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으뜸이다 ‘사랑에 뿌리가 박혀’
사랑이 으뜸이다 ‘사랑에 뿌리가 박혀’
너희가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에베소서 3장 17절)
인터넷 한가족 교회를 들어보셨나요? 조금 특이한 이름입니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이기와 한 가족이라는 조금은 전통적인 느낌의 단어가 하나가 되어 있으니 눈에 확 뜨이네요. 아마 인터넷이라는 문명의 이기로 세계가 연결되어 있으니 전 세계를 대상으로 선교를 하겠다는 뜻이 엿보입니다.
이 이름은 교회의 담임사역자인 손선미 선교사가 주님에게 받은 지시를 바탕으로 지어졌습니다. 원래 이름은 한가족 교회였습니다. 한가족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교회만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 불신자 이교도를 포함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은 것이다. 너희는 불신자 이교도를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사랑하라”
여기서 한가족은 신자는 물론 불신자 이교도를 모두 포함한 인류 전체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신자도 이교도도 한가족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여야 하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하며 자신을 핍박하고 죽인 사람들을 사랑으로 용서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인데 그것이 끼리끼리의 사랑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이른바 ‘박애(博愛)인 것입니다. 따라서 손선교사가 들은 음성은 특별하다기보다는 당연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러한 사실을 망각합니다. 교회 성도들끼리 사이좋게 교제하고 친분을 쌓는 것은 신앙을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한 것이기는 합니다. 세상에서 살다보면 피곤한 일도 고통스러운 일도 많은데 믿음으로 하나 된 교회 성도들끼리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돈독하게 해 줍니다.. 사도신경에는 ‘성도가 서로 교통 하는 것과’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것은 성도의 교제의 소중함을 잘 말해줍니다.
하지만 자칫 우리는 성도끼리의 사랑에 집중하여 불신자 이교도를 멀리 하거나 소외시키고 때론 적대시할 수 있습니다. 저와 함께 신학교를 다닌 목사님이 신천지와 대화를 하다가 “너희들은 지옥에나 가라”고 하셨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무척 놀랐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는 물론 이단이라 할지라도 잘못된 가르침을 비난할지언정 사람을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싸울 것은 육체 아니요”라는 찬양은 그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종교전쟁처럼 부득히 혈과 육의 싸움도 필요할지 모르나 그것은 극히 예외적이라 하겠습니다. 이단이나 사이비에 빠진 형제자매 역시 우리가 보듬어야 할 대상이지 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죠.
물론 성경에는 이단에게 단호하게 대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심지어 집에 들이거나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하는 것이지 그들을 적으로 대하라는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저에게는 신천지에 빠진 지인이 있는데 저는 그분을 위해 기도할지언정 적대시하지는 않습니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야지요. 이단의 괴수라면 모를까! 이단의 괴수라도 할 수만 있으면 그를 사랑으로 품어주어 회심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매우 위험하니 함부로 나서지는 마십시오.
오늘의 필자는 자주 이사를 다닌 분입니다. 이사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뽑는 아픔을 동반합니다. 물론 아주 짧은 거리(같은 아파트 단지의 다른 동이라든지)를 이동할 때는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혀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당장 이웃은 바뀔 가능성이 매우 크니까요. 우리처럼 이웃과의 관계가 소원한 경우는 몰라도 그렇지 않는 곳에서는 큰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필자는 사랑에 뿌리가 박혀 있으면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교도 불신자 이단 등을 대할 때 사랑으로 대하면 겁을 내거나 미워할 일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믿음이 다르면 대립과 충돌이 발생하기 쉬운데 그것을 이겨내는 박애정신이 충만한 사람에게 같은 믿음을 가진 새로운 이웃을 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마음 그대로 대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다양성의 표현일 뿐이라는 이해와 함께 사랑으로 대하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고 ...”라는 고린도 전서 13장에 나오는 유명한 사랑의 정의입니다. 이것을 결혼식에서 노래로 부르거나 결혼 비디오의 빼 경음악으로 삽입시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잘못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내분(교리, 파벌 등에 의한)으로 일어난 혼란에 대하여 자세히 답변을 하며 이 모든 해결책의 끝판은 사랑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13장을 썼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남녀 간의 달콤한 사랑이 아니라 지극히 이성적인 형제애 나아가 박애정신을 말합니다.
바울 자신이 그러한 사랑의 실천자였습니다. 그는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행동하고 할례 있는 사람들에게는 할례자로 할례 없는 사람들에게는 무 할례자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내려놓는 눈물겨운 사랑의 실천이었죠. 누구나 자존심이 있고 자기 생각이 있는데 바울은 그것을 사랑을 위해 포기하고 상대에게 믿음을 전하고자 애쓴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내분에 대하여도 마찬가지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서로가 각자의 생각이 있으니 다툼이 일어나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가족이니 사랑으로 대하면 해결 못할 문제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 이단 이교도조차 주님은 한가족처럼 대하라는데 하물며 믿음의 형제자매끼리 사랑으로 감싸주지 못할 일이 어디 있느냐는 외침이었습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서 사랑장의 핵심은 바로 ‘오래 참고’ ‘감싸주고’ ‘온유’ ‘참아내고’ 즉 ‘인내’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내려놓는 결단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감정이 아니라. 달콤함에 취하기 쉬운 이성애에서는 발휘하기 힘들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이 사랑을 모든 사랑에서 발휘하기를 바랍니다. 부부간이라도 형제자매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이와 같은 사랑에 뿌리를 내린다면 해결 못할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웃과 세계로 뻗어나간다면 전쟁과 파괴 빈곤 기근이 없는 세계를 만드든 것도 꿈은 아닙니다.
현대의 사랑은 인내를 잊고 담콤함에 치우쳐 버려 가치를 상당 부분 잃었습니다. 부부라도 가족이라도 친구 사이에서도 인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이 깨지고 무너져 결국 사회가 어두워집니다. 최근 코로나 사태로 힘들다는 이유로 서로를 공격하는 움직임이 보이는 것은 바로 인내를 잊은 사랑이 낳는 폐해가 아니겠습니까?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바울은 말했지만 우리는 “사랑은 오직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원리로 무장한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그저 탐욕의 포장지에 불과할 뿐이라고 믿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전서 13장의 말미에서 “사랑 소망 믿음은 영원하거니와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고” 할 때의 사랑은 그러한 사랑은 절대 아닙니다. 달아도 써도 삼키면서 견딤으로써 사랑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사랑이야말로 그가 말한 그리고 하나님이 가르치시고 예수님이 몸소 실천하신 사랑인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사랑은 바로 그 사랑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이러한 모습과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세상은 사랑이 넘쳐도 불행해집니다. ‘넘치는 사랑 불행한 대한민국’이라는 저의 책은 이러한 면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결혼식을 할 때 이런 맹세를 합니다. “신랑(신부)은신랑(신부)는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행복할 때나 불행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신부(신랑)를(신랑)을 아끼고 사랑하겠습니까?”라고. 모두가 “예”라고 답을 하지만 막상 괴롭고 불행하고 아프면 사랑이 식어버립니다. 처음부터 인내가 아니라 달콤함만을 원하며 결혼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에 주례가 사라지고 파티처럼 흥겨워지고 있는 것은 결혼의 신성함과 그 무게를 인식하지 못한 채 달콤함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는 아닐까요? 그것은 사랑의 신성함의 실종이기도 합니다.
결혼=고생 끝= 행복 시작이 아니라 무거운 책임을 진 여정의 출발임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결혼식이 화기애애하고 흥겹기만 해서 될지 모르겠습니다. 과거처럼 눈물을 흘리고 상기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비단 결혼과 부부의 사랑만이 아니라 모든 사랑에게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달콤함만 주려고 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부모는 때로 쓴 약을 먹일 줄 알아야 자식을 바르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사는 학생에게 그렇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아프지만 그것을 ‘인내’할 줄 알아야 참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달콤함과 아울러 신성함 인내를 함께 동반하는 참다운 사랑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