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하기에 자라나는 믿음 ‘크리스마스이브’
불확실하기에 자라나는 믿음 ‘크리스마스이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11장 1절)
작가 채만식 선생의 ‘레디메이드인생’을 아시나요? 저도 스토리만 알뿐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제법 뼈있는 이야기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비록 껍데기는 바뀌었지만 이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레디 메이드는 ‘이미 만들어진’이라는 의미인데 지금과 달리 맞춤옷이 일반적인 시대에는 기성복을 뜻하기도 합니다. 맞춤 옷은 자신이 마음대로 디자인이나 모양을 선택할 수 있지만 기성복은 이미 만들어져 나오니 선택의 폭이 상대적으로 좁습니다. 그렇지만 맞춤옷에 비해 신경을 덜 써도 되고 비용도 적게 드니 오늘날에는 대세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기성복을 구입함으로써 편안함을 느끼고자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채만식 선생은 공부를 함으로써 살게 되는 인생은 기성복과 같이 정해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이 말은 너무나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합니다. 그리고 태반이 대학을 가서 공부를 하며 취업을 준비합니다. 그들이 바라는 삶은 거의 비슷합니다. 사무실에서 정장을 입고 머리를 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락하고 비교적 수입도 높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배움은 기회를 주지만 그 기회는 생각보다 다양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특히 대학공부의 경우.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들을 공부시키는 대신 인쇄소에서 일하게 함으로써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탈출하게 합니다. 오늘날의 아이들과 달리 우리가 어렸을 때인 1960년대 또는 1970년대에 아이들은 다양한 선택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때로 배움을 통한 삶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글자 그대로 인생역전인 것이죠.
예전에 안산에서 거주할 때 어느 교회에서 저는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교회에는 인원수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에서 저 같은 외국 유학파까지. 그런데 놀라운 것은 대학졸업자들이 안정된 삶을 살고는 있지만 출세를 한 경우는 없었고 정작 사장님 소리 들으며 제법 잘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학력이 낮았습니다. 그들은 배운 자로서의 안정성을 추구할 여유가 없으니 사업을 일으켰고 그것이 성공해서 그렇게 인생역전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빌게이츠처럼 하버드 대학을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안정을 박차고 사업을 해서 대성공을 거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매우 드문일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오늘날처럼 대학이 누구나 다 가는 곳이 된 시대에서는 이러한 인생역전은 어려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대졸이 상대적으로 적은 우리 세대만 해도 그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안정적 삶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과거에는 그저 그런 직업이었던 공무원 교사가 최고의 인기직업이 되었고 거기에 간호사 약사가 과거에 비해 훨씬 높은 인기를 구가하게 되었을까요? 의사는 예나 지금이나 인기직업이지만 그 인기는 과거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제가 나온 대학의 경우 의대는 최고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어느 대학이든 의대는 최고의 성적을 가진 학생들만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과의 경우 전국의 의대가 모두 정원이 차야 비로서 다른 학과에 지원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서울대에서 이과 중에 가장 인기가 높았던 학과 의대도 약대도 아니고 물리학과였다고 합니다. 믿어지지 않죠? 공대도 의대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과우수생=의사지망생이라는 공식은 언제 생긴 것일까요? 이 공식은 다양한 인생보다 안정된 삶을 우선시 하는 우리사회의 풍토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가장 경악할 일은 어린 학생들조차 그들의 꿈의 리스트에 ‘건물주’를 올려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전에 ‘건물주’라고 하면 나이 먹은 꾸부정한 할아버지들이 노년에 월세를 받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생각했는데 지금은 ‘건물주’의 인기가 너무 높아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안정을 넘어서 무위도식하는 인생이 선망의 대상이 되다니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의문입니다. 사회가 발전을 하려면 도전정신이 투철해야 하는데 안정만을 추구하는 것도 모자라 젊은 시절부터 놀고 먹겠다는 생각부터 하니 한숨이 나옵니다.
이러한 풍토는 경제침체의 악순환을 가져옵니다. 도전이 사라지고 안정만을 추구하니 창업을 통해 고용을 늘리고 소득의 전체적 향상을 가져오기 어려워집니다. 건물주는 소득이나 고용을 창출하기보다는 이미 창출된 고용이나 소득을 이용하는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세계 경제사를 둘러보아도 부동산이 거품경제를 일으켜 경제에 결과적으로 큰 타격을 가한 일은 많아도 경제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 사례는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맞습니다. 부동산으로 돈을 벌어 경제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번 돈이 부동산으로 유입되어 거품을 경제에 일으키고 결국은 꺼져 장기간의 경제침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교훈은 제대로 활용된 적이 거의 없고 사람들은 여전히 투기를 주기적으로 합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을 보면 정말이지 활력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데 이는 바로 안정지향 나아가 불로소득 지향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내일이 보장된 인간이 도전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동산을 통해 놀고 먹자는 사람들이 모험을 할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 인생은 채만식 선생의 ‘레디메이드 인생’ 그 자체입니다. 불확실성을 최대한 배제해 버리는 인생은 반은 죽은 인생입니다. 노인과 같은 젊은이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일본에게 식민지 지배를 당했을까요? 일본은 사무라이 사회 우리는 선비사회였습니다. 우리는 내분이 적고 일찍이 국가적 통일을 이루었기에 무사의 역할이 제한적이었기에 사회가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국가적 통일이 약해서 결국 무질서한 사회가 되었고 그래서 무사의 역할이 커져 사무라이가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사무라이들의 사회는 언제 전쟁이나 피바람이 불지 모르니 긴장감이 흐르지만 선비사회는 안정되어 있으니 긴장감이 없습니다. 선비에게는 과거 시험 합격 =출세가 인생의 목표이며 그 외의 삶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사무라이에게는 그런 안정된 삶이 아니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살아야 하니 항상 긴장감을 가지고 도전정신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영업사원과 공무원의 차이 같습니다. 저는 영업사원과 같은 일도 해 보았고 공무원 같은 일도 해 보았습니다.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직장의. 영업사원들의 세계는 긴장과 도전이 넘치고 공무원의 세계는 안정과 무사안일이 지배적입니다. 제 제자 한 명이 공무원이 되었는데 1년이 지나니 사고방식 자체가 바뀌었습니다. 그토록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친구가 “세상이 어떻게 되든 관심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저를 안타깝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외친 변화는 결국 자신이 가진 자가 아니기에 느낀 상대적 박탈감의 결과였던 것 같습니다.
“불확실함과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소망과 믿음을 유지하는 제 노력을 상징”한다고 오늘이 필자는 말합니다. 무엇이? 크리스마스의 촛불이 말이죠. 크리스마스 촛불은 주님의 초림을 기다리는 마음을 상징합니다. 마라나타가 재림을 의미하는 것과 대조적이지만 결국은 같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간절함 바람(바라는 것의 실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 오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불확실성을 주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언제 오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기도할 필요 있나요? 적어지겠지요. 주님의 재림도 그렇지만 초림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때와 방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예언서들이 쓰여졌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했지만 때와 방법 장소는 언습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애가 타도록 그것을 기다렸고 그렇기에 기도하고 말씀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손선미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싶으신가요? 그럼 간절히 구하세요. 그렇지 않고 ‘주님 나타나실려면 나타나시고 아니면 마시든지’라는 자세로는 절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라 고. 간절함은 불확실성에서 비롯됩니다. 미래가 보장된 삶 아니면 정해진 삶 ‘레디메이드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바랄 수 없는 것이 간절함이겠지요. 그것은 꿈을 이룬 삶이 아니라 정작 꿈도 희망도 없는 삶이기도 합니다. 공무원이 되고 건물주가 된 사람에게 무슨 희망이 있고 꿈이 있어 간절함이 느껴지겠습니까?
살다 보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리는 시기가 있는데 그것이 과연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까요? 어떠한 긴장도 도전도 희망도 없이 매일 반복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삶을 활기있게 해 줄 간절함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결국 어떻게 될까요? 사치와 낭비 방탕으로 가지 않으면 다행일 것입니다. 일본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공무원들은 술이 얼마나 쎄냐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얼마나 인생의 목표가 없으면 술이 쎈 것이 미덕이 될까요? 그것이 한발 잘못 가면 글잘 그대로 방탕의 삶으로 빠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믿음이란 기다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기다림은 불확실함에서 비롯됩니다. 이미 날짜가 나와 알고 있다면 그것은 기다림이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르는 것을 기다리며 우리는 애타게 주님을 찾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믿음은 날로 날로 성장해 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기도응답을 늦추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술쟁이라 우리를 괴롭히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성장 믿음의 성장을 기대하시며 그렇게 하시는 것을 알고 그 분의 뜻에 따르는 것이 진정 성숙한 믿음이라 하겠습니다.
저도 반성을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스스로 기도를 통해 응답을 받는 것이 힘드니까 기도빨(?) 좋은 분들을 찾아가 묻는 일을 자주 합니다. 불확실성을 통해 믿음을 성숙시킬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 것이죠. 하나님의 마음을 아직도 모르니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합니다. 앞으로 이러한 악습(?)에서 벗어나고자 애쓰겠습니다. 불확실함을 무기로 여기고 주님의 사랑을 그것에서 느끼면서 차분히 그러나 간절히 기도와 간구를 통해 착실히 믿음을 키우는 길을 가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불확실함을 주님이 주신 선물로 여기고 감사하면서 간절함으로 응답을 기다리면서 믿음을 성숙시킬 수 있는 ‘참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