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사명자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대사’들

닥터 양 2021. 11. 7. 06:41

사명자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대사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그에 비해 사도 바울은 장성한 자의 신앙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모순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비둘기 같은 순수함과 뱀과 같은 지혜로움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은 순수하여야 하지만 악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서는 지혜로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변함없는 순수함으로 믿음 생활을 해야 하지만 사단의 계략에 대항하여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성장시키며 영적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지혜로움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한 장성한 자의 신앙이란 바로 그러한 성숙한 신앙의 단계에 이르도록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장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마음이 순수하여 어른들이나 부모의 말에 잘 따르지만 지혜로움이 없어 신앙 자체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 수 있겠지요. 반대로 어른으로 성장하게 되면 지혜로움이 생기지만 순수함을 잃어가기 때문에 영적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잘 따르지 않고 자아에 입각한 생각을 가지고 신앙을 판단하면서 자기류의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기 쉽습니다. 이렇게 언 듯 모순된 신앙의 모습을 조화시켜 이를 완전한 것으로 이끌어갈 때 우리의 신앙은 완성되어 가는 것임을 사도 바울은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스승으로서 원리적인 가르침을 주셨다면 사도 바울은 그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가르침을 통해 신앙의 선  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차원이 다른 분 교사이시고- 사도 바울은 우수한 제자이자 선배였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우리와 등신대라는 입장에서 눈높이에 맞는 가르침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때론 교사보다 선배들의 말이 마음에 더 와 닿는 것처럼. 사도 바울의 서간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다 구체적으로 펼치고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관계, 공자와 맹자의 관계, 마르크스와 레닌의 관계처럼 상호 보완관계 같습니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구원의 감격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강렬하게 느껴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장성한 자의 믿음은 아닐 것입니다. 기도도 자기 자신의 문제에 집중되기 쉽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지요. 순수하지만 성숙하지 못한.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잠언 3015)라는 신앙일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에 입문하게 되는 것이 대부분 자신들이 갖고 있는 문제 때문이기에 생기는 현상일지 모릅니다. 순조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신앙을 가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설령 가진다고 해도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것이기에 별다른 능력도 열정도 없습니다. 그런 분들은 자칫 오랜 신앙경력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신앙을 가질 수 없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문제를 안고 있기에 입문한 분들은 뜨거운 열정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그래서 자신에게 집중된 신앙생활에 몰두하기 쉽습니다. 그러니 다오 다오라고 부르짖게 되는 것이죠.

  저는 이런 신앙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갓난 아기는 ‘다오 다오가 생존의 필수조건입니다. 울지 않으면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부모에게(또는 양육자에게)알립니까? 언어능력은 없고 다른 방법도 없으니 말이죠. 울면서 호소함으로써 생존을 이루고 그로 인해 양육자와의 돈독한 유대관계가 생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게 해서 깊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상태의 믿음을 사랑으로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도 해 봐서 아는데” “나 때 말이야라는 식으로 억압하려고 해서는 도리어 모처럼 들어선 신앙의 성장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 다와야 합니다. 초보신앙이 갖는 담대함과 열정을 존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이 신앙의 선배들의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러한 역할을 제대로 해 준 위대한 신앙의 선배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육체적으로 성장하였는데도 정신적으로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곤란하겠지요. 가끔 보면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른 아이라고 하나요? 몸은 성장했지만 정신은 아직 어린아이 같은 성인들. 물론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완전하게 성숙하여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도가 지나치면 문제가 될 수 있겠지요. 사회생활에 지장이 올 정도라면.

  어른이 된다는 것의 기준은 자신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협조를 하고 누군가에게는 보호자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료와. 협조를 하고 어린 아이나 사회적 약자 장애인 등을 도울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보호받는 입장에서 보호하는 입장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지요. 교회로 치면 중직자가 되어 교회의 유지 운영 발전에 기여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회사로 치면 고위직이 되어 회사 운영에 큰 기여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필자는 그것을 하나님의 대사로 표현합니다. 대외적으로 나라를 대표하는 대사에 비유하여 그 역할을 잘 수행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다는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성숙한 크리스천은 사명자로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대사로서의 역할이 아닐까 합니다.

  어려울까요? ‘하나님의 대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외교적인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되어야 하며 또 그래야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비, 화평, 희락, 온유 등 성령의 열매를 의미하는 품성이 평소의 삶에서 드러나는 수준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몸에 배지 않았다면 고역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론은 이미 나온 셈입니다. ‘하나님의 대사로서의 역할을 위해 따로 준비할 것은 그다지 없습니다. 있다면 사명자로서의 의식 정도일까요? 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움직이는 광고탑이라는 의식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가르침을 되새기며 사는 것이 될 것입니다. 나머지는 해야 할 것을 하며 살면 되겠지요. 꾸준한 신앙생활을 통해 자신의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을 덧입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명감을 느끼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어른들은 무수하게 많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성숙한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론 그렇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또는 가족을 비롯한 자신의 패거리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조폭의 의리와 인정 같은 수준의 유대감만 가지고 있기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배려도 사랑도 없습니다. ‘나만 잘 되면’ ‘우리만 잘 되면’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의 수준의 신앙에 머물 수도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대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명자로서의 삶을 감당하는 성숙한 신앙에 이를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