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하여 12. ‘초협력사회’의 장애 (9) 자식이 웬수가 된 대한민국
12. ‘초협력사회’의 장애 (9) 자식이 웬수가 된 대한민국
‘고려장’을 기억하는가?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낯선 용어인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아니 어떻게 부모님을 갖다 버려? ’지금 시대에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만행(?)이다. 고려장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고려 시대의 풍습 같은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또 있다 하면 얼마나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고려장이 없어진 이유가 자식을 버리러 가는 자녀가 길을 잃을까 봐 나무를 꺾어주는 부모의 모습에 감동해서라든지 손자가 자식에게 나중에 그 지게로 부모를 버리겠다는 말에 놀란 자식이 다시 부모님을 모시고 돌아와 봉양했다는 식이어서 오히려 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되어있는 것도 현실성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하지만 생산력이 낮은 옛날 국가 전체의 식량이 부족하니 노동력을 잃은 노부모가 ‘밥만 축내고’ 있다는 것이 큰 부담이 될 수 있으니 개인적으로 고려장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딸을 기생으로 팔거나 부잣집에 첩으로 파는 식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할 정도로 불안정한 시대에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의 상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생계형’ 성매매를 아직도 주장하는 것은 넌센스이지만 예전엔 늙고 병든 노모와 어린 형제자매들을 위해 성매매업에 뛰어드는 효심 깊은 딸들의 희생도 있었다. ‘홍도야 울지 마라’라는 영화에서는 공부하는 오빠의 학비를 대기 위해 기생이 된 착한 누이동생의 슬픈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다. 생존이 극단적으로 불안하면 노인의 유기 역시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시대에조차 이러한 유기는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지게에 싣고 산속에 버리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에 태워 먼 곳에다 버리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만) 소극적으로는 부모를 모른 채 방치하고 연락을 끊거나 외면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론 낯선 곳에 데려다 놓고 방치한 채 돌아오는 것이다. 결국 그들 부모는 고독사라는 형태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부모의 재산을 송두리째 빼앗고 외면하는 악질 자녀도 있다. 오죽하면 ‘불효자법’을 만들고자 하게 되었을까? 부모가 자식에게 부양이나 효도를 기대하고 재산을 주었지만 –그것도 탈탈 털어서- 자식은 부모를 외면한다. 결국 부모는 자신이 준 재산을 다시 내놓으라고 요구하지만 자식은 거부하고 결국 부모 자식이 법정에서 만나는 비극이 일어난다. 하지만 부모는 재산을 돌려받을 수가 없다. 어떠한 계약서도 없으니 법적으로는 환수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부모를 지키고자 계약서가 없어도 환수가 가능하도록 하는 법이 준비중이다. 이 정도면 더 이상 양자간의 관계는 부모자식이 아니라 웬수지간이 될 것이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늙은 부모를 자식이 봉양하는 관습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합리적인 것이다. 지금 정년연장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평균수명이 높아진 지금 노후가 길어지니 생계를 위해 정년연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년연장은 곧 젊은이들의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만일 자식이 부모를 부양한다면 이런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부모가 조기은퇴하더라도 자식이 부양하면 되기 때문이다. 생산력이 낮았던 과거에 이러한 관습은 노후를 보장받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생산력의 향상이 도리어 이러한 합리적 관습을 없애는 원인이 되었다. ‘콩 한 조각도 나눠 먹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콩이 열 조각이 되면 나눠 먹기 어렵다. 한 조각을 남겨 둬봐야 소용이 없지만 10조각이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것이 100조각 1,000조각 이렇게 수가 늘어나면 날수록 나누지 말고 보관해서 먹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생존이 유일한 목표일 때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런 경우 부모와 자식이 동거를 해도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불만은 없을 것이다. 사실 노부모가 먹으면 얼마나 먹고 소비를 하면 얼마나 할 것인가? 그러니 부모를 모신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게다가 모두가 없이 지내니 자신의 미래도 생각한다면 그것 말고 다른 대안이 없는 이상 부모부양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먹고 사는 것 이상의 재화가 손에 들어보면 이야기는 다르다. 그것을 가지고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부모에게 쓸 재화를 아끼면 자신들이 누릴 소비와 소유의 수준은 높아진다. 게다가 자신의 자식들에게 보다 나은 미래를 주고 싶어진다. 학교에 다니는 것도 힘든 시절에는 욕심을 부리기도 쉽지 않았지만 학교는 기본이고 사교육이 활성화된 시대에는 보다 좋은 사교육을 통해 아이의 장래를 보다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평균 수명이 급격히 늘어난데 비해 출산율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양보다 질’이다. 자식을 많이 낳아서 그저 최저한의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시대에는 자녀가 즐거움이요 행복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 명 한 명 왕자님 공주님처럼 키우기 위해 출산을 억제한다. 그리고 가정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아이를 고부가가치제품(?)으로 젼신시키고자 몸부림치게 된다. 반면 60이 환갑인 것처럼 60-70이면 사라져야 할 부모는 80이 넘어도 생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결국 자원배분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부모가 노후를 스스로 준비하려고 하게 되고 자식은 부모에게 갈 자원을 아껴 자신의 자식에게 더 많은 것을 투자하고자 하게 된다. 부모 자식간에 자원을 합하여 생존을 꾀하던 공식은 깨지고 말았다. 부모 자식관계가 협력적인 것에서 경쟁적인 것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개별 가정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노후보장과 젊은 세대의 삶이 충돌하는 세대 간의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이러한 세대간의 문제는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선거에 관심이 많고 투표율이 높은 고령자의 의견이 보다 정치를 움직이는 데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그러한 불만의 목소리가 서서히 들려오고 있다.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부모를 자식이 부양하는 효도의 미덕을 부활시킬 수는 없다. 자녀라고 해 봐야 하나나 둘 정도 뿐 인 시대에 자녀에게 부양의 짐을 지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자녀들이 부모와의 동거에 대한 거부감이나 정신적인 부담감도 이미 커져 버린 상태이니 자칫 불편한 동거로 인해 관계가 악화될 수도 있다. 부모의 재산과 자식의 효도를 맞바꾸는 딜은 이미 실패하고 있기에 그것도 용이하지는 않다.
마치 동화에 나오는 천국과 지옥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먹을 것을 주어 잘 사는 천국과 자기의 먹을 것만 먹고자 하는 지옥의 상황 중 후자가 지금의 시대인 것 같다. 세대를 이어가며 협력하던 미덕을 잃은 지금 각자도생이라는 환경 속에 모두가 힘들어해야 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결국 길은 하나이다. ‘새로운 포도주는 새로운 부대에 넣어라’는 가르침처럼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생각과 방법으로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부모와 자녀의 새로운 협력관계가 모색되어야 한다. 물론 새로운 길은 두렵고 그로 인한 고통은 반드시 발생하지만 피한다고 해결될 것이 아니기에 결의를 다져야 한다.
과거 세대간의 부양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의 전면적인 재검토와 개선이 필요하다. 자식에게 노후를 맡기는 시대에 부모들은 자녀들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노후 자금 따위가 남을 여유도 없었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더 이상 자식은 부모의 노후를 위한 보장기능을 갖지 않게 되었다. 부모는 자식에게 모든 것을 쏟아서도 안 되고 자식은 그것을 바라여서도 안 된다.
이명박정부가 한 가지 잘한 정책이 있다면 학자금 대출의 부담을 덜어준 것이다. 과거에는 학자금 대출을 받고 나서 곧바로 이를 상환해야 했다. 물론 거치기간이 있으니 이자만 내도 되지만 어쨌든 재학시절에 이미 상환의 과정에 들어갔다. 학생들이 그럴 부담을 할 능력이 없으니 당연히 이것은 부모의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이명박정부는 취업을 하기 전까지는 학자금 대출의 상환을 유예해주는 제도를 만들었다. 극단적으로 말해 여성이 대학을 졸업 후 곧바로 결혼하여 전업주부가 된다면 그래서 평생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학자금 대출을 상환하지 않아도 된다. 취준생으로서 수입이 없다면 학자금 대출 상환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이러한 좋은 제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부분의 부모와 자식들은 등록금을 부모의 부담으로 여기고 있다. 등록금 천만 원 시대에 만일 두 명의 자녀를 졸업시킨다면 이론적으로 말해 8천 만원이 소요된다. 게다가 만일 용돈 등을 부모에게 의존한다면 적어도 1억은 들 것이다. 1억이란 원래도 큰 돈이지만 노후생활자에게는 더욱더 큰 가치를 갖는 금액이다. 그것을 자녀에게 쓰고도 노후가 여유 있는 부부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지금의 중고년 부부처럼 외벌이가 많은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나의 여동생은 두 명의 아들을 대학에 보내고 있지만 학자금 대출을 이용하고 있지 않다. “왜 이용하지 않는가?”라고 묻자 “그래 봐야 빚이잖아”라는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취업때까지는 상환하지 않아도 되니까 부담도 크지 않아..게다가 넌 노후자금 마련했니?” “.....” 잘은 모르지만 내 여동생이 노후자금을 마련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여러 가지 정황상.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동생이 자신의 일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의 노후자금을 마련해 쓸만큼의 수입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도 학자금 대출을 이용하지 않으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혹시 나 모르는 재산이라도 숨겨 놓은 것일까?
빚? 맞다. 빚이다. 하지만 젊은이의 빚은 노년의 빚과는 차원이 다르다. 노년은 돈벌이를 하기 어려운 시기이다. 재산을 많이 갖고 있고 금융자산이 많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런 행복한 노인이 소수라는 사실은 잘 알려진 대로이다. 글자 그대로 노후는 소수의 부자들과 다수의 빈자로 나뉘어진 양극화 상태이다. 그런데도 내일을 모르고 살아가다니 참으로 답답하기만 하다. 자식들에게 아직도 기대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일까?
부모의 노후자금에 대한 자녀의 강탈에서 등록금은 비교적 그 비중이 적다. 그보다 훨씬 문제가 되는 것은 결혼자금이다. 과거에 부모는 결혼의 주체였다. 심지어 언제 누구와 어떻게 결혼할지도 부모가 정하고 자식은 그저 따르기만 했다. 더구나 여성의 경우 결혼과 동시에 사실상 ‘출가외인’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생가와는 거의 인연을 끊어야 하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조차 여성이 출가 후 친정에 가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기에 결혼자금은 당연히 부모가 책임을 지게 되어 있었다. 그 대신 자식의 결혼은 시부모들에게 새로운 노동력과 효도를 제공 받을 기회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결혼비용과 노동력 효도의 빅딜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 이러한 빅딜은 이미 사라져가고 있다. 자식이라고 해서 특히 아들과 며느리가 결혼과 동시에 시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게 되었다. 도리어 아들가진 부모가 더 눈치를 봐야 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딸 집에는 예고 없이 찾아가도 아들 집에는 그럴 수 없는 시대가 아닌가? 아들을 위해 반찬을 만들어 주는 것도 눈치가 보이는 시대이다. 그렇지만 부모에 대한 의무가 사라져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모가 자식의 결혼을 책임지는 풍습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모일간지에서 ‘부모의 눈물로 울리는 웨딩마치’라는 기획시리즈를 통해 이러한 잘못된 풍토에 대한 비판을 가하였다. 자녀에 대한 교육비로 줄어든 노후자금은 대학등록금과 학자금으로 다시 줄고 이제 결혼자금이라는 핵폭탄으로 인해 대폭 줄어들어 결국 부부의 노후를 어둡게 한다. 특히 대부분 가장인 남성이 경제를 책임지는 지금의 중고년 부부의 경우 그 부담은 엄청나다.
정년퇴직한 남성들의 자살과 이러한 부담은 무관하지 않다. 퇴직하고 자살하면 과거에는 할 일이 사라져 느끼는 외로움과 상실감 무기력감이 그 주요 원인이었지만 지금은 홀로 가족의 부양을 책임져야 하는 부담감에 비하여 자신들의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좌절감이 주요 원인이라고 한다. 과거의 가장들의 자살이 사치스럽게 보이기조차 할 정도로 현실은 절박한 것이다.
예전에도 자식의 결혼자금 때문에 비극이 발생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30여 년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부부가 딸의 결혼 때문에 2천 만 원의 빚을 지게 되었다. 당시의 2천 만원이면 지금으로 치면 1억 이상의 가치가 있는 돈이다. 하지만 그 빚은 부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결국 두 사람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딸이 출가외인이던 시절 오죽하면 딸 셋을 시집보낸 집에는 도둑도 들지 않는다고 하였을까? 그러기에 모두가 아들에 목에 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들조차 노후를 기댈 수 없는 시대이다. 한국 노인의 자살율은 OECD국가 최고의 수준이며 제일 으뜸가는 원인이 경제적인 이유라고 한다. 자식에게 이래저래 강탈을 당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돌아오는 것이 없는 헛된 희생이 빚어낸 비극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그런데도 여젼히 부모에게 결혼자금을 책임지라고 한다면 시대착오도 도가 지나치다 할 것이다.
결혼을 한다고 끝이 아니다. 요즘처럼 정년까지 일하기 어려운 시대에 중도퇴직은 일상화되고 있다. 명예퇴직(결코 명예롭지 않다) 등을 통해 길바닥에 나 앉게 된 자식들이 늘어나니 부모의 시련도 마찬가지로 늘어난다. 효도를 해야 할 자식들이 효도는 커녕 부모의 등골을 빼먹으려 드는 일이 적지 않다고 한다.
집이라도 한 채 있다면(부자가 아니다)그것을 담보로 사업자금을 뜯어내려고 하는 자식들 그것을 거부하지 못하고 노후를 망칠 위헙을 무릅써야 하는 부모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간단하다. 시대는 변했는데 사고방식은 옛날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우선은 부모가 자식에게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 못한 것이 문제이고 자식들이 부모의 처지보다 자신들의 이익에만 급급한 것이 또한 문제이다.
노후자금이 없는 부모가 주택연금을 통해 살아보려고 하면 자식들이 반대한다고 한다. 지금주택 연금의 이용자는 수 만명 수준이다. 전국에 주택을 가진 노인이 몇 명인데 겨우 이 숫자일까? 다른 노인들은 충분한 노후자금을 갖고 있기에 이용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허리가 휘도록 일하면서 주택만큼은 자식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낡은 신념에 매달리고 있는 것일까?
예전에 알게 된 할머니와 주택연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할머니는 살고 있는 주택을 가지고 주택연금을 신청하고자 하나 할아버지가 반대한다고 한다. 뜻 밖이었다. 자식이라면 자다가 깨어날 엄마가 도리어 주택연금을 신청하자고 하고 아빠가 반대하다니 내겐 조금 특이하다고 여겨졌다. 그만큼 생활이 어렵다는 것인데 남편이 경비 일을 하면서 수입을 얻고 있다는 것을 감안 하면 할머니의 생각이 더욱더 특이하게 느껴진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관습이 해체에 따른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등록금, 결혼자금, 사업자금 거기에 더하여 날로 높아가는 사교육비 이런 부담을 모두 부모가 짊어지며 자녀를 평생보장 해 주어야 된다는 ‘노예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자식들은 더 이상 대가 없이 평생 자신들을 부모가 돌보아야 한다는 이기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자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생산력의 발달로 새로운 생산관계가 생겼다면 사고나 가치도 함께 변해야 한다. 부모도 자식도 모두 그렇고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초협력사회’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새롭게 세워져야 한다. 어차피 한번은 거쳐야 할 과정일 것이다. 아마 모든 선진국들이 이러한 진통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선진국들의 부모 자식 관계를 차갑다고 생각한 적이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미래라는 것을 인정할 때 도리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유학 시절 나는 부모자식관계에 대한 충격적인 통계를 접하였다. 일본의 후생성(우리의 보건복지부)발행의 ‘생활백서’에 의하면 (1990년대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자식들보다 미국의 자식들이 결혼 후에 부모를 더 찾아간다는 것이었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미국의 자녀들이 결혼 후 부모를 더 자주 찾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된다. 그만큼 부모 자식 관계가 서로에게 의존하거나 부담을 안기는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협력관계이기 때문에 마음 편히 자주 찾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이러한 변화를 제대로 수용하게 될지는 의문이다. 전통적으로 혈연에 대한 집착이 유달랐던 우리 사회는 지금도 가족과 혈연에 집착이 매우 강하다. 그것이 역으로 혈연외적인 관계를 소홀히 하게 하여 결국 가족과 부모자식관계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상태를 유지시키는 것은 아닐까 싶다. 지금도 그것을 조장하는 가치관이 드라마 각종 방송 등에넘치고 있다. ‘마더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나라 그것이 우리의 민낯인 것 같아 서글프다.
그것은 아아러니하게도 비혼의 증가를 가져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모가 된다는 것의 부담이 너무 크니 결국 아예 자녀를 가지지 않기 위해 결혼을 거부하는 것이다. 물론 이성과 가정을 이루는 것이 주는 희생에 대한 거부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부모를 통해 받은 무한정적인 사랑을 자식에게 줄 자신이 없다는 점이 보다 큰 이유는 아닐까 싶다. “난 엄마처럼 안 살래”라는 말은 “난 엄마처럼 자식을 위해 희생하지 않을래”라는 말처럼 들린다.
자립해서 살아가는 자식의 모습을 흐믓하게 바라보는 부모! 함께 삶의 지혜를 나누고 협력하여 어려운 세상을 함께 극복해가는 사회 가족 단위가 아니라 사회가 자녀를 키워주고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는 사회 그러기 위해 자녀세대와 부모세대가 협력하는 사회 그것이 진정 ‘초협력사회’의 부모자식관계가 아닐까 싶다.
낡은 가치와 이별하라. “모든 아이는 모두의 아이”라고 한 스웨덴의 수상은 복지국가 스웨덴을 만들었다. “모든 부모는 모두의 부모”라는 마음으로 모든 자녀가 협력한다면 부모의 노후도 보장되고 자식들의 부담도 가벼워질 것이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자식들도 부모를 평생 부려먹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초협력사회’는 그러한 낡은 가치에서 해방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