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희망’의 사다리인가 ‘희망 고문’의 도구인가?
교육, ‘희망’의 사다리인가 ‘희망 고문’의 도구인가?
“교육이 충분히 보급되어서 누구든지 환경으로 인해 능력을 빼앗기는 일이 없게 되면 희망은 아이들에게 똑같은 것이 될 것이다.” (시몬느 베이유)
“저는 아이 시험 기간에 밥을 안 합니다. 대신 미리 만들어 놓고 그냥 데워서 먹이죠.” “아니 왜요?” “제가 식사 준비한다고 소리를 내면 아이 공부에 지장이 생길 거 아닙니까?” “..”
이 정도면 가히 신사임당급 엄마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세상 부모들이 다 자식 교육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공부는 싫지만 성적은 잘 받고 싶어하는 학생들처럼 말 따로 행동 따로인 부모도 많다. 부모 마음은 모두 같다지만 행동도 모두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부모 잘 만나는 것도 운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자식이 부모를 선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빠 찬스’ ‘부모 찬스’를 말하지만 사실은 부모의 존재 자체가 ‘찬스’이자 ‘위기’이다. 아이들에게 교육비를 투자하기보다 먹고 마시는 것에 돈을 쓰는 부모가 실제로 있다. “비정상적인 부모 아닌가”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의외로 많다.
심지어 아이가 놀아야 하니까 학습지를 중단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판단이 부모의 신념에 의한 것이라면 탓할 수는 없으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머니. 좋으신 말씀이신데 그래서 아이의 성적이 나빠져도 받아들일 수 있으신가요?” 이 말에 엄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중단의 이유가 아이의 저항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통제하지 못하는 부모의 무능이 학습중단이라는 참변(?)을 낳았다. 아이가 이런 부모를 가진 것은 정말로 불운이라 하겠다.
‘유리 바닥’이라는 말을 아는가? 상위 20%의 사람들의 경우 상위 1%처럼 자연스럽게 신분을 계승할 수 없기에 자녀의 신분하락을 막기 위해 교육으로 ‘유리 바닥’을 깔아 놓는다는 의미이다. 이것도 부모의 능력에 의해 아이가 혜택을 누리는 것이니 ‘부모 찬스’라 할 수 있다.
과거에 개천에서 용이 난 이유는 무엇일까? 산업화 이전은 농업사회이고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그것을 발휘할 기회를 갖기 어려웠다. 하지만 산업사회가 되며 그런 사람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승천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니 개천에서 용이 났다.
하지만 산업화가 어느 정도 완성되자 그것이 어려워졌다. 일단 경제발전의 ‘프런티어’가 사라져 출세할 기회가 줄어들었다. 남녀평등이 실현되며 고학력 남성의 출세기회가 상대적으로 축소된 것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의 경우 독립으로 생긴 인재의 부족 사태가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출세기회가 줄어든 점도 작용한다. 30에 대장이 되고 별을 다는 일은 옛 이야기다.
이후로는 ‘신분 굳히기’가 시작되었다. ‘프런티어’가 존재하던 시절의 경쟁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승천하였고 그들도 ‘유리 바닥’을 깔기에 여념이 없다. 능력 있는 사람들의 자녀들이니 그들 또한 능력이 뛰어날 것이고 게다가 능력을 극대화할 지원도 잘 받을 것이니 결과 역시 좋을 수 밖에 없다. 영특하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기회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자녀를 잘 키우는 것 같은 예외도 있을 수 있지만 이미 정석책이나 종합영어만으로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엄마의 능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시몬느 베이유의 예상은 아쉽게도 빗나가고 있다. 희망은 모든 아이에게 ‘똑같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지금 이 땅에 태어나는 자녀라고 하자. 물론 부모가 누가 될지는 ‘깜깜이 선택’에 의존해야 한다. 교육에 관심도 없고 어려서 공부도 제대로 해 본 적 없어 교육적 환경을 조성할 수 없는 부모 아래에 태어난다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당신에게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가혹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하지만 현실은 공정하지 않고 가혹하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교육은 ‘희망’이라기 보다 ‘희망 고문’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노력하면 뭐든지 될 수 있다”라고 희망을 주기 때문에 각자의 능력대로 돈과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지만 결승점에는 극소수만이 통과하는 좁은 문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되돌아갈 수도 그동안의 노력을 보상받을 길도 없다. 희망을 주지만 결국은 대다수가 좌절하게 되어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과연 무엇일까? 가장 좋은 것은 독일같이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장기적으로 그러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희망(‘희망고문’이 아니라)을 버려서는 안 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세우기 어렵다면 결과의 불평등을 최소화하여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저항이 심하고 공생보다 각자 도생적 사고가 강한 우리에게 이것은 먼 미래의 꿈이다. 유럽이 그런 사회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아직 노동자들이 계급적 일체감을 가지고 있었던 19세기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사회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이 가능한 기반을 다지는 데 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 것이다. 다행히 전체적인 흐름은 어느 정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2020년 총선에서 진보적 거대 여당이 탄생한 것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2000년대부터의 변화를 이어간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당장의 차선책도 필요할 것 같다. ‘희망 고문’에서 벗어나는 길은 비현실적인 ‘희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교육이 더 이상 개룡남을 만들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획일적인 삶보다 각자의 개성과 꿈을 살리는 인생을 추구하는 것이 최소한 ‘호갱이’가 되지 않는 길이 될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학교 종은 울리는가’를 고민하고 ‘고문’ 없는 ‘희망’을 위해 달려가자! 시몬느 베이유의 예언은 다른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