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시대에는 글로벌통합이 정답이다
글로벌시대에는 글로벌통합이 정답이다.
목차
1. 언제까지 자선에만 기댈 것인가?
2. 죽음보다 못한 삶이 있다.
3. 우리에게 남과 달리 살 권리가 있는 것일까?
4. 글로벌 시대에는 글로벌예산이 필요하다.
5. 글로벌통합에 필요한 것은 우주인은 아니라 열망이다.
1. 언제까지 자선에만 기댈 것인가?
마다가스카르는 마치 아프리카 대륙이 몰고 가는 축구공과 같은 위치에 있는 나라이다. 섬으로는 세계에서 4번째의 면적(한반도의 2.5배 남한의 거의 6배)을 가진 마다가스카르지만 인구는 남한의 절반 정도 밖에 안 된다.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동맹국 영국의 방해로 제대로 기항을 하지 못해 지친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동맹국 프랑스의 식민지인 마다가스카르에 머물다 간 사실 이외에는 특별한 인상을 주는 나라는 아니다.
그런데 마다가스카르가 가끔 화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아쉽게도 바람직한 이유는 아니다. GDP세계134위의 빈국인 이 나라에는 재난과 질병이 늘 따라다니고 그것을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어 자주 자선단체의 표적(?)으로 등장한다. 어느 자선단체는 큰 홍수가 나서 먹을 것은커녕 종자마저 없어진 이 나라의 참상을 비춰주며 기부를 호소하였다. 요즘의 화두는 마다가스카르와 콩고 등의 지역에 페스트문제이다. 중국 내몽골 지역의 페스트로 인해 가뜩이나 페스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우리에겐 그런 의미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하겠다.
마다가스카르의 페스트문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다. 2010-2015년 사이에 무려 2,404명의 페스트환자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연평균 400명에 이른다. 사망자수도 무려 476명에 이르러 치사율은 무려 19.8%이다. 20%의 치사율이라면 현대와 같이 의학이 발전한 시대에서는 실로 가공할만한 질병이 아닐 수 없다. 페스트가 사라진 줄만 알았던 우리로서는 아닌 밤 중의 홍두깨라고도 할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많은 발병자와 사망자의 수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마다가스카르의 빈곤과 환경에 따른 결과라는 점이다. 페스트는 14세기 유럽 인구의 60%를 휩쓸어갈 정도로 엄청난 병이어서 에이즈가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시절 ‘20세기의 페스트’라고 불릴 정도였다. 위생을 철저히 하고 발병시 빠른 항생제투여로 치료할 수 있음에도 많은 발병과 사망을 막지 못하는 것은 마다가스카르의 구조적인 문제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재해가 발생하면 구호단체들이 발 벗고 나서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개선될 기미가 없는 것 같다. 구호자금으로는 대증요법적인 해결은 가능할지 모르나 그 이상은 무리이다. 근본적인 위생과 치료의 시스템이 정비되지 않는 한 이러한 재앙은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 실제로 마다가스카르의 페스트 환자는 2016년에 나타나지 않다가 2017년에는 8월~11월에만 무려 2348명이 발생하여 그중 207명이 사망하였다. 치사율은 8.8%로 낮아졌으나 불과 4개월동안 6년 동안보다 더 많은 환자가 발생한 것은 실로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자선이란 한계가 뚜렷한 방법이다. 일단 참가하는 사람들이 한정되어 있다. 자선사업에 기부를 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무리 많아도 3,40% 수준을 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액수도 천차만별이고 아마도 소액기부자가 대부분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러한 자선이 그나마 세계를 지탱하는 힘이 되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땜질만 해서는 재해피해자들을 도와줄 수는 있어도 재해 그 자체를 막거나 유의미하게 줄이기는 어렵다.
2. 죽음보다 못한 삶이 있다.
이제 세계는 새롭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최근의 불법 이민이나 난민 문제도 이러한 재해문제 나아가 절대 빈곤의 문제가 있는 한 근본적인 해결의 길은 요원하다. 그들을 완전히 봉쇄할 수도 없다. 목숨 걸고 오는 사람들을 막기란 힘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만큼 ‘죽음보다 못한 삶’이라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보다 못한 삶’이라면 버리는 게 낫다는 생각은 드물지 않은 것 같다. 오래전에 쓰여진 한국의 어느 소설에서도 그런 내용이 그려졌다. 여주인공이 지주와 바람을 피우다 들켰고 남편은 지주를 죽도록 때렸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그 죄로 수감된 남편은 출소 후 지주의 정부로 살고 있는 주인공에게 함께 도망가 살자고 했지만 그녀의 답은 “그런 삶을 사느니 죽는게 낫다”고 하여 결국 남편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한 번 윤택한 삶을 살아본 그녀에게는 다시 가난에 찌들린 삶이란 버려도 좋을 것이었을지 모른다.
옛날엔 나이 어린 딸을 나이 먹은 부자의 후처나 첩으로 파는 경우가 제법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상식으로는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생존이라는 문제가 지금의 몇 배나 중요하던 시절이니 나이가 문제가 되기는 어려웠고 어차피 연애결혼이 없던 시절이니 사랑이 결혼의 조건이 될 수는 없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남겨진 가족은 부자에게 금전적 보상을 받아 먹고 살만하게 되고 딸은 평생 고생 모르고 살게 되어 좋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 아닌가?
이것을 지금의 잣대로 비판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죽느냐 사느냐의 사선에서는 모든 것이 생존에 집중된다. 내가 어렸을 때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녀의 불륜이 자주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다루어졌다. 그 당시의 여성들에게 나이 차이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능력이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점과 생존이 어려운 시절이라는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되었기 때문이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여성이 어떤 남성에게 극적으로 구조되었을 때 그녀가 그에게 호감을 가질 가능성이 높은 것과 비슷하다.
요즈음 여성들은 남성의 능력만이 아니라 외모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외모가 출중한 남성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비틀즈가 공연을 할 때 노래는 거의 들을 수가 없을 정도의 비명이 쏟아진다. 물론 여성들의 비명이다. 그녀들은 비틀즈를 보는 것만으로도 걷잡을 수 없는 흥분상태에 빠져 비명을 지르게 된다. 노래는 그다음의 문제이다. 많은 남성배우들 스포츠 스타들 가수들이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는 것은 연기와 실력이라기보다 (아마 그것은 매개에 불과할 것이다)외모 때문인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여성들이 남성의 외모에 관심이 많아졌다고 말하는 것은 외모를 연애나 결혼의 중요한 조건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 역시 생존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발달도 그렇지만 인간의 자립이란 결국 경제적인 문제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남성이 여성의 외모를 중시하는 것은 그들이 경제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은 그러한 자신이 없었다. 이제는 여성들도 경제적인 자신감이 상당히 커졌기에 남성의 외모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직은 “외모도 본다” 수준이지만 미래에는 ‘외모가 제일’이라고 할 시대가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훨씬 중요도가 커질 것이다.
이렇듯 ‘죽음보다 못한 삶’을 버릴 각오로 불법이민이나 입국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죽음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보장되기까지는 계속 뒤를 이어 나타날 것이다. 바다에 익사한 어린아이의 시신이 세계 여론을 들끓게 한 일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모래사장에 엎어진 채 죽어 있는 아이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면 사람이 아닐 것 같다. 그 아이의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슬픈 얼굴로 그 아이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부모의 마음을 느끼지 않았다면 000패스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비극이 불법 이민자 입국자의 발목을 잡지는 못한다. 39명의 베트남 사람들이 냉동트럭에서 시신이 되어 발견된 것을 기억하는가? 그것은 ‘죽음보다 못한 삶’이 가져온 무서운 결과인 것이다.
3. 우리에게 남과 달리 살 권리가 있는 것일까?
나는 스포츠관람을 상당히 즐기는 사람이다. 특히 야구와 농구 배구를 좋아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열광하는 축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국가대표 시합도 중요한 경우-월드컵 등-가 아니면 잘 안 본다. 하지만 야구 등은 국내리그경기도 자주 열관(?)을 하고 있다.
스포츠는 어찌 보면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온갖 속임수와 전략이 난무하고 극적인 반전도 수없이 일어난다. 실력=승리가 아닌 경우도 비일비재하여 인생의 빛과 그림자를 다 볼 수가 있는 것도 스포츠의 묘미이다. 경기 자체가 조작되는 경우도 적지 않으니 정말로 인생공부가 된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라는 교훈을 이토록 쉽게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의문이다.
새롭게 프로에 입단한 신인선수가 성공여부에서도 우리는 인생의 빛과 그림자를 살펴볼 수 있다. 현대건설이라는 여자배구팀에 이다영이라는 선수가 새롭게 입단한 것은 2014년이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명성을 떨친 훌륭한 선수였으나 문제는 같은 팀에 염혜선이라는 훌륭한 선수가 같은 세터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어 주전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염혜선은 4년 연속 최우수세터로 선정될 만큼 실력이 출중하니 초고교급스타인 그녀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염혜선이 FA(자유계약선수)가 되자 세터 문제로 고민하던 기업은행팀에서 그녀를 거액의 연봉을 약속하고 데려간 것이다. 거기에 또 하나의 반전은 왕년의 명세터 이도희감독이 부임하여 이다영을 제대로 조련하게 된 것이다. 감독의 중요성은 특히 신입선수에게는 절대적이다. 만일 신입선수에게 자유롭게 팀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연봉보다 훌륭한 감독이 있고 경기에 자주 나갈 수 있는 팀을 고르라고 조언하고 싶다. 두 가지가 맞물려 이다영은 주전자리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급성장하게 된다. 이도희 감독은 여론의 빗발친 반대에도 불구하고 또 개막 11연패로 인한 오명을 뒤집어쓰면서도 이다영을 풀타임 출장시키며 키웠다. 선수의 실력은 연습보다 시합에 의해 훨씬 향상된다.
이다영의 행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나라 여자배구 사상 최초로 외국인인 라바리니(이탈리아)가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한 것이었다. ‘여자배구의 히딩크’라고 불릴 만큼 명장으로 평가되는 라바리니는 히딩크감독처럼 이름보다 능력을 위주로 선수를 선발하고 기용하였다. 당시 아직은 인기에 비해(쌍둥이자매선수라는 점, 뛰어난 퍼포먼스로 인기가 높기는 했다)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던 이다영은 그로 인해 국가대표 주전 세터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실력이 가장 출중하다고 라바리니가 평가한 이효희라는 선수는 이미 40이 되었기에 국가대표를 고사했고 나머지 선수들은 라바리니의 눈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국내 감독이었다면 과연 이다영이 주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국가대표 주전자리를 또 한번 이다영을 날게 해 주었다. 물론 그녀가 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만. 세계적인 강호들과의 수많은 시합을 통해 이다영은 무섭게 성장했다. 그녀 뿐 아니라 라바리니감독과 함께 한 선수들 모두가 놀라운 성장을 한 것이다. 게다가 라바리니는 이름에 맞는 명장이어서 선수들의 조련능력은 히딩크만큼은 아니지만 뛰어났다. 선수경험이 없는 그가 명장이 된 것은 그러한 능력 때문이었다. 그 덕분인지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대회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은 강호들을 격파하며 예상보다 훨씬 좋은 결과인 5위의 자리에 올랐다. 전년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라운드 탈락한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성적이었고 이는 라바리니감독의 조련술과 용병술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리그가 열리고 경기가 시작되자 이다영은 한층 더 성장한 모습으로 코트를 휘젓게 된다. 지난 시즌 11연패를 하며 겨우 꼴찌를 면한 5위에 올랐던 현대건설은 우승을 다투는 강력한 팀으로 변신했고 그 중심에 이다영이 있다. 그녀의 쌍둥이 언니 이재영이 이미 한국의 대표적 공격수로 자리잡아 열등감을 감추지 못했던 이다영은 세터 본연의 세팅능력은 물론 자신의 장기였던 블로킹과 공격의 능력까지 살려 최고의 세터자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녀의 행운은 물론 실력이 있기에 가능했지만 실력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일본프로야구에서는 실력 있는 선수를 일부러 묶어둔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선수가 훌륭한 실력을 갖고 있지만 그 팀에 더 훌륭한 선수가 많아 주전을 차지하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다영도 그런 케이스이다. 한국여자배구의 감독들과 팀들은 그런 선수를 다른 팀으로 보내 실력을 발휘하게 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으며 그것이 인기의 비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본프로야구에서는 그런 훈훈함이 없다고 한다. 다른 팀으로 보내 그 선수가 활약하게 될 경우 그를 보낸 감독과 팀이 비난을 받게 되기 때문이란다. 참으로 일본다운 발상이다. 적극적으로 무엇을 하기보다는 비난 받을 짓을 피하고자 하는. 일본경제의 몰락에는 이러한 보신주의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문제를 극복하고 명장의 반열에 오른 감독이 있다. 노무라가쓰야 감독이다. 그는 선수로서도 초슈퍼스타였다. 660개의 홈련을 쳐서 왕정치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타격삼관왕에 빛나는 화려한 스타로서의 현역생활을 보냈다. ‘스타는 명감독이 되기 어렵다’는 속설을 깬 명장이기도 하다. 10년 넘게 하위권을 멤돌던 야쿠르트 스왈로즈라는 팀을 9년간 이끌어 4번의 리그우승과 3번의 통합우승을 이루었니 가히 명장이라 하겠다.
그런 그가 성공한 원인 중 하나가 ‘버려진 선수들’을 주워 조련한 것이다. ‘노무라 재생공장’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자신은 사람을 소중히 여긴다고 했다. 어느 정도이냐 하면 선수는 물론 구단직원 심지어 청소부까지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배려하고 아껴줘 감동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이렇게 대우받은 적은 처음이다”라고 고백한 직원들 청소부들의 증언이 쏟아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일본의 프로야구에 잘못된 인식을 강화시켰을지 모른다. 버려진 선수들이 활약했을 때 그들을 버린 팀이 비난을 받았을 터이니 말이다.
'버려진 선수’에게 노무라 감독은 구세주인 셈이다. 역으로 말해 노무라감독이 없었다면 그들의 야구인생은 그대로 끝났을 것이다. 1986-1994년의 9년간 리그우승8번 통합우승6번로 레전드가 된 팀 세이브라이온스의 중심타자 ‘츠지’도 그런 선수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 은퇴를 권유받았으나 거부하고 노무라의 콜에 응해 야쿠르트의 통합우승에 기여하여 다시 한번 야구인생을 꽃피우는데 성공하였다.
나는 묻고 싶다. 자신의 삶이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만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만일 당신의 모든 조건을 빼앗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도 지금과 같은 결과를 자신 하겠는가?“ 라고. 여기서 조건이라 함은 꼭 유리한 조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리한 조건이 사람에게 자극제가 되어 성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조건은 자신이 만든 것은 아니니 빼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것을 무시하고 자신은 남과 다른 인생을 살 권리를 자신의 힘으로 얻은 것처럼 생각한다.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게츠비‘에서 ”너가 남을 비판할 때는 네가 그에게 없는 유리함이 있는지 생각하라“고 하였다. 이 말은 남에 대한 비판은 불가피하나 그것이 오만에 기초한 것이라면 곤란하며 그것은 자신의 유리함을 감추고 상대를 비난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링컨은 ”죽음을 어쩔 수 없는 인간 어찌 그리 오만한가“라는 시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인간의 오만함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불법 이민 입국자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보면 ’오만의 극치‘를 읽게 된다. 그들은 ’죽음보다 못한 삶‘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을까?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그것을 알기는 쉽지 않다. 특히 젊은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들의 불만이란 혜택받은 자들이기에 가능한 것들 뿐이다. 물론 그들은 그조차 이해 못하며 그런 것을 지적하면 꼰대질이라고 저항한다. 하지만 자신들을 이해하라고 하면서도 자신들 보다 더 험한 삶을 사는 이들에 대한 배려는 오히려 부족하다. 39명의 죽음에 대한 끔찍한 공격은 도저히 인간의 탈을 쓴 자들의 소행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취업이 안 돼서 힘들다고? ”취업이 아니라 삶이 안 돼서 힘든 사람은 어쩌라고?”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얼마나 기여한 것인지 묻고 싶다. 이 나라의 경제적 번영에 젊은 세대의 공헌은 1도 없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그들이 무슨 자격으로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을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운이 좋아 대한민국 그것도 어렵게 일군 번영의 터를 세운 시기에 태어나 잘 먹고 잘 사는 주제에 누구를 매도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들이 저 나라에 태어났다면 모르긴 몰라도 더 한 짓도 했을 것이다” 라고 외치고 싶다. 그들의 ’수저론‘은 결국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나? 조국 전 장관에 대하여 목소리를 높이던 청년들에게 되묻고 싶다.
4. 글로벌 시대에는 글로벌예산이 필요하다.
’글로벌 자본세‘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프랑스 출신의 토마 피케티의 저서 ’21세기의 자본‘에 나오는 명칭이다. 불평등의 시정을 위해 그가 제안한 것이 ’강력한 누진소득세‘와 ’글로벌자본세‘이다. 피케티는 자산의 격차가 소득의 격차보다 심각하기 때문에 자산세가 필요하며 세금회피를 막기위해 글로벌적인 자본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고는 가히 글로벌시대에 걸맞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언제나 글로벌시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민족국가시대에는 민족국가에 맞는 조세제도가 있었으니 글로벌 시대에는 당연히 글로벌 시대에 맞는 조세제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글로벌시대에 맞는 예산도 세워야 하지 않을까? 자선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 예산 말이다. 지구방위군이라도 만들어 국가 단위의 방위태세를 글로벌단위로 바꾼다면 각 나라가 이렇게 많은 국방예산을 허비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국가내의 재난에도 자선은 필요하지만(이웃돕기성금)예산에 의한 지원도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그럼 글로벌 재난예산이 필요하지 않을까? 재난만이 아니다. 생활보호도 해 줘야 하고 의료지원도 해야 한다. 상시적으로. 국가가 국민에게 하는 수준의 보호를 글로벌 단위로 해줘야 진정한 글로벌시대인 것이다.
피케티는 ’글로벌 자본세‘를 말했지만 그로 인해 들어온 세입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글로벌 자본세가 자산격차로 인한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수단이지 그것을 가지고 복지에 쓰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모처럼 거둬들인 세입을 그냥 쌓아놓기만 한다면 너무 아까울 것이다.
만일 글로벌 자본세가 실제로 만든다면 가장 필요한 용도는 역시 빈곤국가에 대한 지원이 될 것이다. 돈 싫어할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공적인 예산은 가장 필요한 곳에 쓰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글로벌 자본세를 예산으로 지출할 경우 이 예산을 쓸 수 없는 나라의 리스트를 일단 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여기에 포함되어야 한다. WTO에서 후진국의 지위를 잃게 된 우리가 무슨 명분으로 그 소중한 예산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지원대상국의 리스트를 만들어 원칙적으로 소득수준에 반비례해서 예산을 집행한다. 다만 국가예산과 마찬가지로 큰 자연재해나 재난이 있을 경우에는 이를 조정하면 될 것이다.
’글로벌 자본세‘로는 부족하다. 세입을 더 많이 확보할 방법이 필요하다. 지구가 망하지 않는 한 들어올 세입 더 많이 생긴다면 안정적으로 빈곤국가들을 도와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할 수 있다. 또 그로 인해 불법적 이민과 입국이 사라지거나 큰 폭으로 줄어들 것이다.
나는 이것을 ’글로벌 행복세‘라고 부르고 싶다. 이 세금으로 인해 지구전체가 행복해진다면 하는 바람에서 그렇게 지었다. 방법은 나중에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문제이나 예를 들어 모두가 내는 세금의 10%를 납부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 하다. 100만원의 소득 또는 매출에 10만원의 세금을 납부한다면 추가로 그것의 10%인 1만원을 글로벌 행복세로 납부하는 것이다. 그래 봐야 11만원이다. 10만원을 내는 사람에게 1만원의 추가 비용이 부담스러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생활화되면 곧 적응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부가가치세 10%를 내면서도 그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해서 거두어들이는 ’글로벌 행복세‘는 엄청난 효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2020년 우리나라 정부세입은 480조이고 국세는 300조 정도이다. 단순계산하면 ’글로벌 행복세‘가 30조 정도가 된다는 계산이다. 마다가스카르의 총 국민소득이 12조5천억이니까 30조면 2.4배정도는 된다. 마다가스카르정도의 나라라면 적어도 10개국 이상을 도와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20개 정도는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보다 총GDP가 많은 나라가 11개 있는데 그중에 러시아, 브라질, 인도, 중국같이 선진국이라고 보기 어려운 나라를 제외해도(이들 나라도 능력에 따라 내면 될 것이다) 7개국이 각각 30조씩 출원한다면 140개국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정도면 웬만한 후진국은 모두 커버된다. 물론 우리보다 작은 나라 중에 선진국이 조금 더 적은 액수라도 내고 우리보다 큰 나라가 더 낸다면 세계의 빈곤문제는 완전히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세계인구를 75억이라고 가정하고 선진국 국민의 인구를 대략 30억 정도라고 하면 45억의 인구가 원조의 대상이 된다. 앞에서 말한 7개국 +한국만으로도 240조의 재원이 만들어진다. 240조를 45억으로 나누면 1인당 53만원이 된다. 53만원이면 달러로 약 500달러이다. 이 금액은 마다가스카르의 1인당 GDP에 맘먹는 액수이다.
우리에겐 적은 돈이지만 그들에겐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그것을 국가가 제대로 활용한다면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국민소득만큼의 원조가 아닌가? 그것도 매년. 우리나라에 GDP만큼 돈이 매년 지원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라. 물론 그 돈이 제대로 쓰여지는지도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그리고 중소선진국이 더 납부하고 예산이 인구만이 아니라 그 나라 형편(소득에 의해)에 따라 차등배분된다면 그 효과는 더 커질 것이다.
5. 글로벌통합에 필요한 것은 우주인은 아니라 열망이다.
“좋은 일은 서둘러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 우리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하는데 ’매는‘이 아니라 ’매도‘니까 아마 좋은 일도 먼저라는 것이 될지 모른다. 매를 먼저 맞으면 기다리면서 느끼는 공포에서 해방되니 좋고 좋은 일은 서두르지 않으면 마음이 변할 수 있으니 서둘러 하라는 소리 같다. 덧붙여 말하면 누군가 좋은 일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따라 할 수 있으니(원숭이 효과)그 또한 좋은 것이 아닐까 싶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최고의 문명국이다. 야만의 필수요소인 폭력 침략 지배와 가장 거리가 먼 나라인 것이다. 어느 한국여성이 외국여성에게 “요즘 무서워서 밤에 못 돌아다니겠어”라고 하자 외국여성은 “미쳤어. 밤에 왜 돌아다녀?”라고 답했단다. 어느 쪽이 미친 건 지 모르겠지만 한국여성이 미쳤다면 그만큼 우리나라가 안전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3만 달러 5천만 인구‘클럽에서 유일하게 침략과 지배라는 죄악에서 자유로운 나라답지 않은가?
그런 우리가 “좋은 일은 서둘러라”는 속담대로 ’글로벌행복세‘를 먼저 실현하여 보이면 어떨까 싶다. 다른 나라들을 설득하여 함께 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우리가 단독으로 실천하고 그것을 전세계에 전파한다면 ’원숭이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세계는 과거에 비해 상당히 문명화되었다. 도덕 윤리 명분이 무기력한 시대와는 다르다.
게다가 세계는 과거에 비하여 좁아졌다. 글로벌시대라는 말이 공연히 나온 것은 아니다. 인터넷으로 세계의 중요 뉴스를 실시간으로 검색하여 알 수가 있다. 천리만리 밖에 있는 사람들도 더 이상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이미 소개한 39명의 죽음 바닷가 모래사장에 엎어져 있는 아이의 시신 우리는 언제든지 이것을 볼 수 있는 시대이다. 아울러 그들과 인터넷을 통해 의사소통을 할 수도 있는 시대이다. 더 이상 국가와 국경에 의해 피아를 구분해야 하는 것이 절대적인 시대가 아니다.
유럽은 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천년 넘게 분열과 대립을 거쳐 오늘날 하나로 통합되었다. 그들은 총칼을 겨누고 으르렁대었지만 지금은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하도록 국경을 열었다. 실질적으로 국가의 개념은 퇴색하고 만 셈이다. 너희나라도 우리나라도 없이 우리 유럽인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로벌시대는 그러한 생각이 지구 전체를 덮어야 비로서 완성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표노래인 ’손에 손잡고‘ 는 그러한 미래의 꿈을 그린 노래이다. 자그마한 집단이 국가와 민족을 이루고 더 나아가 인류를 하나로 묶는 인류공동체를 이루는 것 그것이
’손에 손잡고’의 정신인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인류가 서로를 향해 총칼을 겨누지 않고 하나의 국가와 민족처럼 서로를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럽 말고 유사한 사례는 또 있다. 일본의 에도시대가 바로 그것이다. 전국시대 150여년간 일본을 뒤덮은 전화가 도요토미에 의하여 종결되고 일본은 평화의 시대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에도막부 250년은 평화의 완전한 정착과 함께 300여개의 번국들이 하나가 되어 경제 문화의 번영의 꽃을 피웠다. 300개의 번국은 독립국과 같이 통화를 발행하였고 독립된 법과 질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각각의 주권을 존중하면서도 개방적인 체제를 통한 발전을 꾀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야만의 일본이 문명의 나라로 전환되어 갔음을 의미한다. 도요토미가 무력의 분리를 실행하고 도쿠가와는 분리된 무력을 봉인함으로써 야만의 시대를 끝낼 수 있었다. 유럽이 제2차 대전으로 야만의 시대를 종결시키고 제2의 로마제국이라할 수 있는 유럽연합을 결성하여 간 것과 같이 분열된 상태의 통합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만일 에도시대가 500년 정도 이어졌다면 지금의 일본은 야만의 떼를 벗어버린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그러한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통합에 대한 열망이었다. 오랜 전쟁은 평화를 갈구하는 마음을 모두에게 심어주었다. 히틀러는 총칼로 하나를 만들고자 했으나 실패했고 도요토미의 통합도 강한 힘으로 이루어졌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도쿠가와의 에도막부는 혼란을 끝낼 통합에 대한 열망이 가져온 선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다노부나가와 도요토미히데요시가 그토록 많은 피를 흘려 이룬 통합이 단 두 번의 전투(세키가하라전투, 오사카전투)로 이루어지고 유지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유럽에서 이룩한 통합이 글로벌통합으로 확대되기 위해 필요한 것도 바로 열망인 것이다. 모두가 같은 인류라는 이름으로 통합되기를 열망할 때 기적은 일어난다. 국제연합, 유네스코, 올림픽 그 모든 것이 인류의 통합을 위한 마음의 통합을 재촉하고 있다. 생각을 해 보라. 100년 전 우리가 이렇게 가깝게 서로를 접할 것이라고 꿈이라도 꾸었을까? 우리는 더 이상 백인들을 구경거리로 삼지 않는다. 영어로 대화를 걸어온다고 도망가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더 이상 머나먼 곳의 낯 선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국민의 집’운동은 ‘인류의 집’운동으로 확대될 수 있다. 국가가 하나의 집이라며 지구가 하나의 집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누가 정했단 말인가? 우리는 꿈의 한계를 미리 정할 필요가 없다. 한계는 현재의 상황에 의해 정해진다. 상황이 바뀌면 새로운 한계가 정해질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한계는 점차 확대되어간다. 마치 우주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우리의 꿈의 실현의 한계도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작고한 노회찬 의원은 “우주인이 쳐들어오면 지구가 하나가 된다”는 비유로 하나 됨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이 비유는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주인의 침략을 바라며 기도하여야 할까? 레이저총을 든 우주인들에 의해 아름다운 지구가 파괴되어야 우리는 뭉칠 것인가? 파괴된 지구에 뭘 얻어먹겠다는 것인가?
우주인 말고 다른 하나의 공통의 적과 싸우자. 그 적은 빈곤과 기아와 질병과 침략 차별 전쟁 지배 등과 같은 인류의 부의 유산이 될 것이다. 그러한 적들에게 우리의 레이저를 발사하자. 그 레이저의 총알은 사랑과 화평과 평등 자유 자비 인의와 같은 문명의 자산이 될 것이다. ‘인류 통합’은 그러한 무기로 충분히 승리를 거둘 때 이루어질 것이다.
대한민국은 그 선두에 설 자격이 충분하다. 그러니 앞장서자. 오랫동안 담아 온 문명의 열매를 세계의 모든 나라에게 나눠주도록 하자. 그리고 외치자. “Follow Me if You would!”(따라올 마음이 있는 자는 모두 나를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