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자리에서 ‘공항에서 ‘갇혀’’
지금 이 자리에서 ‘공항에서 ‘갇혀’’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예레미야 29장 7절)
세계 최고의 명문대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하버드대학교 도서관에(장소에 대한 기억이 애매하지만) 이런 글귀가 붙어 있다고 합니다. “당신이 허비하고 있는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원하던 내일이다” 소름이 끼치는 말입니다. 아마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잠시라도 마음을 놓을 것을 경계하게 하기 위한 경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문구는 얼마든지 패러디를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낭비하고 –또는 버리고- 있는 음식은 어제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이 그토록 원하던 생명의 양식이다” “지금 당신이 낭비하고 있는 돈은 어제 파산한 사람이 그토록 바라던 사업 자금이다” 등등...이런 식으로 만사를 생각한다면 무척 피곤하기도 하겠지만 삶을 반듯하게 살 수 있는 동기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이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라고 요약해야 할까요?
저는 어디를 가든지 늘 가방을 가지고 다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빈 손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지만 일본에서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드물었습니다. 물론 저는 일본에 유학을 가기 전에도 그랬으니까 특별히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입니다. 저는 일단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책이나 잡지 신문을 보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고 또 간식을 좋아하며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니 그에 필요한 책, 간식, 오디오기구를 넣고 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안 하며 멍하니 서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필요없겠지요. ‘저 사람들은 재주도 좋다. 아무 것도 안 하고도 잘도 시간을 보내네’라는 생각이 들곤합니다. 어느 쪽이 정상일까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물론 저라고 늘 그리고 예전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때론 멍때리는 모습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니기도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노래부르는 것을 좋아해서 가끔은 노래 부르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예전에 제가 다니던 대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다닌 적이 있는데(집 앞에서 타면 한 시간 정도 걸려 학교 앞에 도착)지하철 공사로 시간이 때론 두 시간 이상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럼 저 혼자 리사이틀(개인공연)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좋아하는 노래를 혼자 작은 소리로 주구장창 부르다 보면 어느덧 학교에 도착하더군요. 시간 때우기에는 최적이었습니다. 버스는 흔들림이 심해 책을 읽는 것이 쉽지 않기에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러한 사소한 집중이 가져온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도서관이나 서재에서 책을 읽을 때보다 버스나 지하철에서의 독서는 보다 큰 효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독서량은 적지만 깨달음을 시간 대비로 훨씬 많이 주었기 때문입니다. 주변의 환경이 계속 변하는 가운데에 독서가 주는 지식이 그것과 어울려 신선한 아이디어를 주기 때문입니다. 노래부르기는 제게 남보다 뛰어난 노래실력을 선사했습니다. 물론 다양한 레퍼토리는 덤이고요. 클래식에서 팝송 대중가요에 이르기까지. 예전엔 버스에서 끊임없이 라디오를 틀어놓았기에 자연스럽게 대중가요를 익힐 수 있었습니다. 그때만해도 대중가요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저이지만(이거 욕먹을 소린가요?)덕분에 웬만한 유행곡은 다 익혔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저로 하여금 ‘일촌광음(一寸光陰)이언정(不可輕)’(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를 갖게 했습니다. 제 가방은 점점 부피가 커졌지만 그것을 무겁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언제 어떤 때라도 시간을 유용하게 보낼 준비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스마트폰이라는 매우 편리한 도구가 생겨 시간을 때우기가 쉬워졌지만 저는 스마트폰을 그다지 보지 않고 대신 많이 듣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스마트폰은 고맙기 이를 데 없는 도구입니다. 예전에 그것이 없을 때는 작은 파우치가방에다 카세트 테입을 가득 담아서 가지고 다니면서 휴대용카세트 플레이어(이른바 ‘워크맨’ 우리 식으로는 ‘마이마이’)에 넣고 들었습니다. 자리에 앉으면 책이나 신문을 볼 수 있지만 그렇지 못 할 때 똔느 걸어다닐 때는 오디오가 최고니까요. 스마트 폰은 그냥 곡을 검색해서 찾으면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 저같은 음악매니어에게는 하늘이 주신 선물이지요. 덕분에 돈도 절약되고.
별로 돌아다니지 않는 사람이지만 어쩌다 돌아다니게 되면 가슴이 설레입니다. 돌아다니며 음악을 듣는 음악을 더 달콤하고 책은 더 흥미로우며 부르는 노래는 더 감동적입니다. 예전엔 길에 다니면서 콧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일본에 가니까 아무도 길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아 신기했는데 우리도 지금은 그렇게 되었으니 아마 선진국이 되면 그렇게 되는 모양입니다. 왜 그럴까요? 더 잘 살게 되었으면 콧노래가 더 나올텐데. 하지만 저는 지금도 나오는 것을 보니 아직 정신수준이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나 봐요. 제겐 길을 걷는 시간도 아까운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 뿐인데.
예전에 정말 열심히 노래연습을 할 때는 일부러 시끄러운 길을 걸으면서 노래연습을 했습니다. 서울의 한강의 강변도로는 매우 시끄러워 곁에서 이야기를 해도 잘 안들릴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소리를 질러가며 노래연습을 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겠지요. 그렇게 해서 연습을 하다보면 제 노래소리가 잘 들려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제 목소리가 트여서 제대로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그럼 어느 정도 하고 연습을 마무리 합니다.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제법 노래 꽤나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죠. 물론 그것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고 그저 남들 눈치 안 보고 마음껏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것인데 생각지 않는 보너스가 생겼네요.
이렇게 살다 보니 저는 ‘심심하다’는 말이 나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심심할 틈이 없습니다. 시간만 나면 가방에서 이것저것 꺼내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을 하니까 그렇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직장을 다닐 때에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짬이 날 때 열심히 뭔가를 하게 되더군요. 직장을 다니지 않을 때는 시간이 널널하니 절실하지가 않은 데 직장을 다니면 그런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심심할 수 있을까요? 책도 없고 스마트 폰도 없으면? 노래를 부르거나 기도를 하거나 생각을 하면 시간은 자연히 흘러갑니다. 그것은 평소에 쌓아둔 것이 마음에 가득하니 그런 것은 아닐까요?
이런 삶의 단점은 명백합니다.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것이 그다지 즐겁지 않게 된다는 것이죠. 물론 목적이 확실하게 있는 경우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제가 필요해서 누군가를 만나거나 그 사람과의 만남에서 의미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오히려 더 만나고 싶어집니다. 저는 교회를 이곳 저곳 기웃거립니다. 섬기는 교회는 있지만 인터넷으로 또는 직접 찾아가 다른 교회 예배나 집회에 참여합니다. 참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기도 합니다. 그럴 때의 만남은 꿀같이 달콤합니다.
제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목사님 중에 서숙희라는 분이 있습니다. 천국에 14번이나 다녀오셔서 그것을 간증하는 ‘3층천의 비밀’(하늘출판사) 이라는 책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분이 사역하는 ‘예수님의 교회’에서는 부흥회를 자주 열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목사님이 문자를 보내주십니다. 그럼 ‘이게 웬떡이냐’하며 달려가는데 부흥회 그 자체도 좋지만 끝나고 함께 나누는 교제에서 은혜를 나누는 시간도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부흥회를 다녀오면 꼭 굵직한 기도응답을 받거든요. 이런 모임이라면 얼마든지 가도 수지가 맞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은 만남은 꺼려집니다. ‘시간 낭비’처럼 여겨지기 때문이죠. ‘이럴 시간 있으면 책을 더 보겠다.’ ‘기도라도 더 하겠다’ ‘찬송이라도 부르겠다’ ‘신문이라도 읽겠다’ 등등. 심지어 가족과 함께 수다떠는 시간도 때론 아깝게 느껴지죠. 정말 문제가 아닙니까? ‘오타쿠’우리말로 ‘덕후’적 인간이 되어 버리죠.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하루 종일 들을지언정 남과 원하지 않는 교제에 한 시간도 쓰기가 아깝다는 것이니 사회생활에 지장이 생기겠지요?
신앙적으로 볼 때 이것은 전도에 큰 장애가 됩니다. 남들과 어울려 때론 쓸데없어 보이는 대화에도 적극 참여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니 전도를 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죠. 전도법도 꽤 공부했고 실제로 하기도 하지만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쩌다 전도하고자 하는 사람과 대화를 많이 나누고 그래서 그 사람의 신뢰를 얻으면 전도가 저절로 되더군요. 그런 결과를 알면서도 여전히 대화를 꺼리는 제 자신이 조금은 밉기까지 합니다. “많이 말을 들어주고 잘 대응하면 전도가 된다”는 전도교과서의 가르침을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아는데(책을 많이 읽으니까) 실천에 옮기기가 너무 어려운 것은 저의 이런 삶의 방식 탓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새로운 전도법을 시작했습니다. 가방에 신앙서적이나 간증서적을 넣고 다니며 필요할 때 나눠주고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는 이 방법으로 재법 재미를 봤습니다. 물론 전도의 열매가 얼마나 맺어졌는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책을 주면서 접근하거나 대화 중에 책을 주어 관심을 끄는데는 어느 정도 성공를 했습니다. 심지어 지나가던 사람이 제 책을 보고 이야기를 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럼 바로 주면서 대화를 유도하곤 했습니다. 지인에게 책을 보내주어 흥미를 갖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요. 그렇게 밑밥을 깔아놓고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면 제법 대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씨앗을 뿌렸고 그다음에 할 일은 그 사람이 믿기를 열심히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덕분에 중보기도 리스트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서 무척 행복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주실 축복도 늘어나고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나 즐겁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필자는 뜻하지 않게 생긴 공항에서의 16시간을 섬김과 전도로 채우는 기쁨을 고백합니다. ‘갇힌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목사님의 권유로 그 시간을 ‘주님에 대한 섬김’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그러한 것에 대한 소명의식과 그것에 따른 실천을 하여 왔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참으로 감동적인 스토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전도와 섬김 같은 것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전도를 나가면 보통 가슴에 띠를 두르고 전도지를 한 움큼 들고 다니면서 “예수 믿으세요”라고 외침니다. 하지만 전에 들은 전도법 강의에서 강사님은 “그러니까 사람들이 도망간다”고 하더군요.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 분은 띠 절대 두르지 말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며 접근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해보니 되더군요. 그래서 여러 명을 전도했습니다. 더구나 전도에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처음부터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기회를 기다리는 것은 그래도 쉬우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띠두르고 외치려고 하니 준비도 많이 필요하고 그래서 쉽게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섬김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아원이나 양노원을 찾아가거나 독거노인을 찾아가거나 이런 것도 물론 매우 소중한 섬김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필자가 한 것처럼 옆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동화책을 사서 돌리거나 하는 것도 섬김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 선생의 말씀처럼 ”지금 이곳에서 바로 앞에 있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됩니다. 어떻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평소에 하던 것을.
‘덕후’가 된 저에게 새로운 전도법은 전도에 대한 꿈을 더욱 크게 합니다. 그것은 평소에 준비한 것을 펼치는 소중한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저의 ‘덕후’기질은 잘만 활용하면 전도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한마디로 ”생긴 대로 놀면“ “하던 대로 하면” 되기 때문이죠. 이 역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닐까요? 각자의 달란트에 따라 일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현실이 되는 것 같아 흐믓합니다. 덕분에 더 이상 ‘덕후’적 자신을 탓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겠지요.
그런 저에게 또 하나의 장기가 있습니다. 바로 편지쓰기입니다. 예전에는 한 번에 10통 정도 써도 힘들지 않았는데 요즘엔 컴퓨터에 의존하게 되어 조금 어려워졌습니다. 손편지를 받기 어려운 시대라 이것은 확실히 위력을 발휘합니다. 책과 편지 그리고 사소하지만 소중한 선물까지 곁드리면 아무리 마음이 강팍한 사람이라도 조금은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요?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던 주어진 시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한다는 것은 이렇게 여러모로 좋은 것 같습니다. 제가 자동차도 심지어 면허도 없는 것은 이런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운전하면 아무 것도 못하지요. 기도? 찬양? 그런 거 하다가 정신 나가면 사고 나는데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오늘도 기사 딸린 대형차나 전기차를 타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다니니까 그 시간이 저를 살찌우는 (마음만. 몸은 말고) 시간이 되어 버립니다. 누군가는 ‘교도소학교’라고 해서 교도소생활이 공부를 하는 시간이라고 했지만 저는 ‘길거리 학교’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길에 다니며 공부하니 말이죠.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인생 그리고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시간 때우기’에 바쁜 것 같습니다. ‘정주행’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드라마나 영화 등등을 전편 보는 것이랍니다. 저는 정주를 가는 것인가 생각했는데..아니면 바른 주행인가..돌아가신 정주영 회장님께 정주행이라고 하면 ‘우리 친척은 아닌데’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말이 되면 할 일이 없어 정주행을 해야 되는 그들과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오죽 할 일이 없으면 그렇게 시간을 죽이겠습니다. 믿음이 없으니 사명이 없고 사명이 없으니 즐거움만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정주행이라도 해야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믿음도 사명도 있으니 여가를 보내는 방법도 달라야겠지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섬김과 전도 혼자 있다면 기도와 말씀 찬송 기도 등으로 정주행을 해보면 어떨까요? ‘시간이 없다’ ‘너무 바쁘다’를 입에 달고 사시는 분들에게 특히 권합니다. 이미 언급했지만 저는 바쁘니까 더 갈급해서 하게 되더군요. 이상하게도 한가한 주말에는 도리어 시간 대비 효과가 떨어집니다. 그게 인간의 심리 아닐가요? 평소에 3시간 동안 이렇게 했으니 주말이면 엄청 달리겠구나 하지만 그게 안 되더군요. ‘너무 바빠 기도합니다’(빌 하이벨스 ,IVP출판, 2013)이란 책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네요.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위하여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