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양의모 선생의 일본이야기(3) 한일 도자기 산업의 갈림길 – 경쟁과 견제의 원리

닥터 양 2019. 6. 7. 14:17

 양의모 선생의 일본이야기(3) 한일 도자기 산업의 갈림길 경쟁과 견제의 원리

(1) 근대이전 한일경제격차와 혁신성

  오늘 일자(201967) 조선일보에 혁신이 거부된 조선도자기의 운명’(신상목 기리야마본진대표)라는 컬럼이 실렸다.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새롭다고도 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전 일본은 자기를 만들 능력이 없었는데 중국, 조선, 베트남만 3국만 갖고 있었다-포로로 잡혀간 도공들의 활약으로 17세기 이후 청화백자를 대량으로 유럽에 수출하여 중국과 맞먹는 도자기왕국이 되었지만 조선은 혁신을 거부하여 왕년의 지위에서 내려오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컬럼은 이것을 이념에 의해 혁신이 거부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말해주는 사례라고 결론짓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가 왜 일본에 식민지화되었는가에 대하여 논할 때 전근대기에 이미 뒤떨어졌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다. 과거에는 근대 이전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는데 일본이 메이지유신이라는 근대화혁명을 통해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앞서갔던 주장이 일반적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연구업적이 쌓이면서 이러한 생각이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근대화 직전의 시기인 일본의 에도시대와 우리의 조선 시대의 대조적인 모습이 강조되면서 도자기산업을 대표로 하는 양국의 차이가 근대사의 암명을 갈랐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선통신사들의 보고는 이러한 차이를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조선통신사가 조선의 문화적 우위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되던 시절이 있다. 조선통신사에게 글씨를 써달라고 하거나 시문을 지어달라고 하는 무리들이 줄을 이어 통신사들이 밤을 새어 이에 응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포로로 끌려간 강항의 간양록을 통해 일본성리학의 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근거로 일본의 후진성을 강조하던 것도 그리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러한 인식은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선통신사들은 일본의 경제적인 번영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보고를 끊임없이 올리고 있다는 점도 최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은 당시 세계적으로도 볼 때 도시의 발달이 현저했고 서양에서 온 인물들도 이에 대하여 충격을 받았다고 할 정도였다. (사실 이 시기의 서양은 생각보다 발달하지 않았다) 통신사들 역시 일본의 도시가 얼마나 번영하고 있는지를 전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소비수준 예를 들어 의복의 화려함 역시 통신사들에게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다. 문화적 우월감이 강조된 나머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이러한 경제격차는 그 당시에 이미 충분히 인식되었을 터이다.

  하지만 이러한 충격이 곧바로 조선의 정책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라는 것 역시 잘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통신사들은 일본의 경제적인 발전을 오늘날로 말하면 물질주의의 병페로 보고 의도적으로 이를 무시했던 것이다. 성리학적 이념에 사로잡힌 그들은 청빈을 도덕적 규범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번영이 도덕적인 타락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 일부 통신사들이 발달된 일본의 물질문명의 도입을 주장하는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했지만 거의 무시되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문명과 야만의 유일한 척도이고 따라서 일본은 본받아야 할 롤모델이 아니라 특히 명나라 멸망 이후 지구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중화인 조선에게 계몽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 조선의 주류지식인들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치 마케도니아의 융성을 무시한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그것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도 있다. 데모스테네스라는 유명한 그리스의 정치가는 아테네의 아름다운 도시가 마케도니아의 야만족들에게 더럽혀지지 않게 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과거의 문화유산에 매달려 새로운 문명을 거부하는 이러한 수구적 자세는 조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겠다.

  사실 이러한 반혁신성은 17세기 이후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한신대학교 명예교수인 배준호교수는 한국일보의 컬럼 한일격차 600년사에서 15세기 세종대에 이미 한일격차는 충분히 확인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조선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커져만 갔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에도 신숙주 등에 의해 일본의 경제적 발전은 조선에 알려지게 되지만 그 어느 것도 조선의 혁신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고 그것이 결국 조선으로 하여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비극적인 근대사를 맞이하게 했다 하겠다.

(2) 무엇이 그러한 차이를 가져왔는가? - 경쟁과 견제의 원리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답은 이념적인 폐쇄성이라 하겠다. 조선은 성리학이라는 절대적인 이념의 노예였기에 마치 중세 유럽이 기독교에 의해 폐쇄적인 사회가 되었던 결과 정체되어 버린 것처럼 페쇄적인 사회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절대로 틀린 것은 아니다. 중세 유럽은 표면적으로 보면 기독교가 인간의 창의력을 말살시켰고 우주와 지구 그리고 인생의 원리에 대한 정답이 주어진 상태에서 인간들은 더 이상의 발전이나 진보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처럼 조선사회도 그러했다 할 것이다.

  하지만 중세유럽의 정체를 단순히 기독교의 문제에 귀결시킬 수는 없는 것처럼 조선의 정체를 성리학에만 그 책임을 돌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기독교도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한 우리나라 현대사는 달리 말하며 고도성장의 시대이기도 하다. 마치 기독교와 경제가 평행선을 그리며 성장한 것 같다. 기독교가 정체를 가져온다면 이것이 가능했을까? 뿐 만 아니라 막스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를 통해 프로텐스탄티즘 즉 개신교에 의해 자본주의가 발달했다는 주장을 펼친다.

  성리학은 어떤가? 오늘날 동아시아국가의 경제발전에 대하여 유교자본주의라는 주장마저 제기되고 있지 않는가? 성리학의 본고장 중국은 적어도 근대 이전에는 세계적인 경제대국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성리학=정체의 원흉이라는 공식은 설득력을 잃는다. 일본 역시 성리학이 에도시대에 발달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세계 경제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종교나 이념에 대한 편견을 뒤집는 가장 좋은 증거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을 지나치게 지킨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고 심지어 제2차 대전기에는 홀로코스트의 고난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경제적으로 훌륭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근대 이전 한일간의 격차를 가져온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의 도공들이 포로로 끌려갔지만 스스로 일본에 남기를 워하기도 했다는 사실이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왜 적국에 남기를 바랬을까? 우리는 조선도공들이 눈물로 세월을 보내며 적들의 강요에 못 이겨 도자기를 구워내며 일본 땅에 정착한 것으로 알고 있지는 않을까? 어느 날 갑자기 강제로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타향에서 살게 된 사람들이 스스로 적국에 남기를 바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이른바 수 많은 반공포로라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남고자 한 것은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증거라 하겠다. 비록 자의는 아니지만 새롭게 정착한 곳에서 보다 나은 삶이 보장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반공포로들은 보여준 셈이다.

  우선 직접적인 이유를 든다면 송환된 포로(쇄환이라고 한다)들에게 닥친 큰 시련들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는 주장이 있다. 가장 놀라운 사건은 외모가 좋은 여성 포로들을 차지하고자 포로를 인솔하던 관리가 그녀들의 남편들을 살해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포로들 입장에서 이러한 사실은 실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래저래 귀환길은 녹록하지 않았던 것 같다. 돌아간 포로들을 맞이한 곳은 폐허투성이였기에 그곳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국가가 그들에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생계가 보장되는 일본에 남는 것이 도리어 나은 선택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에 대한 대우의 차이이다. 이삼평으로 대표되는 도공들은 일본의 영주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심지어 사무라이로서의 신분상승초자 이루었다. 조선에서 천민으로서 제대로 된 대가도 받지 못한 채 도자기를 굽던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처지가 천양지차로 변하였음을 느꼈을 것이다. 오죽하면 조선에서는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면 도공 스스로 이를 깨어버린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그들은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고 그것은 상대적으로 일본에 남고자 하는 마음을 그들에게 심어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은 민족주의가 발달한 오늘날에도 빈번히 일어나는 일인데 하물며 아직 민족주의가 충분히 생성되지 않은 시대에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이 되어 싸운 민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적에게 항복하여 그들의 앞잡이가 된 민중도 다수 있음을 상기해 보면 알 것이다. (반대가 항왜이다)

  일본의 영주들은 왜 도공들에게 그토록 융숭한 대접을 해 주었을까? 그것은 일본의 정치사회체제와 관계가 깊다. 일본은 당시 300개의 영주국가로 분열되어 있는 시대였다. 일본역사는 오랫동안 분열의 시대를 갖고 있는데 이 시기는 아마도 가장 절정기였을 것이다. 직전의 전국시대에 피비린내는 전쟁이 거듭되었고 그 결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이에야스에 의해일본 천하는 다시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분열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도쿠가와이에야스가 세운 막부는 엄밀히 말하면 국제연합과 미국을 합한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기구이지 전국을 통치하는 중앙정부는 아니었고 300여개의 영주국가는 독립적인 국가처럼 병립해 있었다. 한마디로 당시의 일본은 300여개의 국가로 이루어진 작은 국제사회였다.

  조선과 비교하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다를까? 바로 지방이 스스로 살 길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의 경우 중앙집권국가이기에 지방이 부국강병을 통해 자립할 필요가 없었다. 지방관은 임기를 마치면 다른 곳으로 파견되기에 지방의 발전과 자립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토착세력이라 할 향리들 역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결국 향리와 지방관이 결탁하여 백성에 대한 착취를 일삼았기에 지방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들이 관심은 지방의 발전이 아니라 발생하는 이익을 보다 더 착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앙정부조차 재정적인 기반이 튼튼해지기 어려웠고 이것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외침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하지만 일본의 지방은 전혀 다르다. 영주들은 자신들의 영주국가(이를 번국藩國이라 한다)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생존할 수 있었다. 중국역사를 보면 왕조가 쇠퇴되는 원인은 재정파탄이며 이를 만회하기 위한 과도한 착취가 반란을 일으키게 하여 붕괴하는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독립국가인 번국 역시 그러한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번국의 재정규모는 커지니 이를 위한 수입을 조달해야 하는데 토지세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당시의 토지세인 연공(年貢넨구)는 공55라고 규정되어 변하지 않았고 민중의 부담은 물가상승 등으로 인해 가벼워져 실제로는 공28이 되었다고 한다. 봉건국가라고는 하나 토지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가 사라진 번국으로서는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하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번국의 재정을 어렵게 하는 구조적인 이유는 더 있었다. 참근교대제가 그 중 가장 큰 원인이 된다.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각 영주들은 일년의 절반을 에도에 거주해야 하고 아울러 자신의 처자는 에도에 상주해야 했다. 에도에 상주하는 처자의 체재비도 엄청났고 두 집 살림이니-에도까지 왕복하는 비용 역시 번국재정을 곤궁에 빠뜨린다. 게다가 전국시대를 함께 싸운 사무라이들이 전쟁이 없는 평화시대에 고스란히 고용되었으니 이 또한 번국 재정의 구조적인 짐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나라에 비해 일본은 지배층의 비율이 높았는데 이는 사무라이의 고용승계라는 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각 번국은 식산흥업을 통한 재정확보에 혈안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오늘날의 국가가 경제정책에 부심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경제성장은 곧 번국재정의 윤택함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영주의 부유함을 가져오기에 더욱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에도막부시대말기 강성한 세력으로 등장한 이른바 웅번雄藩들은 이러한 경제정책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온 번국들이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에도막부를 타도하고 근대적국가인 메이지국가가 수립되어 이른바 메이지유신이 실현되었다. 물론 그렇지 못한 번국들은 쇠퇴의 길을 걸었는데 막부의 권력과 가까웠던 번국들이 대부분 이에 속한다. 그들은 혁신을 하기에는 권력에 너무 가까웠고 이는 조선이 왜 혁신을 하지 못 했는가를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하겠다

  이제 도공들이 왜 그토록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도공만이 아니라 상인 장인들 역시 영주들에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서 마찬가지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분열된 국제사회에서 조선과 같이 일방적인 착취는 어려웠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다른 번국으로 도피하거나 자신들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할 것이고 그것은 결국 번국의 발전에 해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두 나라의 운명을 가른 것은 경쟁과 견제의 존재여부이다. 일본은 300개의 나라가 경쟁과 견제구조 속에서 자강의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지배자들로 하여금 부국강병을 위한 몸부림을 강요하였고 따라서 상인 장인들에게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도록 최대한의 자유를 주고 각종 혜택을 부여하여야 했다. 유럽의 중상주의에 가까운 정책이 실시된 것이다. 유럽은 지리상의 발견과 그로 인해 경제발전으로 산업혁명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 역시 절대주의국가의 성립과 그들 간의 경쟁과 견제가 큰 원동력이었다 하겠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조선은 그러한 동기를 가질 수가 없었다. 조선은 내외적으로 도전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고 따라서 국가를 부강하게 할 이유도 없었다. 지방세력은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한 크게 하는 것으로 충분했고 중앙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명나라의 정화의 대원정은 콜롬버스의 미대륙발견보다 더 웅대한 사업이었으나 그것은 명나라의 위세를 떨치고 끝나는 이벤트에 불과했던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이념에 의한 영향은 역으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조선이 이념의 노예가 되어서 발전을 못 한 것이 아니라 발전할 필요가 없기에 이념의 노예가 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반대로 유대인과 일본이 발달한 것은 발달을 해야 할 절박함 때문이고 그것이 이념을 상대화시킬 수 있게 만든다. 공무원이나 지주 건물주는 보수화되기 쉬운데 이는 그들이 삶의 보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상인 사업가 영업사원 들을 혁신적일 수 밖에 없는데 이는 그들이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경쟁과 견제에 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성공한 것은 검은 고양이든 힌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덩샤오핑의 실용주의노선 때문이고 이는 중국이 성장발전에의 절박함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3)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경쟁과 견제의 원리 회복

  오늘날 일본과 우리는 경쟁과 견제라는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기에 경제가 어려움에 처한 것인지 모른다. 양국의 고도성장기 두 나라는 경쟁과 견제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재벌의 성립은 그러한 경쟁과 견제구도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금성이 가전산업으로 성공하자 삼성이 뛰어들어 경쟁이 이루어지고 다른 경쟁자들도 참여하여 오늘날 우리는 세계적인 가전제품이나 전자제품을 손에 넣었다. 자동차도 그렇고 다른 분야도 그렇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재벌이 해체되자 각 기업들이 기업집단을 만들어 경쟁적으로 새로운 산업에 진입하여 경쟁과 견제구조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과거와 달리 소수의 지배적 기업들이 시장을 독과점하는 상태에 놓여있다. 과거 재벌은 신산업에 진입하여 경쟁을 유발했지만 이제는 이익이 보장되는 분야에 눈을 돌려 자신들이 갖는 거대한 자본력과 영향력을 이용해 쉽게 시장을 지배하게 되었다. 거기에 관피아들과 부패한 정치세력들이 이를 옹호하는 구조마저 구축되어 버린 것이다. 일본 역시 1990년대 이러한 잘못된 구조가 하나하나 폭로되었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다리 걷어차기란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너무나 명백하다. 다시금 경쟁과 견제가 제대로 작동하는 시장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공정한 게임의 룰이 정립되어야 하며 이를 방해하는 기득권에 대한 철저한 감시와 견제가 필요한 것이다. 규제완화가 답이라고 할지 모르나 반대로 필요한 규제는 새롭게 만들거나 강화되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의 농업이 뒤떨어진 것은 경쟁과 견제구조가 없이 과보호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통업같이 적절한 규제를 통해 무분별한 대기업의 진출을 제한해야 할 분야도 있다. 양국의 정책결정자들은 보다 유연하게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길을 모색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