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발전의 견인차 정주영 시부사와의 길을 걷다.
한국 경제발전의 견인차 정주영 시부사와의 길을 걷다.
일본경제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근현대를 막론하고 경제인들의 눈부신 활약이다. 그들은 경제활동을 단순한 영리 행위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특히 재계를 대표하는 인물의 경우- 국가와 사회를 위한 사명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메이지 시대에는 서구열강의 위협에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애국충정의 일환으로 패전 후 고도성장기에는 패전의 아픔을 경제발전으로 만회하여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경제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는 그러한 일본경제인들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 상징적 인물이다. 시부사와는 2024년 새로 발행되는 1만엔 지폐의 인물로 선정되어 화제가 되기는 했지만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일본경제발전에 대한 업적은 ‘일본자본주의의 아버지’라는 호칭에 걸맞을 정도로 위대한 것이다. 평생 500여개의 기업을 설립하였고 그렇게 세워진 기업들이 각 산업에서 오늘날까지 일본경제의 주역으로서 움직이고 있으니 가히 일본경제의 오늘을 가져온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부사와에게 경제활동은 곧 애국이었다. 그는 농업과 상업 제조업을 함께 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경제에 밝았지만 한편으로는 사무라이가 되고자 하는 아버지의 열망으로 인해 검도와 성리학을 비롯한 학문을 익혔고 이것이 그의 삶을 결정지었다. 농민의 근면함, 상인의 유연성, 제조업자의 경영능력, 사무라이의 강직함을 고루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사리사익을 추구하여 재벌이 되지 않고 경제발전을 위해 전심전력을 위해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성장배경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무라이들이 경제활동을 하면 이익이 나지 않고 상인이 경제활동을 하면 사리사욕에 기울기 쉬운데 상인과 사무라이의 기질을 동시에 갖춘 그는 이익을 내는 경제활동을 하면서도 오로지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자세를 일생동안 간직하며 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과거에 정치에 지배되었던 경제를 정치 이상으로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도덕경제론은 사무라이가 도덕적인 마음으로 자신의 임무를 다 하는 것처럼 경제인도 도덕으로 무장된 채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또 그것이 경제인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발판이 된다고 주장했다. 일본도 사농공상의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상인을 비롯한 경제인의 사회적 지위가 높지는 않았으나 경제인이 사무라이에 버금가는 도덕윤리를 익히고 실천함으로써 스스로 사회적 존경을 받게 된다면 지위가 올라간다고 믿었고 또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경제인들의 지위향상에 큰 공헌을 하였다.
아울러 경제인으로서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았다. 시부사와는 마지막 장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수하에서 염원하던 사무라이의 신분을 얻고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요시노부의 아우를 수행하여 파리에 2년간 체재하면서 경제야말로 국가를 지키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느껴 귀국후 경제활동에 투신하게 된다. 심지어 내각의 대신이나 정부의 고관의 직위조차 걷어차고. 당시 일본 사회는 경제인의 지위가 아직 낮았으니(관존민비) 이것은 매우 파격적인 행보가 아닐 수 없었는데 그만큼 그의 경제활동에 대한 신념을 잘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그의 삶은 경제에 머물지 않고 사회와 국가를 위한 각종 봉사활동으로 확대되었다. 미국과 일본이 이민문제로 충돌하였을 때 아무런 대가나 직책도 없이 미국으로 여러번 건너나 민간외교사절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여 미국에서도 ‘일본의 신사’라는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필자의 모교인 히도츠바시대학을 비롯한 많은 교육기관의 설립과 육성에도 힘을 기울였고 각종 복지단체나 봉사단체를 세워 자신의 부를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500여개의 기업을 설립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많은 교육기관 사회단체를 세워 91세라는 긴 일생동안 조금도 쉬지 않고 국가와 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 시부사와의 삶이었다. 숨을 거두지 직전 병석에 누워있으면서도 중국에서 수재가 발생하자 국민에게 성금을 요청하는 방송을 하는 열의를 보이면서 인생의 마지막 장을 장식한 것은 실로 감동적이었다.
이런 시부사와에 비견될 우리의 경제인을 찾아본다면 누가 뭐래도 정주영을 들어야 할 것이다. 부농의 자녀로 많은 기반을 가지고 출발한 시부사와와 달리 맨주먹으로 기업을 일으켜 경제발전에 공헌한 정주영의 삶은 시부사와만큼 화려하지도 스케일이 크지도 않다. 하지만 적어도 국가와 사회를 위해 경제활동을 하고자 했던 마음만큼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주영과 현대는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성장하며 국가의 동량이 된 미츠비시(三菱)와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에 비견되는 출발을 하였으나 이들과 달리 정부의 특혜나 설비의 불하 등을 발판으로 성장한 것도 아니라 그야말로 맨주먹으로 출발해 대재벌기업을 이룬 점에서 다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주영이 후년에는 시부사와와 비슷한 행보를 걸었다는 것이다. 그 역시 경제인이라는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졌으며 경제를 넘어서 국가와 사회의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하고 활동영역을 넓힌 점에서 시부사와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의 경제활동은 사리사욕보다는 국가의 경제발전에 초점이 맞춰져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받은 대우는 천양지차였다. 시부사와는 비록 경제인이지만 사회적인 존경과 사랑을 받아 심지어 그가 미국으로 건너갈 때마다 아무런 공식직함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상을 비롯한 정부 각료들이 배웅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주영은 그와 뜻을 함께 하던 박정희가 서거한 후에는 그런 대우는커녕 정권에 의해 끊임없는 협박과 착취를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압박에도 끊임없이 저항을 하였으며 결국 자신의 힘으로 경제와 경제인을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대통령에 출마하는 파격적 행보를 걷게 된 것이다. 비록 그의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그로 인해 그와 그의 기업에 대한 탄압은 더 심해졌지만 숨을 거두는 날까지 경제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국가사회에 대한 사명감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결코 시부사와에게 뒤지지 않는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정주영은 83세의 나이에 남긴(87세에 사망) 그의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 –나의 살아온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있다. “이 땅에 태어나서 내가 물려줄 유산은 이러한 노동에 대한 소박하다면 더 없이 소박한 내 생각이다. 이러한 내 생각과 지나온 삶이 힘이 되어 주길 바란다. ‘長江後浪推前浪 )(장강은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 듯이 나아간다)이라 하지 않는가? 내 후대는 앞으로 나보다 더 나아질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내 간절한 희망이다” 가슴이 뭉쿨해지는 유언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필자만일까?
정주영은 한국의 다른 경제인들과 달리 저서와 강연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거듭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가 대선에 출마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마지막 당부는 말만 화려한 정치가나 학자 지식인들의 그것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무거움을 가지고 있다. 그는 노력하고 성공하였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애썼다. 정주영이야말로 일본의 존경받는 경제인들과 비견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우리의 자랑이 될 자격이 있는 경제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는 오늘도 우리에게 그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위해 도전을 멈추지 말라고 재촉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