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위대한 사랑의 힘 ‘공간 만들기’

닥터 양 2021. 12. 23. 17:55

위대한 사랑의 힘 공간 만들기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에베소서 432)

 

  저의 신앙의 멘토 손선미 선교사님의 계시록 강의 도중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예수님만 강조하다 공의의 예수님을 소홀히 하면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항상 선교사님의 말씀에 격하게 공감하며 아멘을 외치던 저이지만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인데 사랑이 죄를 부른다니 자칫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죄의 용납이라는 공식이 성립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선교사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지는 이해가 갑니다. 계시록 앞 부분에 나오는 7개 교회에 대한 주님의 질책을 소개하면서 그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7개 교회 중에 5개 교회에 대하여 엄한 질책을 하시고 계십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다” “첫 사랑을 버렸다” “이단을 용납하였다등등으로 그들의 과실을 문책하시는데 선교사님은 이를 통해 공의의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고 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셨죠? 신앙에도 균형이 필요합니다.”라고 하십니다. 행여나 사랑을 면죄부로 여기고 죄에 대하여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할까 염려되어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예수님은 정말 죄를 용납하거나 심지어 조장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물론 1도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지나친 관용이 때론 잘못에 대한 반성을 소홀히 하게 하여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음은 우리 모두 경험해 본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죄를 조장하는 것이 될까요? 그보다는 때와 방법에 따라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봐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로마서 1220)라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 39)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3- 4)고 하셨고요. 이 가르침들이 죄를 방조하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까요? 공의의 가르침과 균형을 맞춰야 비로소 진리가 될까요?

 그렇다면 이들의 말씀은 반쪽 진리가 될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그런 가르침을 주는 경우가 있었을까요? 제가 과문해서 그런지 그렇게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거나 그를 위해 기도하거나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가르침이 문제를 일으킬 이유는 없겠지요. 하지만 설령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고 해도 손 선교사님이 말씀하시는 일이 일어나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는 말을 하여 그녀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한 군중을 해산시켰습니다. 그러자 나도 네 죄를 정죄하지 않겠다. 그러니 평안히 가라. 그리고 죄짓지 말라고 하며 간음한 여인을 보내셨습니다.

  그럼 그녀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세! 이제부터 더 많은 간음을 즐길 거야. 어이 남자들아! 어서 와라. 난 예수님에게 간음을 공인받았으니 얼마든지 해도 좋아.” 이렇게 외치며 간음죄를 계속 지어갔을까요?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제정신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녀가 돌에 맞아 죽었다면 아예 그 후의 일은 생각하지 못하겠지만 만약 돌에 맞고 생명을 건졌다면 진심으로 회개하고 죄에서 벗어났을까요?

  이것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다른 사례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은 소설 레미제라블을 알 것입니다. 주인공 장발장으로 더 유명한 빅톨 위고의 이 명작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줍니다. 빵 한 조각 훔쳤다고 19년을 복역한(엄밀히 말하면 절도 +세 번의 탈옥시도)장발장은 세상에 나와서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돈을 주어도 식사를 할 수도 잠자리를 마련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은 그를 분노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신부 미리엘 주교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서 그것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새롭게 태어나서 마들렌이라는 이름으로 성공하여 시장에 당선되기까지 합니다.

  그런 장발장을 괴롭힌 사람이 바로 자벨경감입니다. 그는 공의를 유일하고 지고한 가치로 아는 사람이기에 장발장을 끝까지 추적하여 그를 감옥에 재수감 시키려고 발버둥 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장발장이 보여준 관용과 사랑에 혼란을 일으키고 자결하고 맙니다. 자신이 믿어온 공의가 최고가 아니라 사랑이 더 위대함을 알게 되자 삶의 중심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킨 여인이 어떤 행동을 했을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머리에 숯불을 얹는다는 것은 상대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관용에 그만 감격해 진실로 회심하게 됩니다. 만약 아버지가 그를 호되게 꾸짖었다면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지만 마음 속으로는 내가 돈을 벌면 그 때 봅시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도 돌을 맞고 돌아갔다면 재수없게 걸려가지고. 다음에 더 조심해야지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이 그녀를 부끄럽게 했을 것이기에 다시는 죄짓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것입니다.

  중국에서 법가와 유가의 싸움은 결국 유가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유가는 인의를 근간으로 하는 점에서 기독교의 박애정신과 유사한 교리를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는 엄한 벌로 다스리는 것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공의를 유일한 가치로 한 자벨경감의 삶을 국가적으로 실현하는 사상입니다. 법가로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불과 3대 만에 망했지만 유가를 이념으로 한 한나라는 400년을 이어갔습니다. 세계최대의 강대국 몽골제국은 중국을 지배한 지 100여년만이 쫓겨나게 되었는데 그들의 통치는 법가에 가까웠습니다. 이솝은 그의 우화에서 바람과 햇빛의 대결에서 부드러운 햇빛이 승리했다고 합니다.

  저의 개인적 경험을 이야기 하죠. 예전에 저의 자식들이 어려서 층간소음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아들은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할 때 딸들이 걸어 다니거나 뛰어다니는 소리에 아래층에서 제법 항의가 날아온 모양입니다. 물론 우리 딸들이 유난히 소음을 낸 것은 아닙니다. 여자 아이들이라 그렇게 심하지 않았지만 아래층 부부에게 아이가 없으니 그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저는 그 때 유학을 하고 있었는데 처와 아이들을 먼저 귀국시킨 상태에서 가끔 찾아오곤 했는데 마침 제가 있을 때 아내와 아래층 남편 분끼리 그 일로 인해 작은 다툼이 벌여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때 제가 나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아이들을 좀 더 통제를 해야 하는데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라 쉽지가 않네요. 여자 아이들이라 그렇게 심하게 뛰지는 않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신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도 노력할 테니 조금만 양해를 바랍니다.” 아마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상대는 말없이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로 다시는 항의를 하러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이 경우는 저희가 잘못한 것이니 마땅히 사죄해야 했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내로서는. 제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 것인데 그것이 최고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저는 그 때 부드러움이 이긴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비슷한 경험이 또 있습니다. 택시를 탔습니다. 목적지를 말하고 저는 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는데 그만 전혀 엉뚱한 곳에 도착해 있지 뭡니까? 그곳은 제가 알지도 못하는 곳인데 기사님은 제게 그곳에 가자고 했다고 합니다. 말한 사람이 모르는 곳에 가자고 할 수 있습니까? 결국 다툼이 벌여졌습니다.

  그러다 예수 믿는 내가 이러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들어 사과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이야기를 했는데 화를 냈습니다. 용서하십시오라고 하자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잘 못 들은 것 같네요라며 기사님은 도리어 저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우리는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내릴 때 저는 시간을 낭비하셨네요. 죄송합니다.”라고 하며 나온 금액의 두 배 가까운 요금을 지불하고 내렸습니다. 기사님의 얼굴은 환한 미소로 가득 찼고 연신 고개를 숙이셨습니다. 그로 인해 그날은 일이 너무 잘 되어 두 배 낸 것이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필자는 우리가 갖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쓰라림, 분노, 억울함 등)을 비우고 긍정적인 감정(사랑과 친절 등)을 흐르게 할 공간을 만들라고 합니다.‘밥퍼의 저자 최일도 목사님은 컵에 더러운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아무리 흔들어도 문제는 해결 되지 않으니 새로운 물로 그것을 흘려보내라고 합니다. 비슷한 생각입니다. 생수가 공급되면 더러운 것은 저절로 흘러 나갑니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몸소 느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장발장이 미들렌 주교에게 느낀 사랑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에게 베푼 용서와 사랑 그것이 장발장이나 간음한 여인에게는 머리에 얹힌 숯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저의 사죄가 아래층 사람 그리고 기사님에게 그런 역할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은 결코 그 자체로 죄를 방조하거나 조장하지 않습니다. 삭개오의 회심은 예수님이 그를 멸시하지 않았기에 일어난 기적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도 그렇습니다. 위대한 사랑은 악을 선으로 바꾸는 기적을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매와 사랑을 적절히 균형있게 사용해서 효과를 보시는 얍삽한 전략가가 아니라 위대한 사랑의 실천자였기에 오늘날까지 인류의 스승으로 존경받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위대한 사랑을 마음에 흐르게 함으로써 삶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여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