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빚을 갚는 법 ‘감사하며 너그럽게’
사랑의 빚을 갚는 법 ‘감사하며 너그럽게’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고린도 후서 9장 11절)
‘사랑의 빚’ (양의모)
너는 내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되고 빛이 되건만
난 네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구나
기쁨도 빛도
그리고 사랑도 줄 수 없어
언제까지나 나는 너에게
사랑의 빚쟁이로 살아가야 할 것 같아
주님, 너무나 원망스러워요 저를 사랑의 빚쟁이가
되게 하셔서
하지만 주님, 너무너무 감사해요
저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셔서
주님, 저에게도 사랑의 빛을 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세상을 환하게 해 줄 사랑의 빛을 갖도록 인도해 주세요
주님, 사랑의 빚은 빚 준 사람에게 갚을 빚이 아니겠죠
다른 사람을 사랑의 빚쟁이로 만들라고 지는 빚이겠죠
많이 지고 싶어요 사랑의 빚 많이 지게 하고 싶어요 사랑의 빚
세상 사람들을 모두 사랑의 빚쟁이로 만들 때까지
사랑의 빚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기쁨도 커지는 빚이랍니다.
사랑의 빚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사랑의 ‘빛’도 커진답니다
하나님은 사랑 은행의 총재 우리에게 언제나 어디서나
사랑을 빌려 주신답니다.
다만 사랑의 ‘빛’이 되라고 하는 그것만이
하나님 사랑은행의 유일한 융자조건이랍니다
한 남자가 생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의 병은 이미 깊은 곳까지 침투해서 손을 쓰지 못할 정도입니다. 그 자신이 의학박사이자 의대 교수이지만 죽어가는 자신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을 마감하는 순간을 기다리며 삶을 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사랑을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20년간 혼신을 다해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인해 삶의 이유와 의미를 찾게 해 준 한 여성에게 그 사랑의 기록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자신이 쓴 일기장과 그녀의 편지 등을 묶어 보냈습니다.
한편 그것을 받아 든 여성은 그에게서 도피하고자 결심하고 이국으로 떠나갑니다. 기차를 타고 걸어서 떠나갑니다. 그리고 잠시 한 곳에 머물게 됩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언니를 불러 한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그가 보낸 기록을 함께 읽게 됩니다. 그 사이에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옵니다. 하지만 그녀는 언니에게 대신 받아달라고 부탁하고 그를 피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한 말을 떠올리며 비통한 심정을 토로합니다. “당신은 생의 한가운데에 살지 않는 분입니다”라는 말. 그녀의 이름은 니나! 루이제 린저의 ‘생애 한가운데에서’는 사랑을 사랑하지만 끝내 사랑을 감내할 용기를 가지지 못하는 우리를 그렇게 꾸짖고 있습니다.
이것이 ‘생의 한가운데에서’에’ 대한 저의 해석입니다. 이 소설은 제가 성경과 삼국지 다음으로 여러 번 읽은 작품입니다. 그것도 40년 가까운 시간에 걸쳐. 20대 초반 그리고 30대 후반 40대 초반 40대 후반 그리고 50대 중반 이렇게. 5,6번인가를 읽었지만 그때마다 감동은 달랐습니다. 시작은 여동생의 권고였습니다. 책을 좋아하고 글을 잘 써서 작가의 꿈을 가졌던 여동생은 내게는 동료이자 라이벌이었죠. 동생에게 지기 싫어 노력의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그 점에서 나는 그녀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생의 한가운데에서’도’ 여동생이 아니면 아마 읽어 보지도 않았을 작품입니다. 만일 제가 무인도에 가게 되고 가져갈 수 있는 책이 제한된다면 다음과 같은 순서로 가져갈 것입니다. 1순위 성경 2순위 레미제라블(빅톨 위고)(빅톨위고) 3순위 생의 한가운데에서4순위 전쟁과 평화(톨스토이) 5위 빙점(미우라 아야코) (이하 생략) 이렇게.
50대 중반에 읽은 ‘생의 한가운데에서’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도저히 진도를 나갈 수 없어 몇 달 동안 조금씩 읽어 갔습니다. 중요한 문장을 메모하면서.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을 음미하며 읽은 책은 성경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감동 그 자체에서 2위였던 레미제라블을 가볍게 제쳐 버렸습니다. 그래도 2순위를 레미제라블이라고 한 것은 감동이 유일한 선정 이유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레미제라블은 저의 믿음을 도와줄 최고의 교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꼴통보수의 예수쟁이가 되고 나니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은 피하고 싶어 지네요.. 물론 ‘생의 한가운데에서’도’ 신앙에 도움이 되기는 합니다. 그래서 3순위에 올렸습니다.
루이제 린저의 다른 작품들 이 그렇듯이 – 예를 들면 ‘완전한 기쁨’-이 작품도 여성에 의한 남성의 구원이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이 사회의 주류가 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은 낡아 빠진 생각이 될 수 있겠지요. 남성이 사회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여성은 그들을 보조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하던 시대의 이야기니까요. 그런 점에서 저도 루이제 린저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주는 힘 효과 임팩트라는 점에서 그녀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남자 주인공인 슈타인 박사는 부자에 의대 교수 의학박사로서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지만 그에겐 삶의 의미와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 공허함으로 괴로워하던 그에게 니나 붓 슈만은 삶의 의미를 부여한 인물이었습니다. 자유롭고 감성과 지성을 고루 갖추고 창의적인 니나는 슈타인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고 실제로 그의 삶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그가 가진 조건으로 인해 사랑을 즐기기만 했지만 철두철미하게 사랑을 하는 모험을 거부했습니다. 니나의 주변을 맴돌며 그녀가 힘들 때 도움의 손길을 주고 –자살을 시도한 니나를 구해준 것은 그중 하나이죠- 매일 일기에 그녀의 이야기를 도배하고 등등 하지만 결국 사랑이 주는 속박과 부담을 피하기 위해 그녀의 결혼 제안조차 거부합니다. 물론 명분은 있습니다. ‘넌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널 도와준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결혼하자고 하는 거지? 그런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아’라고 그럴듯한 명분을 댑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짐을 지고 싶지 않은 비겁함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래서 니나는 절규합니다. “당신은 생의 한가운데에서 살지 않는 분입니다”라고.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말하면 “당신은 너무나 좋은 조건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라고 해야 할 이야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시련을 주시어 우리에게 변화를 촉구하십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것을 모두 잃고서야 하나님께 무릎을 굻게 되었습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니나에 대한 사랑이 그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했고 그것이 그를 허무함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니나의 사랑도 큰 힘이 됩니다. 니나는 슈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의 태도에 분노를 느낀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니나도 평범한 여자였습니다. 한 남자의 사랑을 받고 싶었던.
사람들은 사랑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랑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은 가난이나 질병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이미 명백해졌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가난이 이유라 할지라도 가난이 사람을 죽이는 직접적인 이유가 아님은 자살과 가난이 직접적인 상관관계에 있지 않다는 분석에서 그 허구성이 드러납니다. 물론 가난은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렇다고 자살을 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생을 마감하겠지요. 과거에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가난했지만 자살도 역시 훨씬 적었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진 오늘날 자살이 급증한 이유는- 우리의 자살률은 OECD1,2위를 다툽니다-소외입니다.-소외입니다. 과거에는 모두가 살기 어려웠기에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자신이 괴로우면 남도 괴로울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게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고독사라는 반갑지 않은 현상이 늘어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랑은 넘칩니다. 하지만 이웃에 대한 사랑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사랑에 자격을 따집니다. 심지어 가족끼리도. 가족이니까 무조건 사랑받는 시대가 끝나갑니다. 사랑의 양극화 현상이라고도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사랑이 갖는 한계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가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네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 이 찬양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사랑은 잘난 사람일수록 더 받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못난 사람일수록 더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고요? 그래야 하나님께 더 매달리니까요. 의존하니까요. 잘난 사람들은 “하나님 전 충분하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라며 하나님과 거리를 두기 일쑤이거든요. 슈타인이 니나에게 거리를 둔 것처럼. 그럼에도 슈타인은 니나의 사랑으로 삶의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지는 짐작할 수 있겠지요.
위에서 소개한 저의 시 ‘사랑의 빚’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의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멀어져도 좋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니 하나님과의 교제를 깊이 하여 그분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을수록 우리는 이웃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회는 목회자들은 이웃 사랑을 그다지 강조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성도들도 그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니까요. 나 그리고 내 가족의 번영만 이루면 된다는 생각이 교회에도 팽배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오늘의 필자는 자신의 형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를 이웃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슈타인 박사가 니나의 사랑으로 삶의 의미를 찾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삶의 의미를 찾았다면 그것을 몸소 실천해야 할 것임을 역설합니다. 그의 형제는 그것을 위한 좋은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자칫 신앙생활=종교적 행위라는 생각에 묶여 이웃사랑을 소홀히 하기 쉬운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종교적 행위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에서 멈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성전의 문을 닫고 제사를 폐하라고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들의 제사는 역겹다”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그 이유 중에 약한 자를 착취하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시한다는 명분으로 종교적 행위에만 몰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의 모습을 결코 기뻐하시지 않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 사랑을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이니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님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의 빚’을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사랑의 빛’으로 바꾸도록 합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자식들끼리 사이좋게 지내고 서로를 돕는 모습에 흡족함을 느끼지 서로를 외면하고 미워하고 돕지 않으면서 자신에게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사랑의 빛’이 되어 세상을 따듯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를 몸소 실천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