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라 ‘먼저 사랑하기’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라 ‘먼저 사랑하기’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일서 4장 19절)
유학생활 2년 차를 맞이하던 때의 일입니다. 저는 좌절감에 빠져 자신을 잃고 방황했습니다. 실패를 그다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실패를 하면 그것이 가져다 주는 충격은 매우 크다는 이야기가 실감났습니다. 어쩌면 이대로 내 인생은 끝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마저 느꼈습니다. ‘내가 과연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라는 비관적 생각만 머리 속에 가득했습니다.
저는 입학하고자 한 대학원의 입학시험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아무도 제가 그렇게 되리라고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국비유학생으로 유학을 와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지냈던 제게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려서 주산승급시험에서 낙방한 적은 있지만 입시나 중요한 자격고사에서 모두 합격을 한 저에게 –더구나 그 어려운 국비유학생 시험에도 한 번에 합격했고- 낙방이라는 말은 낯설기만 합니다.
그런 저에게 한 줄기 빛을 준 것은 바로 큰 딸이었습니다. 마음이 상해 있던 저에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의 탄생은 큰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아내의 건강이 관심의 전부였습니다. 꽤나 오랫동안 (아침부터 밤 10시 40분경까지)진통에 시달리는 아내의 모습에 안스러움을 느껴 그저 빨리 아이가 나와 해방되기만을 고대하며 지켜보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다지 없기에 더 안타까웠습니다. 집에 가서 기다리는 간호사들의 권유에 일단 귀가했지만 안심이 안 되어 다시 병원에 돌아가 몰래 기다렸습니다.
‘낳았어요’라는 간호사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리자 저는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잠시 후 간호사 한 분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싱글벙글대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를 보는 순간 ‘아니 세상에 이렇게 이쁜 아이가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벌써 자식바보 정확히는 ‘딸바보’가 된 것 같습니다. 조금 전까지 아내의 안위만 걱정했는데 아이를 보는 순간 온통 관심은 아이에게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있다 아내가 휠체어 몸을 의지하고 나와 맞아주었습니다. “수고 많았어.” 저는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이렇게 이쁜 아이를 낳아 주었으니 고맙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의 탄생과 함께 제 삶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3주간 학교도 쉬고 아이와 아내의 뒷바라지를 하느냐 바쁜 시간을 보냈지만 –틈틈이 공부도 하면서-힘든 줄도 지겨운 줄도 몰랐습니다. 아이의 목욕을 시키는 동안은 행복해서 가슴이 미어질 정도였습니다. 아이에게 우유를 먹일 때는 자신이 아빠가 된 것을 제대로 실감했습니다.
3주가 지나 학교에 다시 나가면서 삶의 중심이 공부로 돌아갔지만 제 삶이 예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아이 목욕은 직접 시키고 싶어서 아내에게 목욕을 시키지 말라고 당부했고 실제로 집에 돌아오면 아무리 피곤해도 아이 목욕을 시키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그러는 동안 낙방의 좌절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매일 같이 콧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살게 되었습니다. 아이에 대한 사랑이 저를 재기하게 만든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한 사람의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것이 남녀간의 사랑이든 자식에 대한 사랑이든 친구와의 사랑이든 관계없이.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 아무리 못 생긴 아가씨도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라는 노래를 아시나요? 거의 50년이 된 옛날 노래인데 생각할수록 맞는 말 같습니다. 사랑하니까 표정이 밝이지고 화장이나 옷차림에 더 신경쓰게 되니 자연 이뻐보일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여성만의 일은 아니겠지요. 남자성들도 사랑을 하면 자신의 외모에 더 신경쓰고 미소 띤 모습으로 남을 대하게 되니 말입니다.
그 후로 저는 입학시험에 재차 도전하여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딸이 없었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책임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것도 작용했겠지만 매일 아이를 대하면서 느끼는 행복감이 저를 강하게 끌어준 느낌입니다. 연약한 갓난 아이가 준 사랑의 파문이 저를 좌절감에서 해방시켜주는 놀라운 힘을 가졌던 것입니다.
오늘의 필자는 자신들이 새로 데려온 반려견의 변화에서 그것을 확인했습니다. 저와는 반대로 그 개는 사랑을 받게 됨으로써 변화를 겪습니다. 동물 보호소에서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힘없이 살아온 그는 주인내외의 사랑으로 활기를 되찾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꼬리를 세우고 쉬지 않고 공을 쫓는 모습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죠.
그러면서 오늘의 필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에 대한 생각을 합니다. 자신들의 작은 사랑에도 이렇게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가져오는 변화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놀라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 인간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인간의 사랑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해 줍니다. “사랑받아 본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줄 안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루이제 린저의 명저 ‘생의 한 가운데에서’는 사랑으로 인해 삶의 의미를 발견한 한 남성의 삶이 그려집니다. 언 듯 보면 니나라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보이지만 실제 주인공은 (물론 공동주인공으로 보아야 하지만)슈타인이라는 남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의학박사이고 교수이며 개업의이기도 합니다. 물려받은 재산도 많고 수입도 크니 걱정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결혼을 하지 않고 여동생과 함께 살며 그녀의 도움으로 마음 편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호조건이 그의 삶을 무미건조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행복을 느끼지 못했지요.
그런 그에게 나타난 니나는 살아야 할 이유를 준 것입니다. 그로부터 20년! 그들의 사랑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치 슈타인이 니나를 짝사랑하고 니나는 냉정하게 대하는 것 같지만 실은 니나도 그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20살이 넘는 나이 차이가 나는 남녀지만 둘만의 경험을 함께 쌓아가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끝내 둘은 결혼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것은 니나가 거부해서가 아니라 (그녀는 결혼에 동의하기도 합니다) 슈타인 이 결혼을 할만큼 삶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그런 그의 태도에 대하여 니나는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은 생의 한 가운에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그의 호조건이 가져다 주는 여유는 반대로 그를 치열함에서 도망가 구경꾼의 삶을 살게 한 것이죠.
그럼에도 슈타인은 니나로 인해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은 때로 고통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아무 것도 없는 평안한 삶보다 고민하고 때론 울고 절규하는 것이 삶을 풍요롭게 하여 궁극적으로는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죠. 저는 이런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허무함이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어 결국 아무 생각도 없는 바보를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소설에 등장하는 니나의 언니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결혼을 해서 평범한 행복을 누리지만 그것은 허무함을 속이는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니나와 함께 보내면서 그녀와 슈타인의 이야기를 접한 결과 깨닫게 됩니다.
저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지만 비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실감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위대하신 분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과 몸으로 느낌니다. 그러니 행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날로 날로 커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하나님과의 교제를 삶의 중심에 놓고 지냅니다. 그러니 세상의 즐거움을 누릴 여유는 거의 없어졌지만 조금도 아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배설물에 불과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영국에서 재미있는 공모가 있었습니다. 런던에서 북쪽 끝의 글래스고(기억이 애매합니다)까지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을 제시하라는 것이 과제입니다. 1등을 한 답이 참 놀랍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어디를 가도 지루하지 않겠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면 왜 그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 지 모릅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밤이 늦어져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됩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헤어지기 싫어서 결혼했다”라는 말이 있을까요? 요즘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가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밤이 되어도 헤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시는 분은 순진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모르시겠으면 상상에 맡기죠.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뭐니뭐니 해도 사랑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치유나 말씀을 통해 그리고 마지막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완성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도다”라는 말씀은 그 분이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사랑프로젝트가 완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가 채칙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는 말씀처럼 그가 고난을 받아 우리가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는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셔서 우리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먼저 사랑하기’ 오늘의 필자가 세운 제목입니다. ‘먼저’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영악해져서 ‘먼저’ 사랑하기를 꺼려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사랑하면 지는 거다”라는 말조차 젊은이들 사이에 떠돌고 있음을 알게 되어 몹시 씁쓸합니다. 사랑을 계획해서 하는 무슨 사업처럼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야 손해를 보지 않으니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손익계산을 하시며 사랑하시지 않았는데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사랑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스로를 고아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손선미 선교사는 “자신이 하나님이 자녀이고 그러기에 자녀의 권세를 가졌음을 인식할 때 우리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남을 먼저 사랑할 힘을 갖게 할 겁니다. 왜냐 하면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자신이 버려진 고아라고 믿고 있다면 그런 힘은 생각도 하지 못하겠지요.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 하지 못하고 계십니까? 신앙생활이 아직도 기쁨이 아니라 의무감에 가득한 부담스러운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고 자신이 그 분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여러분의 삶은 사랑받는 기쁨으로 인해 큰 변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미래는 이미 와 있고 다만 퍼지지 않았을 뿐이다”는 말처럼 그분의 사랑은 이미 여러분에게 주어지고 있고 다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니 여전히 고아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실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개닫고 그분의 사랑을 실감함으로써 삶이 기쁨과 행복으로 넘쳐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