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이야기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는 의무가 아니라 누리는 것이다.

닥터 양 2021. 11. 2. 06:32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는 의무가 아니라 누리는 것이다. 

 

  100-1=0 이것은 엉터리 계산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적인 계산에서는 당연히 99라고 해야 정답으로 인정해 주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정답이 아닐 수 있습니다. 1+1이 반드시 2가 아닌 것처럼 말이죠.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면 1+1이지만 그것은 2가 될 수도 있고 10이 될 수도 있지만 1이나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올바르게 사랑하고 조화를 이루면 10의 효과를 가져오지만 서로를 미워하거나 이용하려고만 든다면 서로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결혼생활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생활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둘 이상 모여 뭔가를 하게 된다면 언제나 이런 이들이 일어날 수 있겠지요.

  사람이 호흡을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죽습니다. 일정 시간 동안 그것이 유지되면. 밥을 잘 먹어서 영양상태가 좋고 다른 모든 것들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어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100-1=0이 되는 법칙의 한 예가 아닐까요? 전기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무리 좋고 어떠한 고장이 없어도 전원을 차단하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쇠 덩어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가끔 그런 경험을 하시지 않으시나요? 평소에 잘 움직이던 장치나 기계가 안 움직여서 허둥대다가 전원플러그가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던 일 말입니다. 심짐어 가스보일러가 작동하지 않아 수리기사를 불렀는데 알고 보니 가스 밸브를 잠가 놓았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옵니다.한마디 말이 모자라서 다가설 수 없는 사람아한마디 말이 모자라 다가서지 못하는 것도 100-1=0이 되는 경우일까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우리는 아마 이 말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믿음 생활이란 하나님 예수님을 삶의 1순위로 두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초신자라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난 주의 것이라는 찬양도 그런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것은 결코 다른 것을 모두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겠지요. 삶의 목적 우선순위를 주님에게 두고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회사에 입사해 일을 한다고 칩시다. 그는 출세를 위해 회사를 일 순위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에겐 먼저 회사와 그 일을 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그에게 더하리라이런 생각이 자리 잡을 것이고 살아도 회사를 위해 죽어도 회사를 위해 난 회사의 것이라는 노래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그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연애를 하고 취미 생활을 즐기는 것을 모두 포기하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선순위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 이지요. “먼저 그의 나라와 의이지 오직 주의 나라와 의는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에게 그의 나라와 의가 없다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봐야 합니다. 적어도 영적으로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야말로 앙꼬(팥고물)없는 찐빵이고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아시스 없는 사막은 곧 죽음이겠지요. 그러니 100-1=0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경건한 척 살아도 그것은 능력이 없는 경건이니 이른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필자는 그것을 자그마한 경험을 통해 느꼈습니다. 교회에 기도하러 왔는데 화단이 제대로 손질되지 않아 분노한 필자 하지만 그가 자신이 온 목적을 깨닫고 기도로 예수님을 만나자 그런 마음은 눈 녹듯이 녹고 기쁨과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호흡이며 앙꼬이고 오아시스 전원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가 우리 안에 없다면 그냥 불신자일 뿐입니다. 믿음으로 기쁨도 능력도 구원도 얻을 수 없는.

저는 요즘에야 믿음 생활의 기쁨을 누리고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믿음 생활은 하나의 미션이었던 것 같습니다.   “해야 할 일이라고 할까요? “기도해야 해” “찬양해야 햬”말씀 읽어야 해” “전도해야 해” “십일조 해야 해등등 그것은 골치 아픈 의무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해야 해가 모두 할 수 있어로 바뀐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할 수 있어는 할 능력이 생겼다가 아니라 해도 좋다는 권리의 의미입니다. “기도 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라는 찬양이 지금처럼 실감 나는 때가 없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의 권세를 우리는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이지 누려야 한다는 의무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돌이켜 보면 입으로는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힘과 지식 지혜에 의존하면서 살아온 것 같습니다. “하나님! 저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저를 인도해 주소서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론 하나님! 저 혼자 잘하니까 조금만 도와주세요”라는” 생각으로 살아온 것입니다. 기도 없이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말씀 없이 생각하며 살아온 세월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믿음 생활이 무거운 짐과 같아 할 수만 있으면벗어버리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믿음 생활이란 결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녀 된 권세를 마음껏 누리는 행복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의 필자는 그것을 누림으로써 분노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린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열배 스무 배는 더 쉽고 평안하지 않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감히 꿈도 못 꾸는 행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행복 행복이라오 세상은 알 수 없는 하나님 선물 행복 행복이라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행복이라오” (‘행복에서)

  이제 생각의 전환을 시도해 봅시다. “기도해야에서 기도 할 수 있다찬양해야에서 찬양할 수 있다말씀 봐야에서 말씀 볼 수 있다헌금해야에서 헌금할 수 있다로 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는 우리의 일을 예수님이 다 해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자녀 된 자로서 누리는 권세를 부여받고 남보다 훨씬 수월하게 자신의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복음 1130)여전히 멍에도 지고 짐도 지지만 가벼워진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은혜로 살아갈 수 있는 권세를 마음껏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