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대한민국 최강의 아웃사이더 집단 아줌마

닥터 양 2015. 2. 4. 12:55

제1부 아줌마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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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는 공식적인 체제에 들어 있지 않는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자유롭다.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그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을 수 권리가 있다. 그 대신에 공식적인 체제에 대한 권리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기력한 존재라고 단정지울 수 없다. 오히려 아웃사이더이기에 자유롭게 공식적인 체제를 비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필요하다면 자유로운 방관자로 살아갈 수도 있다.

필자는 10년간 일본에서 유학을 하였고 그 시절 자신은 아웃사이더였던 것 같다. 일본사회의 공식적인 체제에 들어 간 적이 없었기에 권리를 부여받지 못한 대신에 모든 책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일본 내에서 거주하고 일본어로 일상의 삶을 살고 있음에도 난 일본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고민할 의무를 갖지 않아도 되었으니 기묘한 존재였다 하겠다. 일본어와 일본생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누리기 시작한 5,6년 이후에는 귀국하고 싶은 마음조차 없어질 정도로 그런 자유를 만끽하고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일본사회와 단절된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많은 일본인친구를 만들었고 일본의 문화를 즐겼다. 여행자와 거주민의 삶을 하나로 만든 것 과 같은 것이었다고 할까?거주민처럼 현지 생활에 익숙해 불편함은 없고 하지만 일본생활이 길어져도 일본의 문화와 사회는 여전히 내겐 가슴을 설레게 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고국인 대한민국에서도 필자는 아웃사이더가 되고 있었다. 어떠한 공식적인 자리를 갖고 있으니 대한민국사회의 흐름 속에 나란 존재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가끔씩 귀국하여 지내고 있으면 그리고 친지들을 만나거나 해도 나는 손님취급을 받을 뿐이었다. 내가 귀국하면 부모님과 형제자매가 자리를 만들어 나를 맞아준다. 그땐 그러려니 생각했는데 막상 완전 귀국을 하고 나니 형제자매를 만나는 일이 오히려 더 줄어버렸다. 곁에 늘 있으니 만날 필요성을 서로 못 느끼는 것이다.

‘편안함’에 있어서 그리고 ‘자유로움’에 있어서 내 생애 이렇게 좋았던 시절이 과연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그 사회가 주는 일반적인 혜택을 죄 누리면서도 -물론 일부는 제한되어 있다. 선거권이나 그런 거-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의무 -법질서준수 등-를 지지 않는 아웃사이더의 삶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일본사회에 대한 나의 시각은 거의 이 시기에 완성되었는데 그것은 속해있지만 자유로운 까닭에 객관적으로 관찰 할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 이전에는 공부하고 생활하기 바빴고 귀국 후에는 일본사회의 현실과 멀어졌기 때문에 그럴 축복을 누릴 수 없었다. 기회가 되면 다시 일본에 건너가 그런 아웃사이더의 삶을 잠시라도 살고 싶었는데 몇 번 여행을 간 거 말고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무척 아쉬워하고 있다. 기왕이면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아 보는 게 소박한 꿈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그래서 그 수가 엄청난 아웃사이더가 있음을 필자는 알아차리게 되었다. 바로 아줌마라는 이름의 아웃사이더이다. 여기서 아줌마란 기본적으로 엄마 아내 전업주부라는 세 가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전문직 등 풀타임직업에 종사하는 아줌마는 일단 제외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빼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우리가 아줌마 하면 생각나는 일반적 이미지와 삶을 가진 사람들을 말하는 것임을 미리 말해 두겠다.

그녀들은 분명 대한민국사회의 일원이고 대부분은 국적도 갖고 있다. 그러니 대한민국의 일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모두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가 일본에서 갖고 있던 아웃사이더의 위치와는 조금 다를 수 있다. 게다가 오랫동안 국내에 거주했다면 자신을 감시할 친지 친척 등에 둘러 싸여 있으니 역시 좀 더 부자유스러울 수 밖 에 없다. 필자는 내 삶에 직접 개입이 가능한 부류의 사람들이 없었기에 더욱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귀국 후에도 친척 등과의 교류는 최소한도내에서만 하고 있다. 아웃사이더의 자유를 조금이라도 유지하고 싶어서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공식적인 체제에서의 자리를 갖고 있지 않기에 자유롭다. 아줌마들이 속한 가장 중요한 집단은 역시 가족 또는 가정이다. 가족이라고 해서 규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다른 집단에 비하면 특히 직장이나 사업체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자유로운 집단이다. 사람들은 속박당하기 위해 가족을 만들지도 가정에 돌아오지도 않는다. 그들은 편안함과 휴식을 위해 가족을 찾는다.

전업주부로서의 아줌마에게 가정은 원래 직장이었다. 과거에는 그녀들을 감시 감독하는 존재들이 득실대었기에 지금처럼 자유롭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시어머니라는 존재이다. 시어머니는 살림 육아 등 모든 면을 책임자로서 아줌마들을 혹독하게 다루기 십상이었는데 이는 웬만한 직장의 상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오죽하면 시집가면 눈 귀 입을 막고 9년 정도는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을까?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상사들이 지금은 사라지거나 힘을 잃어버렸다. 시어머니의 견제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명절에나 빤짝하는 일회성인 경우가 대부분이 아닐까 싶다. 시어머니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긴장을 하게 했던 시아버지는 더 이상 며느리를 감시하는 존재가 아니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 라는 말조차도 의미를 잃을 정도로 존재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이 정도니 시누이 등 과거 며느리라는 이름을 가진 아줌마들을 괴롭히는 존재는 말할 것도 없다.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라는 말을 요즘 젊은 며느리들은 이해 할 수가 있을지 모르겠다.

과거에는 하늘이라 칭해졌던 남편마저 견제할 힘을 잃은 지금 아줌마들에게 무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웃사이더의 자유 즉 속했지만 속하지 않은 것 같은 존재로서의 자유를 만끽할 조건이 충분히 갖춰져 있는 것이다. 자녀양육과 가사노동이라는 의무는 있으나 그것을 감독하고 평가할 존재가 없으니 자신의 능력과 의지에 따라 수행하면 된다. 육아가 서투르다고 해고 될 위험이 없고 요리가 맛없다고 월급이 깎여지는 일도 없다.

돈과 시간의 자유를 갖고 있지만 속박은 그다지 없는 아줌마들은 그래서 그녀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녀들만의 특징을 발휘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이들이 성장해서 엄마의 손이 덜 필요하게 되면 그녀들의 자유는 한층 업그레이드되고 그래서 그 특징은 더욱 강화된다. ‘아줌마’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그러한 것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의 아줌마들은 그러한 자유를 갖고 그다지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 아줌마를 비아냥대는 그런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막무가내로 소리를 질러대거나 하는 우악스러움은 확실히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런 정도라면 애교로 봐줘도 될 것 같다. 그런 것이 사회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니까. 돈 많은 사모님들이 제비족과 바람이 났다는 것은 아줌마들의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니 그것도 제외하자.

문제는 그녀들이 대한민국 사회에 끼친 역기능적인 역할인 것이다. 특별한 견제 없이 자유를 누리는 경우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가 아줌마들에 의해서도 일어났다고 필자는 보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에도 그런 과오를 범한 적이 있다. 일본에서 아웃사이더로 살면서 주어진 자유를 남용하여 일상적인 사회적 룰을 무시하거나 한 그런 일 말 이다. 이것이 속했으면서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과오라고 생각한다. (혹시 내 자신에 대한 합리화로 비쳤으면 사과하겠다. 그런 의도는 없다.)

아줌마들이 그러한 과오가 심각히 논해져야 할 이유는 그녀들의 수가 엄청나고(적어도 대한민국 인구의 20%는 족히 되지 않을까?)그래서 그 영향력이 너무나 크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 또 하나의 측을 이루는 아저씨들이 저지른 과오와는 성격이 다른 그러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아줌마들인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저씨들의 과오라면 드러나지 않게 숨어 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과오가 아줌마들의 것이다.

하지만 여지껏 아줌마들의 문제에 제대로 된 지적은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아줌마를 비아냥대는 이야기나 멸시하는 듯 한 목소리 등은 그녀들의 부분적인 그리고 그다지 핵심적이라고 볼 수 없는 문제점을 드러낸 것에 그친다. 이미 말했듯이 애교로 넘어갈 수준인 것이다. 그런 것들은 사회적인 영향을 갖고 있지는 않았으니 구태여 심각하게 다룰 필요도 없는 것 같다.

필자는 최초일지 모르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줌마를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하고 그들이 보인 거대한 움직임 -비록 조직을 통한 단결된 움직임은 아니지만 -이 대한민국 사회에 구체적으로 어떤 악영향을 미쳤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왜 발생하게 되었고 그러한 문제점을 개선할 대안은 무엇인지도 함께 제시해 보고자 한다.

미리 양해를 구할 것은 아줌마들의 과오가 그녀들만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는 점이다. 한 사회의 문제가 어떤 특정집단의 책임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모두가 공범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한 것은 그러한 한국사회의 문제점에 아줌마들이 얼마나 관여 하였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불가피한 것이었다. 쉽게 말해 아줌마에게 포커스를 두고 말하니까 모두 아줌마들의 책임으로 보이는 것이니 너무 억울해 하지 말라는 소리이다. 만약 대상이 아저씨로 바뀌면 아저씨들에게 그렇게 할 것이다.

아저씨들의 책임을 묻는 글도 쓰려고 계획하고 있다. 다만 아저씨란 아줌마같이 동일한 집단으로 묶기에는 그 다양성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저씨들은 아저씨로 묶기 보다는 그들이 속한 집단에 의해 분류되기가 쉽기 때문이다. 관료, 정치가 , 기업가 등의 이름말이다. 장래에는 아줌마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여자들의 사회활동이 더욱더 활발해지고 있기 때문에 아줌마들도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버리기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그렇게 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듯하다.

따라서 이 글은 이렇게 이해해주면 고맙겠다. 아줌마라는 집단을 비난하기 위해 썼다고 하기보다는 아줌마라는 집단의 행동을 통해 한국사회를 비판하고 그것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면서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말이다. 아줌마는 그것을 위한 수단이었다고 보면 된다. 다만 아줌마가 이렇게 집중 포커스를 맞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왜냐하면 아웃사이더적인 성격이 강해서- 그 나름대로 흥미를 유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무심코 넘어가던 아줌마라는 존재 유머나 비아냥의 대상이기만 했던 아줌마들이 실은 이토록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였음을 깨닫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필자는 젊은 시절 이미 아줌마라는 존재에게 무서움을 느꼈다. 기가 센 어머니를 둔 덕인지 모른다. 그리고 아내라는 아줌마를 곁에 두고 살면서 그 무서움은 현실이 되었다. 어머니로서의 아줌마보다 아내로서의 아줌마가 훨씬 나에겐 다가오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아줌마에 대한 글을 쓴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임을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