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핍박은 믿음의 증거 ‘혼자가 아니다’

닥터 양 2022. 1. 7. 11:34

핍박은 믿음의 증거 혼자가 아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 장로님이 이런 간증을 하셨습니다. 보통 간증하면 자신이 얼마나 어떻게 하나님께 은혜와 축복을 받았는가를 증언하는 것이지만 이 분의 경우는 반대로 사도바울처럼 자신이 얼마나 믿는 자를 핍박하였는가 그것을 회개하게 되어 크리스천이 되었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런 것도 훌륭한 간증일 것입니다.

  공무원이었던 그분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주일에 특근을 하도록 지시했고 자신도 출근해서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같으면 휴대전화로 연락을 할 텐데 당시에는 휴대전화는 아예 없었고 유선전화도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연락을 할 방법이 없어 그날은 그대로 넘어 갔답니다. 월요일이 되어 두 사람이 정상적으로 출근을 하자 그 분은 그들을 불러 버럭 화를 내며 꾸짖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나오지 않은 거냐?”. 그들의 답변은 저희는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이 없었던 당시의 장로님에게 이 답변은 불난데 부채질한 것이 되었기에 한참이나 그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장로님의 질책을 견뎌야 했습니다. 마음 속으로 아마 기도라도 하셨을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흘러 장로님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신앙을 가지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분이 하신 일 중 하나는 주일성수를 위해 결근을 하신 그 분들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었답니다. “내가 그 때 잘못했네. 용서해 주게. ” 장로님의 진심어린 사과에 그분들은 눈물을 흘리셨답니다. 아마도 마음 속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리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스토리는 믿는 사람들에게 자주 일어나는 일상적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거나 왕따를 당하는 일을 경험하지 못한 분이라면 자신의 신앙생활을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디가나 안티세력들은 반드시 있으며 그들은 여러 가지 수단과 바법을 동원해 믿는 자들을 괴롭히려고 합니다. 그 뒤에는 바로 사탄이 버티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있던 일입니다. 저는 퇴근 시간이 되어 제 자리에 앉아 찬양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미 나가도 되는 시간이었지만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찬양을 틀고 이어폰으로 듣고 있었죠. 그러다가 감동이 되어 조금 따라 불렀는데 실수로 목소리가 조금 커진 모양입니다. 밖에 있던 사무직원분이 달려 왔다가 저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 날은 그렇게 지나갔는데 얼마 후에 책임자로부터 왜 찬송가를 부르셨나요?”라는 질책을 들었습니다. 이미 퇴근시간이 지났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일어난 해프닝인데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만일 제가 세상 노래를 따라했다면 그런 말을 들었을까? 아닐 겁니다. 고성방가를 한 것도 아닌데 더구나 이미 근무시간을 지났을 때이니 왜 문제가 되겠습니까? 아마 찬송가이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사탄과의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일을 통해 저는 저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결코 인간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임을 직감으로 느낌니다. 악한 영이 방해하려고 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 성묘를 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유달리 불효자라서는 아닙니다. 물론 제가 진짜 효자라면 어떻게든 성묘를 했겠지만 그 정도의 효심은 없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다른 가족들이 성묘를 늘 주일에 갔다는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히 토요일도 쉬는 사람들인데 왜 꼭 주일을 고집하는가 의아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교회나 성당에 다니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는데. 저 혼자 가도 되지만 위치가 대중교통도 없고 게다가 저는 운전면허도 차도 없는 사람이어서 그것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물론 핑계입니다. 가려고 굳게 결심하면 못 갈 곳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핍박이라면 핍박이라 할 수 있겠지요. 왕따에 가까울까요? 하지만 그로 인해 저는 성묘라고 하는 그다지 신앙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희 가족은 절하는 것을 강요하지 않기는 하나 그런 자리에 참가하는 것도 결코 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너무 자상하셨기에 생각 같아서는 매일이라도 성묘를 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러나 믿는 자가 돌아가신 고인의 묘에 자주 간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자에 대하여 어떠한 형식으로도 경배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비록 절을 하지 않아도 그곳에 가서 일정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 자체가 믿음과 반대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돌아온 첫 제삿날 저는 정말이지 아버지의 영정사진에 절하고 싶은 심정이 들었습니다. 사진으로나마 아버지를 뵙고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그렇게라도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살아서 제대로 된 효도도 못했으니 그렇게라도 해 드리면 나을까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R꾹 참았습니다. 죽은 사람은 제사상에 결코 참여하지 못합니다. 그곳에는 우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귀신 마귀가 들끓을 뿐입니다. 아무리 고인이 그리워도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어떠한 비난을 받더라도 견뎌야 합니다.

  불신자와 결혼한 경우 남자와 여자 어느 쪽이 신앙을 지키기 쉬울까요? 물론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하지만 확률적으로 남자보다 여자가 지키기 쉬운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남자들은 여자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하기도 하고 온갖 욕설과 비난을 퍼붓기도 합니다. 이러한 피박은 도리어 신앙을 강하게 해 줄 동기가 됩니다. “내가 순교할 각오로 견디리라라고. 하지만 아내의 경우는 부드러움으로 남편의 신앙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때론 눈물을 흘리거나 애교를 부리는 식으로 남편을 바꾸려고 합니다. 때론 남편에게 해야할 일을 태업하는 식으로도 저항합니다. 남자들은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한데 크리스천이라면 아마 더욱 그럴 것이니 이러한 저항은 남편의 마음을 흔들리게 합니다.

  이것은 부부사이에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저도 강한 핍박보다 부드러운 설득이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상대의 애처로운 호소는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제가 죄를 짓는 것 같아 외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 둘 씩 양보하다 보면 결국엔 신앙의 기초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전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공격에도 이겨내야 합니다. 친한 사람과 거리가 생겨 결국 헤어지거나 관계가 끊어지고 소원해질 각오를 경우에 따라서는 해야 합니다. 그 어느 것도 누구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기억합시다. 잠시의 편함을 위해 멸망의 길을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타협은 나와 상대를 파멸시키는 최악의 길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했다면 사도가 아니다라고. 그렇다고 그가 남에게 자신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내가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할례있는 자에게는 할례있는 자처럼 할례없는 자에게는 할례없는 자처럼 강한 자에게는 강한자처럼 약한 자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길을 가게 하기 위함이었다사도 바울의 삶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원칙에 대하여는 어떠한 반감을 얻더라도 조금의 양보도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모순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믿음에 있어서 양보는 곧 불신앙입니다.

  저 역시 전도를 위해 제가 원하지 않는 것도 했습니다. 술도 담배도 하지 않지만 술도 조금 마셔줬고 담배를 사주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교회에서 비난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제가 오명을 뒤집어 쓰더라도 하겠다고. 어느 전도왕 청년도 술과 담배를 주면서 전도를 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하나님에게 비난을 들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원칙에 위반되지 않는 한- 예를 들어 전도의 대가로 우상에게 절을 하라는 요구를 들어주거나 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겁니다. 그리고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원칙만은 결코 양보하지 마십시오. 예전에 어느 공익광고가 물의를 빚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맡겨도 피임만은 맡기지 마세요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광고는 우리에게 불편함을 줍니다. 그것은 혼전성관계를 합리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우리도 비슷한 말을 합시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해도 믿음의 원칙은 양보하지 마세요라고.

  혹시 불신자와 사귀고 계십니까? 그래서 결혼을 생각하십니까? 불신결혼이 죄라 마음에 걸리십니까? 방법이 있습니다. 믿음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고 그를 전도해서 신앙을 가지도록 하십시오. 그것이라면 불신결혼의 문제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설령 불신인 상태에서 결혼을 한다고 해도 꾸준히 전도의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 언젠가 그 열매를 맺도록 노력하십시오. 순교할 각오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눈물어린 기도를 외면하실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오늘의 필자도 크리스천으로서의 어려움의 하나로 소외 차별 등을 들었습니다. 살아서 하늘에 올라간 대선지자 엘리야 조차 그러한 소외됨과 고립 때문에 삶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을 할 정도입니다. 하물며 우리 같이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직접적으로 핍박을 하지 않아도 술을 권하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결정에 동참하도록 강요당하거나 하는 일도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견디기 쉽지 않는 고난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다고 선포하셨으니 그것을 믿고 나아갑시다. 주님의 승리는 곧 우리의 승리입니다. 그분   이 열어놓은 승리의 길을 우리는 걸어가야 하고 또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시고 죽음과 죄를 물리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길을 연 것이 됩니다. 그러니 담대하게 나아가 싸우시고 승리하십시오.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네 힘이 부족하니 주 권능믿으라. 복음의 갑주입고 늘 기도하면서 너 맡은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라”(‘십자가군병들아에서)

  예 그렇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성령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한다면 그것 역시 불신앙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처럼 스스로 수도를 해서 구원을 받도록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에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통해 구원받는 종교입니다. 아니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그 이름 외에 다른 구원을 위한 이름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여 나아가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하셨어요의 저자 정경주 사모는 모든 것에 대한 답은 하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어요놀라운 치유 은사를 가지신 홍예숙 사모는 불안할 때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그러면 답은 딸아 안심해라. 내가 했지 네가 했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내가 하지 네가 하느냐고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분에게 믿고 맡기며 나아가는 것 뿐입니다. 참 쉽지요? 저와 여러분이 주님께 믿고 맡기고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가 영적전쟁에서 늘 승리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