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없는 자에게 하는 사랑 ‘하나님의 자녀’
쓸모 없는 자에게 하는 사랑 ‘하나님의 자녀’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장 40절)
세상은 힘 있는 사람들을 원합니다.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이 주위에는 늘 사람이 넘치도록 몰려 있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당선인 주변에는 구름떼같이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물론 후보시절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당선인이 된 후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 낙선한 후보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기는커녕 오히려 있던 사람들도 우수수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그것은 힘 있는 사람에게 뭔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되면 많은 임명직에 대한 임명권이 있으니 그런 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이 몰려들 수 밖에 없습니다. 정부가 하는 일은 방대하니 대통령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그로 인해 생기는 이익을 챙길 기회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래저래 힘있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은 힘없는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 보다 훨씬 이익이 되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가까이 교제하고자 하는 것도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을 가진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얼마나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하나님에게 축복을 받고 행복한 삶을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들었는지 헤아리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누구는 부자가 되었다 누구는 중병에서 놓임 받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부럽기도 하고 심지어 질투심도 느끼게 되고 ‘나도 받고 싶다’는 생각에 따라 해 보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복신앙’이라고 하며 비난하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신앙이란 원래 이런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요?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주 우상을 숭배하거나 여러 가지 패역한 짓을 하여 고난을 자초하였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하나님을 부르면서 울부짖었고 하나님은 그에 대하여 응답하시어 그들을 고난 가운데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유한한 능력 밖에 없기에 절대자인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게 되어 신앙이 성장하게 되면 점차 그러한 모습에서 벗어나게 되어 있으니 기복신앙은 높은 수준의 신앙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라고 에수님께서 말씀하셨고 그것은 당시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주변에 몰려온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을 때 이를 정확히 답한 것을 칭찬하시며 ‘네가 하늘나라와 멀지 않다“고 하신 에피소드는 그것을 증명합니다.
문제는 실천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이웃 사랑이 그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가를 지불할 의지도 능력도 확실하게 갖고 계시니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이미 언급한 대로 많은 이익을 가져오는 일종의 투자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인간에 대하여는 상대가 얼마나 힘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힘있는 사람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행태를 하나님은 기뻐하실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를 보살피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남성과 성인중심사회에서는 가장 비참한 약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성은 사회적 활동을 하기가 어렵고 아이는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남편이 필요한 것인데 이들에게는 어느 것도 없으니 자신의 삶을 지탱할 기둥이 없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그 사회에 기반이 없기 때문에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르는 존재입니다. 재판을 할 때 증인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위한 변론을 해 줄 사람이 적거나 아예 없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힘들고 괴로울 때 힘을 보태줄 사람도 상대적으로 적을 것입니다. 저도 이런 경험을 해 보았습니다. 유학을 하면서 저는 기반이 없는 해외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의 고립감은 매우 컸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저를 도와주는 분들이 생겼으나 아무리 그래도 본국에서처럼 편하게 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때서야 저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하나님과의 긴밀한 만남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런 것일까요? 돈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사랑을 받습니다. 얼굴이 예쁜 여자 돈이 많은 남자는 사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굳이 계명이랍시고 사람들에게 내리실 이유가 없겠지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분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행동을 보면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힘 있는 사람에 대하여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가 앞을 다투어 사랑하게 됩니다.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만이 아니라 일부러 하라고 하지 않으면 사랑받기 어려운 사람들은 세상에 널려 있습니다. 십계명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있어도 ’네 애인을 사랑하라‘ ’네 자식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그것이 덜 중요해서는 아닙니다. 애인을 아끼고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알아서 잘 하기 때문에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라‘는 가르침을 누가 하겠습니까? 아주 어린 아이에게라면 모를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웃 사랑을 언급하신 이유는 명백합니다. 고와와 과부 나그네를 비롯하여 사랑받기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부모님이 약자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은 그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들에게 도움을 주라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부모이겠습니까? 답정너입니다. 힘이 없는 부모이겠지요. 힘있는 부모라면 일부러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서 공경하고 사랑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 염소와 양의 비유‘는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였다‘고 한 것은 이러한 취지에서 볼 때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는 초라한 모습의 나그네를 대접하였는데 아마도 아브라함에게는 그들이 천사라는 인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평소대로 나그네를 도운 것인데 그것이 자신의 조카 롯을 구했습니다. 염소양의 비유에서 양으로 분류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고 영생복락을 누린 것은 의도적으로 그것을 노려서 작은 자들에게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도움을 준 것이 뜻 밖의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반대로 염소로 분류되어 지옥에 떨어지게 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사랑과 긍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무한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구체적으로 필요한 지를 성경은 일일이 가르치고 있지 않기에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이웃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염소로 분류된 사람들은 억울하고 양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결코 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중요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못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내 생각과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천국은 요령좋은 사람이 가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뭔가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서 천국에 가려면 이런 것을 다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외모란 눈에 보이는 형식적인 모습이고 마음은 진심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여러분이 진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외모가 다소 모자랄지라도 결코 구원에서 멀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으로 살아감으로써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