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시련이 없기를 기도하지 말고 시련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라

닥터 양 2020. 5. 14. 12:54

시련이 없기를 기도하지 말고 시련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라

 시련이 없이 꽃길만 걷게 되면 일상이 시련이 되고 시련을 겪고 이겨내면 시련이 일상이 된다.


 우리는 꽃길만 걷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의 젊은 세대는 부모를 비롯한 윗세대들이 자신들의 고생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그들이 갈 길을 꽃길로 만드는 바람에 꽃길이 아니면 걷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앞에 문제가 생기면 이것을 극복하기보다 왜 미리 이런 문제를 해놓지 않았느냐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들은 인생이 꽃들로만 가득 찬 길이어야 한다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꽃길만 걷다 보면 꽃길마저 시련처럼 여겨집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녀와 야수라는 이야기에서 야수는 원래 왕자였는데 그의 말이 하나도 빠짐없이 실현되었기 때문에 기다리거나 참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왕자로 하여금 일상적인 삶에서 오는 자그마한 스트레스도 견딜 수 없는 인간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걸로 이미 그는 야수라 할 수 있고 마녀는 그것을 현실의 야수로 바꾸어 놓은 것 뿐입니다.

  마녀는 야수가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순수한 매력을 회복하기를 원했습니다.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 상대에게 진심으로 사랑받는 순간 인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라고 한 마녀의 예언은 그것을 의미합니다. 돈과 재물 권력을 겸비한 왕자가 진심으로 사랑을 하고 또 사랑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그의 모든 조건 그것은 그가 아무런 노력 없이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조건-을 박탈당하고 가장 흉측한 모습으로 바뀌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자신의 노력으로 새롭게 바뀌어야 하는 사명이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신데렐라 드라마가 여전히 안방극장(요즘은 거실극장이라고 해야 할까요?)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데렐라 드라마는 고통을 스스로 극복하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왕자님(재벌2세 또는 실제 왕자 심지어 왕까지)에 의해 상황이 정리되고 주인공은 다만 그의 사랑을 받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남녀평등이 당연시되는 시대에 어떻게 여성을 그저 남성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는 존재로 그리는 드라마가 대세인지 의문입니다. 그것은 꽃길만을 걷겠다는 우리 사회의 주류적 희망을 대변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로또처럼 한 방에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행운을 기다리는 마음이 사회를 지배하기 때문에 신데렐라 드라마의 수명이 연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학습지 교사를 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가정에서 중학교 2학년 아이에게 엄마가 반찬을 집어 먹여주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그 아이는 숙제를 제대로 하라는 저의 잔소리조차 엄청난 시련처럼 느껴졌기에 학습을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자녀를 꽃길만 걷게 하면 사소한 일상의 일이 시련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보여준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꽃길만 걷는 인생을 원하십니까? 누군가가 자신의 삶의 문제를 정리해줘서 편하게 살고 싶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일상에서 생기는 사소한 일이 시련처럼 느껴지니 더 어려운 삶이 살게 됩니다. 시련을 평생 책임져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록 부모라도 불가합니다.

  시련을 이겨낼 힘이 생기면 시련이 더 이상 시련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가 되고 그럴 때 진정한 꽃길 인생이 열립니다. 박지성은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말을 해도 좋을 듯 싶습니다. 시련도 인생의 일부라고. 마치 에베레스트산을 오른 사람이 뒷동산을 한숨에 오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시련을 시련으로 여기지 않게 될 것이고 오히려 지루한 삶에 주어지는 흥미로운 도전으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진정한 꽃길만 걷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꽃길만 걷고 싶다면 가시밭길을 준비하라!” 이런 외침에 공감할 수 있다면 인생의 꽃길이 열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