 것보다 어려운 형편을 공개하는 것이 그의 마음에 더 걸린 모양입니다.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모두의 앞에서 할 수 있는가? 제정신인가? 아이의 자존심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그는 열을 올렸습니다.

  저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데라는 마음에 한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저로서는 그런 비판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제가 여려서 늘 경험하던 그 일이 제겐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저는 그의 이야기가 이해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런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돕는 것보다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이 훨씬 중요해졌다는 점에서 우리도 그 당시의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된 것이죠. ‘송파 세모녀사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정보가 없어 그런 비참한 일이 일어났다고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물론 정보가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자존심보다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면 아마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그로 인해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모를까 왜 고작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가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 정도로 우리는 자존심을 소중히 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일본기자의 말처럼.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그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삶이 윤택해지면 가난이 죄가 되어 버립니다. 가난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사회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일본의 경우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치욕적인 불명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라고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아주 가난하던 시절에는 어느 정도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보다 빨리 선진국이 되어 풍요로운 사회가 되자 가난이 죄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본 기자의 글은 우리보다 훨씬 먼저 선진국이 되었기 때문에 쓰여진 것입니다. 아직은 가난한 우리와 일본의 시간차 때문이죠. 만일 두 나라가 비슷한 시기에 선진국이 되었다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동병상련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역으로 같은 병을 앓고 있지 않으면 상대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미도 되지 않겠습니까? 가난을 겪는 사회는 서로의 아픔을 잘 알기 때문에 상대를 비난하지 않지만 모두가 어느 정도 살게 된 사회에서는   은근히 그런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가난뿐이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인해 남에게 위로를 받거나 도움을 청하는 것이 뭔가 문제가 있거나 모자란 사람으로 비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도움을 받는 것은 물론 요청하는 것 심지어 그런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도 어렵게 됩니다.

 '힘드시나요?” 이런 말이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네가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보면 그런 말을 하는거니?’ ‘내가 그렇게 없어 보이니?’라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힘들어도 당당한 척 하다가 마침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흔해집니다. 우리나라 자살률이 선진국에서 1,2위를 다투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이런 문제도 제법 심각할 것입니다. 아파도 아프다고 할 수 없는 사회 그러기에 결국 혼자 고통받다가 조용히 목을 매야 하는 사회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위대한 분이 오셨을 때도 그런 현상은 일어났습니다. 니고데모라는 바리새파의 중요한 인물은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도저히 낮에 찾아올 용기가 없었기 때문인데 그나마 밤에라도 찾아온 것은 대단한 용기라 하겠습니다. 사회에서 명망 있는 지도자가 한낱 청년 사역자에게 조언을 구하러 찾아간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달랐습니다. 그는 세리장으로서 사회적으로 이미 고립된 사람입니다. 명예니 체면이니를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절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무에 올라 예수님을 바라본 것이죠. 예수님은 그런 그의 중심을 보시고 내려 오라 내가 너희 집에 머물리라 고 하는 당시로서는 폭탄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누구도 상대하고 싶어하지 않는 죄인을 만나는 것도 어려운데 그 집에 머물겠다니 놀랄만 하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살인마를 만난다고 해도 이보다는 덜 충격적일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라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삭개오의 처지와 결단이 가져온 위대한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삭개오만큼의 용기도 없어 남의 도움을 거부하고 어려움 속에서 죽어갑니다. 오히려 삭개오는 남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인물임에도 이런 용기를 냈는데 그보다 훨씬 덜 나쁜 사람들이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아니 죄가 적으니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자신은 의인이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사람으로 보이고 싶으니까 자기 정체를 감추려고 죽음도 불사(?)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결코 완전할 수 없으며 허물이 많아 지옥에 가야 할 죄인들입니다. 그러니 허물이나 죄가 있다고 한들 새로 것도 아니고 정죄되어야 할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완전한 존재처럼 여기거나 최소한 그렇게 보이려고 하니 힘들게 살아야 하고 예수님에게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받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가면을 벗을 수 없는 삶은 그렇게 고통을 배가하며 점점 꼬이게 됩니다. ‘송파 세모녀사건 같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자신을 완전하게 보이도록 강요하는 이 사회의 분위기에 슬픔과 분노를 느낌니다. 왜 우리는 연약하거나 무능해 보이면 안 될까요?

  어려분은 완전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죄인이니 감출 것도 꾸밀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자존심에 얽매여 자신을 괴롭히기보다는 모든 것을 스스럼없이 아뢰고 도움과 용서를 비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서로에게 격려나 조언을 주는 것이 배려 없는 행동(이른바 꼰대질로 여김)으로 여겨지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닐 것입니다.

  비교와 과도한 경쟁심으로 인해 자신을 거짓된 모습으로 꾸며야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실패한 사람을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포용하는 분위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울어도 좋아’ ‘실패해도 좋아실수할 수 있어라는 사고방식이 사회전반에 흐른다면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회가 되면 남의 조언을 쓸데없거나 심지어 배려없는 것이라고 폄하하는 일이 사라질 것이고 고통을 혼자 부여안고 죽어가는 비극도 조금은 줄어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인간을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고자 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죄인이라는 것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이며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할 때 비로소 해결이 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불완전함을 감춘다고 사람이 완전해 질 수는 없습니다. 삭개오는 그것을 인정했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매다는 어리석음을 범했죠. 진리를 인정하지 못하니 진리를 외치는 사람을 죽여 없앤 셈입니다. 하지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어느 정치가의 말처럼 부인하고 숨긴다고 해서 불완전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불완전함에 전전긍긍하시고 계십니까? 그것이 드러날까봐 노심초사하십니까? 예수님은 결코 여러분에게 완전함을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약함을 그분도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셨기에 잘 아신다고 히브리서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분의 손을 잡고 불완전함을 인정하시면 그분의 사랑으로 용서되고 완전함을 위한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부하면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서 멈춰서야 할 것이고요.

이것은 알콜중독자가 알콜중독에서 벗어나는 첫 걸음이 자신이 알콜 중독자임을 시인하는 것이라는 점과 같습니다. “나는 불완전한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은 여러분을 얽매고 있는 속박을 털어비리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고백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삶의 짐을 덜어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