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망’은 이 생을 망하게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자유의 의미
‘이생망’은 이 생을 망하게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자유의 의미
‘그리스인 조르바’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소설 중에 하나이다. 재미있는 것은 정작 그리스에서는 생각보다 인기가 없다는 사실이다. 누군가가 그리스에 가서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하여 물어보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마치 예전에 우리 나라에서 엄청 인기 좋았던 미국가수들이 의외로 미국에서는 별 인기가 없었던 것과 같다. 설령 인기가수라도 우리가 좋아하는 곡이 미국에서는 폭망수준으로 알려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차중락 노래)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불려져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엘비스 프레슬리 ‘Anything that's part of you’(당신의 모든 것)는 미국에서 그다지 얻지 못했다고 한다.
필자는 우연히 이 책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가졌다. 물론 책을 읽지 않았고 다만 여기저기서 조각 정보를 통해 얻은 상태였다. 그들은 조르바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기 때문에 자유로움을 얻었다고 하였다. 국가도 결혼도 종교도 사명감도 버리고 사는 것을 통해 얻은 자유라는 말에 필자는 격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한 참가자는 ‘물질의 결핍, 부당한 제도의 구속, 생각관념’이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세 가지 요인이라고 규정하였는데 이 역시 필자의 마음에 와닿았다. 대체로 참가자들의 설명은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야기 중에 나온 ‘이생망’에 대한 이야기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생망’을 말하는 젊은이들의 심리를 조르바와 같이 ‘포기’를 통해 자유를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왜 잘 나가다 이런 터무니 없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빠져갔는지 모르겠다. ‘이생망’이란 아시다시피 “이번 생은 망했다”라는 생각의 준말이다. 명백히 자신들이 원하는 기준과 현실의 삶과의 격차를 한탄하는 느낌이 담겨져 있다. 거기에는 이루지 못한 욕망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이다. 조르바가 ‘포기’를 택했을 때 과연 그런 의미였을까? 필자는 책을 읽지 않아 모르겠지만 그들이 설명한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결코 그것이 아니었다.
조르바가 조국을 버린 이유는 조국이 없거나 조국에게 배신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조국이라는 존재자체에 대한 회의때문이라고 참가자들은 설명했다. 그리스와 터키는 우리와 일본 이상의 원수지간에 놓여 있다. 그리스는 비록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았지만(마케도니아에서 오스만 제국까지)고대 문명의 유산을 간직한 나라이기에 엄청난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그리스를 지배한 로마제국조차 그리스문화를 앞다퉈 배웠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그레코 로망’(그리스 로마문화) 이라는 복합문화이다. 심지어 신의 이름을 라틴어로 바꾸어 그대로 수입했기에 오늘날 우리는 이를 그리스로마신화라고 부르고 있을 정도이다. 마치 페르시아와 이란이 많은 외세에게 지배되면서도 문화적 자부심을 잃지 않고 오늘에 이른 것처럼.
그런 그리스에게 이슬람교를 섬기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는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그로 인해 민족적 대립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오해하지 말 것은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교를 강제하였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이슬람교를 ‘한 손에 코란 한 손에 칼’을 들고 종교를 강요하는 종교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그것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중심으로서 이슬람교가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생긴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더 중요한 것은 민족이다. 그러기에 같은 이슬람국가들끼리 –대표적으로 이란과 이라크-대립과 투쟁이 발생하기도 한다. 마치 중세 유럽의 종교전쟁처럼. 그리스와 오스만제국이 그리스정교와 이슬람교의 차이로 인해 대립한 것도 실은 민족적인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지 종교가 핵심은 아닌 것이다.
조르바는 왜 조국을 버렸을까? 참가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자신이 조국의 이름으로 저지른 죄악 –약탈, 방화, 강간, 살육 등-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느 날 각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국이라는 것이 과연 그런 죄악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존재인가 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조국을 버린 것이다. 독립운동가가 테러와 방화 등을 서슴지 않다가 갑자기 휴머니스트로 변신하여 그의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생망’의 논리는 자신들의 욕망을 가치 없는 것으로 보고 포기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니 도리어 그 욕망에 대한 열망이 강해서 그로 인한 비통함과 슬픔을 잊지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이생망’을 생각해낸 것일 뿐이다.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동경하고 있으며 만일 다음 생이 허락된다면 그것을 꼭 추구하고 이루겠다는 생각에서 조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사고로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잡은 욕망에 대한 미련이 그들의 삶을 속박하는데 진정한 자유가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이런 사실은 조르바가 자신을 통제하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모습과 완전히 대조적이다. 그는 그를 구속했던 모든 것의 가치를 부인한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부정이기에 쉽지 않을 것이다. 누구라도 “당신은 지금까지 잘 못 살았어”라는 말에 따르기는 어려우며 그로 인해 자신의 삶 자체를 180도 바꾸기란 더욱 어렵다. 조르바는 비록 소설 속의 인물이기는 하나 그것을 이룬 것이다. ‘이생망’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추구해 마지 않았던 욕망을 채워줄 기회를 누군가가 준다면 100% 그것을 이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욕망 자체를 부인하고 자유를 추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생망’이든 ‘달관세대’든 그들에겐 좌절감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속된 말로 ‘남들처럼 번듯하게 살고 싶다’라는 욕망 말이다. 하다못해 대기업 정규직이 되어 좋은 급여와 복지를 누리면 남들처럼 가지고 싶은 거 갖고 쓰고 싶은 거 쓰고 하며 살겠다는 욕망이 근원적으로 마음 속에 남아 있는 한 자유는 없다. 욕망의 부정 그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의 왜곡된 가치관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 없다면 그렇다. 조르바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서 조국에 충성을 맹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생망’주의자들은 다르다. 그것이 조르바는 자유롭고 ‘이생망’주의자들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그렇기에 ‘이 생망’은진짜로 이 생을 망하게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생망’이라면 ‘저생흥’이 될 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 일 것이다. ‘이생망’이 추구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상위 1%“ 또는 ‘상위 20%’의 삶이다. 이 생이든 저 생이든 그런 삶을 살게 될 확률은 매우 낮다. ‘상위 1%’는 고사하고 ‘상위 20%’도 나머지 ‘80%가 실패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음 생에 자신이 그 안에 들어간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그렇다고 모두가 ’상위 20%‘인 세상은 없다. 말 자체가 모순이다. 모두=상위 20%는 성립될 수 없다.
모두가 같은 삶의 수준이 되면 (전교생이 올백이란 식으로)만족할까? 그게 가능했다면 사회주의국가가 왜 사라졌겠는가? 머리털굵기 만큼이라도 남보다 앞서고 싶은 게 인간인데 그런 상태를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상태가 영속될 가능성은 1도 없고 누군가가 그것을 뒤집고 앞서려고 할 것이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것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이다.
우리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될 수 있을까? 사회적 가치가 획일화되어 그것을 추구하기에 바쁜 우리에겐 그것은 사치스로운 꿈일 것이다. 우리들 중 누구도 감히 이 사회가 부추기는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그리스에서는 인기가 없고 우리에게 인기가 있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들은 조르바의 자유를 얻었고 우리는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자유를 진정으로 소중히 여기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말해주는 것일지 모르겠다. 자유를 위해 포기가 필요하지만 그 포기란 포기를 가져온 욕망으로부터의 탈출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만일 반드시 자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좋은 방법이 있다. ‘대한민국을 떠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