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다운 사랑 ‘말로는 부족할 때’
참다운 사랑 ‘말로는 부족할 때’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베드로전서 3장8절)
‘5가지 사랑의 언어’(게리채프먼. 생명의 말씀사)라는 책을 아십니까? 이 책은 세계적으로 천만부가 판매될 정도로 크게 인기를 얻었는데 봉사, 함께 하는 시간, 스킨십, 선물, 인정하는 말 이상의 5가지 사랑의 표현 중에 각자가 선호하는 것이 있으며 상대의 선호를 제대로 파악해서 제공해야 만족을 줄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가려운 데를 긁어야 시원하지 그렇지 않는 곳은 열심히 긁어도 만족하게 하기는 커녕 도리어 불쾌감만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장 원하는데 남편이 열심히 집안일을 도와주면서 함께 있지 않거나 남편이 스킨십을 원하는데 아내가 인정하는 말을 열심히 하여 그를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상대는 불만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으면‘이라는 말이 있는데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딴에는 배우자를 위해 열심히 노력을 했고 그래서 만 점짜라 남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내는 불만을 표시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배가 불렀군. 도대체 얼마나 해야 만족할 거야?‘라는 생각이 들어 저 역시 불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아마 그것은 아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원하는 것을 해 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헛다리를 긁은 셈이죠. ’그 때 이걸 알았으면 좀 더 나았을 걸‘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웠습니다.
부부사이보다 부모자식간에 이런 문제가 더 심각할지 모릅니다. 부모는 대개 자신의 방식으로 자녀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자녀는 그것보다는 다른 방식을 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우자와는 달리 부모는 그런 자녀의 마음에 관심이 없고 또 자녀의 불만에 귀를 기울일 생각도 상대적으로 적을 것입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내 말 들어!” 대개의 부모는 이렇게 자녀의 요구를 묵살하고 말지는 않을까요?
60이 된 저는 아직도 어머니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봉사와 선물을 선호하시지만 저는 인정하는 말을 절실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저를 위해 열심히 음식을 만드시거나 뭔가를 자꾸 주시면서 당신께서는 흡족해 하시는데 솔직히 부담스럽기까지 합니다. 마치 제가 늙으신 어머니를 착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대신에 저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이야기를 자주 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죠. “네가 잘 하고 있어” “넌 참 대단한 사람이야” 이런 말들 말이죠. 하지만 어머니는 칭찬에 인색하신 분이라 어렵습니다. 물론 저는 제 아이들에게는 칭찬을 많이 해주고 있습니다. 그게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서 받고 싶었던 사랑의 표현이었으니까요. 사람은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대접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제가 원하는 만큼 칭찬을 원하지 않는 것인지 생각보다 반응이 좋지는 않습니다. 행여 저도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고 가르치셨지만 이 말씀을 실천할 때도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꼭 상대에게도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의 마음을 알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에는 ‘고마운 민폐’라는 말이 있습니다. 객관적으로는 고마운 행위이지만 상대에게는 민폐가 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우리에게도 물론 이런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상대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것은 철저히 상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대를 중심으로라는 말은 꼭 상대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준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언제나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몸에 좋지 않는 인스턴트 음식이나 간식을 선호하지만 부모로서는 그런 요구를 무분별하게 들어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즘 부모들은 지나치게 자식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이런 것에 대한 주의나 절제가 부족하여 아이들의 건강을 손상시키는 경우가 예전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방문학습지 교사를 하던 시절 저보다 한 세대 정도 젊은 부모들의 모습에서 이러한 행태를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갸웃 거린 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방적인 사랑은 자칫 민폐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를 정죄하는 것은 더더구나 피해야 할 것입니다. 상대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자신의 기준에 맞추려고 하는 것은 참다운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만족시키려는 지극히 이기적인 행위가 아닐까요?
사도 바울은 신앙에 대하여 이러한 문제를 두고 많은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는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신앙이 아직 미숙한 사람들이 행위나 이야기를 정죄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의 미숙함을 당장 고쳐야 한다고 여겨 생각 없이 꾸짖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그럴 필요가 있을 때도 있겠지요. 하지만 미숙함이 곧 잘못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어린 아이 단계에 맞는 행동이 도리어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억지로 어른의 기준에 의해 고치려는 것은 발달단계 상으로 해가 된다는 것이죠. 어린 아기가 일어서지 못한다고 어른들이 세워 버리면 아이가 도리어 스스로 스는 능력을 키우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좋은 사례일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그분을 경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패역함을 보고 “차라리 제사를 폐하고 성전문을 닫아라”고 하시며 한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드리는 제사와 경배가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배는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는데 우리는 과연 얼마나 그 분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것에 맞춰 하고 있는 의문입니다 .이 또한 일방적인 사랑의 좋은 예가 아닐까 합니다. ‘내가 좋으면 되!’라고 하여 상대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참다운 사랑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욕심의 실현에 불과하겠지요.
오늘의 필자는 조금은 특이하게 배움을 얻고 있는 급우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앉아서 수업을 듣는 것보다 만지고 하고 하는 식으로 경험을 하여 배우는 것을 선호하기에 말로 하는 수업이 고역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것을 통해 ‘의심 많은 도마’가 사실은 단지 학습의 방식에서 경험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는데 우리가 그를 정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닌가 하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요.
톰 크루즈라는 유명한 배우가 있습니다. 그는 ‘난독중’ 환자이기에 활자를 읽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녹음한 것을 듣는 방식으로 대사를 외워 연기를 훌륭하게 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에게 대본을 스스로 읽어 연습하라고 강요했다면 그는 배우로서 성공은커녕 아예 배우를 할 수도 없었겠지요. 사람마다 각각의 방식이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톰 크루즈는 몸으로 보여준 셈입니다. 그것이 그에 대한 참 사랑이 아니었을까요?
필자의 말처럼 “사람들이 다앙한 방법으로 복음을 받아들일”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톰 크루즈 같은 사람이라면 문서를 주고 읽으라는 것보다는 직접 읽어주면 좋은 결과를 가지게 되겠지요. 바울이 말한 것처럼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미숙한 사람에게 인내를 가지고 성장을 기다려 주는 것이 참다운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감싸고 참아내는 것이라고 바울이 말했던 것은 아닐까요?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복음을 전하거나 형제를 사랑할 때 최선의 방법으로 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