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하여 8. ‘초협력사회’의 장애 (5) 이념적 대립으로 오염된 대한민국
8. ‘초협력사회’의 장애 (5) 이념적 대립으로 오염된 대한민국
“후진국 실정도 모르는 미국 경제학자들이 떠드는 소리는 무시하고 우리는 우리식으로 가면 된다.” 이 말은 누가 했을까? 좌빨(?) 정치가?아니다. 한국의 우파들이 하나님처럼 받들고 있는-반신반인(半神半人)이라고 함-바로 박정희의 말이다. 미국 경제학자들의 말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그들에게는 무척 놀라울 것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비판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자칫 ‘셀프디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좌빨들 입장에서 대놓고 박정희를 동지라고 할 수도 없다. 그들에게 박정희는 명백한 적이다. 인혁당사건을 조작하고 김대중을 암살하려고 했으며 유신헌법으로 영구집권을 획책한 박정희가 뭐라 했든 그는 자신들에게 타도해야 할 적인 것이다. 그를 지지한다는 것은 절대 허용할 수 없는 배신(?)행위일 것이다.
박정희의 말 한마디가 이렇게 좌우 진영의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주는 것은 그들이 진영논리에 빠져 있기 때문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예전에 홍준표가 무상급식운동을 펼치는 창원의 시민들에게 “창원에는 빨갱이가 많다”고 한 것도 이런 식의 진영논리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창원의 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상급식일 뿐이고 그들은 그것을 시민의 권리로서 주장한 것인데 왜 그들이 ‘빨갱이’가 되어야 하는가? 그들은 사회주의사상의 소유자일까? 그럴 리가 없다. 평범한 학부모들이 그런 무시무시한(?)사상을 가질 수 있을까? 내 아이 밥먹이고 싶어서 거리로 나간 평범한 시민을 이런 식으로 매도하는 것이 이른바 진영논리이다.
일본의 유명한 기업컨설팅사업가이며 평론가인 오마에겐이치는 이러한 진영논리를 ‘평성유신론’이라는 책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늘어놓고 이것은 좌파 저것은 우파의 주장인데 그렇다면 자신은 과연 좌파인가 우파인가 묻고 싶다고 하여 진영논리의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나 자신도 이런 진영논리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었기에 격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진영논리는 특정 이념을 무조건 숭배(?)하도록 강요하며 중도와 타협을 통한 최선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좌빨을 자처하는 필자이지만 이러한 진영논리에 회의를 갖고 있기에 보다 합리적인 답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기에 어느쪽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느 연구소에서 강연을 하고 있을 때 일이다. “나는 박정희라는 사람을 존경한다”고 하자 우파성향의 연구소장은 “좌파가 박정희를 존경하다니 놀랍다”고 비아냥댔다. 그는 나의 정치적 성향이 좌빨임을 알고 있었기에 한 소리지만 내가 가진 합리주의적 성향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유학 시절에도 이런 문제로 많은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 좌빨 교수에게 지도를 받게 된 나는 –좌빨이라서가 아니라 그 교수의 논문 등이 마음에 들어 선택-지도교수와의 대학원수업에서 자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의 대학원은 세미나의 독일식 발음인 제미나르의 약자인 제미라는 논문지도수업이 있다. 그 교수의 문하생들이 중심이 된 수업으로 필수적으로 참가하여 자신의 논문의 내용을 수시로 보고하고 교수와 학생들의 의견을 듣고 그에 따라 논문을 작성해 가게 되어있다. 물론 논문지도만이 아니라 책을 함께 읽고 내용에 대한 토론을 하기도 하며 진행되는 이 수업을 통해 학생들은 지도교수의 색깔을 입게 되어 진정한 제자로 거듭난다.
내가 공격을 당하게 된 것은 나의 ‘회색분자’(?)적인 기질 때문이다. 좌빨적 성향의 교수와 학생들은 무엇이 올바른지 아닌지 보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의 이념적인 색깔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것을 위해 학문의 객관성을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객관성이라는 것도 생각하기 나름이다. 같은 자료를 읽고 해석을 해도 이념적 프레임을 떨쳐 버리고 완벽한 객관성을 기하기는 어렵고 사실상 불가능하다. 설령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역시 이념적 색깔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 시각이 강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중도적인 노선을 걷는 사람이 이도 저도 아닌 기회주의자 즉 회색분자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나이가 젊고 좀 더 직설적인 성향을 가진 또 다른 ‘좌빨’교수는 이점을 대놓고 표현하였다. “자네는 합리주의자군”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것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내 길을 걸었다. 좌우를 넘어서 여러 교수의 지도를 받았고 그것을 논문에 반영하여 갔다. 객관적 자료를 동원하여 그것을 입증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마침내 지도교수는 나의 연구를 인정해 주었고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무려 10년) 어렵게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니었다. 귀국 후에도 이러한 이념적 성향 때문에 좌우진영으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아야 했다. 기독교도인 나는 교회에 성실히 출석하고 있었는데 목사들은 나의 좌파 정당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겨 “빨갱이 소굴에서 나와라”는 권유를 하곤 했다. 반면 좌파정당 내에서는 “왜 교회를 다니냐. 기독교는 우리와 맞지 않는다”라는 식의 개종권유에 시달려야 했다. 좌파정당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할 때는 이른바 00대1의 싸움을 해야 할 때가 많았다. 가장 좋은 생각이라고 판단된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들은 진영논리로 나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좌파적 프레임에 보다 공감하기에 좌파정당에 들어갔지만 맹목적인 진영논리를 펴는 그들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시 박정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박정희는 과연 우파일까 좌파일까? 모두가 박정희를 우파라고 단정짓지만 실상은 매우 다르다. 그가 펼친 개방경제정책 독재정치 인권탄압 권위주의 노조탄압 등은 분명 우파의 프레임에 속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가 시장경제주의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박정희를 좌파들이 비판할 때 자주 들먹이는 것이 재벌의 육성정책이다. 재벌위주의 경제정책이 오늘날의 한국경제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다는 식의 비판인데 박정희가 재벌 위주의 정책을 쓴 것은 맞다. 하지만 재벌을 키운 것 자체가 과연 시장경제주의적인 프레임에 속하는지 묻고 싶다. 오히려 국가가 경제를 주도하고 기획하여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재벌을 키운 셈이니 이는 사회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정책이 시장경제주의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 묻고 싶다.
더 놀라운 것은 박정희가 한국의 복지정책의 기본적인 골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국민건강보험을 비롯해 고용, 산재, 연금의 4대 보험이 박정희시대에 도입되었음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만일 그가 철권을 휘둘러 그러한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다면 아마 영원히 도입이 불가능했거나 도입하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오늘날 만일 이러한 제도를 도입하려고 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미국이 전국민의료보험을 도입하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박정희는 왜 이렇게 서로 상반된 정책을 쓰며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까? 이유는 그의 삶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일본이 파시즘으로 흐르던 1930년대에 사범학교(지금의 교육대학)를 다녔고 전쟁이 한창인 시절에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를 다녀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 교사와 군인 그들은 국가의 이념적 영향을 가장 잘 습득한 존재가 아닌가? 박정희의 사상에는 일본의 파시즘이 주입되었고 그것이 일생 그의 삶을 이끌었을 것이다.
파시즘이 무엇인가? 바로 국가 사회주의이다. 히틀러도 무솔로니도 원래는 사회주의자였는데 그들이 제1차 대전의 영향을 받아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사회주의에 반감을 느껴 파시즘을 만들었다는 것은 상식이다. 패전으로 굴욕을 강요당한 독일, 승전국이지만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 이탈리아 국민의 정서를 자극한 국가사회주의는 일본에서도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것이 세계대공황의 여파와 전쟁의 수행으로 더욱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복지정책의 경우 국민이 삶의 불안정에서 벗어나야 전쟁에 전념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폭넓게 도입되었다.
또 원래는 시장경제주의에 철저했던 일본경제는 세계대공황과 이어지는 국가주도의 경제발전을 통해 계획경제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른바 ‘다카하시재정’이라고 불리던 1930년대의 경제정책은 케인스의 경제사상인 수요주도의 정책을 군수공업의 발전을 축으로 실현하였고 그것이 국가의 경제에 대한 개입을 깊게 하였고 이어지는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이 그것을 전면적으로 확대시켰던 것이다. 메이지 이래로 민간주도로 발전한 일본의 경제가 그렇게 해서 국가주도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는 메이지 유신을 동경하여 ‘10월 유신’을 실시했지만 그가 한 모든 정책은 결국 그의 젊은 시절에 경험한 파시즘적인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새마을 운동’은 1930년대 일본의 농촌갱생운동을 모방했다는 주장이 있다. 세계 대공황은 일본에게는 상대적으로 영향이 덜 미쳤지만-미국시장의 위축으로 인한 수출 부진으로 타격을 입음- 그래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었다. 특히 농촌의 경우 별다른 생계수단이 없었기에 가장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농촌의 어려움에 도움을 주고자 한 정책이 농촌갱생운동이다. 구체적인 정책이야 다를 수 있지만 농촌이 스스로 일어서도록 한다는 면에서 유사성이 있기에 일본을 상당히 벤치마킹한 박정희가 이것도 참고했을 가능성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박정희가 무조건 일본을 베낀 짝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오해이다. 그의 개방경제정책은 파시즘아래의 일본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 하겠다. 이른바 블록경제체제가 수립되어 폐쇄적이었던 그 시대가 오히려 반면교사가 되었을 수도 있다. 중남미의 많은 나라들이 선진국직전까지 갔다가 실패한 것도 결국 수입대체정책이라는 자급자족주의적 정책을 도입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박정희는 그러한 실패를 피하고자 했고 이것은 파시즘과는 전혀 다른 이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결국 박정희가 추구한 정책들은 이념적인 프레임을 넘어선 ‘우리식’이라 할 수 있다. ‘83조치’를 기억하는가? 정부가 공적금융권의 이자율을 통제하여 현실보다 훨씬 저금리를 유지하기 때문에 생긴 이른바 지하금융시장인 ‘사채’가 판을 치던 시절 기업들은 너도나도 초과자금수요을 사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천문학적인 이자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기업들은 박정희에게 직소를 하게 되었고 박정희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초법적인 83조치로 사채 상환을 일시 동결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조치는 시장경제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외적으로 그것을 보류한 것에 불과하며 일상적인 경제는 여전히 시장경제주의에 입각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만이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많은 선진국들이 적건 많건 시장경제주의와 사회주의적인 통제경제의 혼합적인 정책으로 발전해 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자유주의의 시장경제주의의 첨단이라는 영국조차 그들이 경제적으로 약자이던 시절에는 갖가지 방법으로 규제를 실시하여 자국의 산업발전을 꾀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항해조례이다. 17세기 시민혁명(청교도혁명)후에 크롬웰이 발표한 항해조례는 당시 중개무역으로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네덜란드를 견제하고 영국의 위상을 높이고자 한 정책이었다. 오늘날에서 바라보면 터무니없는 정책으로 WTO에 제소될만한 위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영국이 산업혁명을 통해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자 이러한 규제들을 하나 둘씩 철폐하고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첨단을 달리게 된 것이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미국 하면 시장경제주의의 수호자로 여겨지지만 남북전쟁이 일어난 것이 보호무역과 자유무역의 대립으로 인한 것임을 생각하면 그리고 보호무역을 내세운 북부가 승리한 점을 감안하면 미국이 한동안은 보호무역주의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미국은 보호무역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으며 자신들이 유리할 때만 자유무역을 주장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이념적 프레임을 통해 판단해 버리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최근의 한일 경제갈등에서 드러난 프레임 대결은 그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다. 나라의 위기를 맞이하여 거국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좌우 프레임의 대결이 국가의 이익을 우선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것은 박정희 시대는 물론이고 최근의 가장 큰 위기인 외환위기 때에도 보이지 않았던 현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옳고 그름은 문제가 되지 않고 오로지 상대를 폄하하고자 하는 논리만이 난무하게 된다. 심지어 사실 왜곡마저 서슴지 않는다. 정규재라는 우파의 논객은 자신의 ‘정규재TV’에 출연하여 한국과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를 비교하며 한국의 과학기술이 뒤떨어져서 문제라는 주장을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의 노벨상수상자수가 29대0이라고 소개했다. 처음엔 과학상의 이야기인가 했는데 나중에 그가 “문학상과 평화상은 경제와 무관하니까 빼면 26대0이 됩니다”라고 말해서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문학상과 평화상을 집어넣으면 29대0이 아니라 29대1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우리의 노벨상 수상자를 의도적으로 0이라고 왜곡시켰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답정너이다. 유일한 노벨상 수상자인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좌파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면 무엇일까?
아무리 이념 프레임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도 이런 왜곡까지 일삼는 나라가 있는지 의문이다. 보통은 노벨상 수상 같은 국가적인 자랑거리는 정파와 이념을 넘어서 인정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을 폄하하고자 매국적인 행위조차 서슴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지어 노벨상 수상자 선정위원회에 로비를 하며 수상을 방해하는 행위까지 일삼았다. 수상 후에도 갖가지 루머를 퍼트려 수상의 가치를 폄하하였는데 이것이 과연 합리화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설령 폄하할 요소가 있다고 해도 감춰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이다. 박정희는 많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비난을 각오하고 말하면 세종대왕 광개토대왕 정조대왕이 이룬 업적을 합하여도 박정희의 업적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것은 능력이나 인격의 문제가 아니다. 업적이 우리나라를 얼마나 변화시켰는가의 관점에서 평가해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도 세종대왕도 정조대왕도 우리민족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그들 누구도 ‘부국강병’을 박정희만큼 이루지 못했다. 그 누구도 국민에게 풍요로운 삶을 제공하지 못했다.
물론 그것이 박정희의 개인적 자질과 능력 그리고 정책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어려가지로 우리는 운이 좋았다. 한반도의 분단과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지만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북과의 대치는 우리에게 미국과 세계의 엄청난 관심을 가져다 주었고 그로 인해 각종 원조와 혜택이 주어졌다. 또 우리로 하여금 하나로 뭉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고려와 조선의 1000년 우리는 단결할 동기를 가지지 못한 채 분열과 대립을 일삼았다. 하지만 그것을 식민지 지배 분단 전쟁이 해결해 주었기에 박정희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심지어 좌파조차-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었고 그로 인해 독재자 박정희는 상당한 국민의 지지 하에 소신껏 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업적을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자유당 정권과 민주당 정권도 그러한 조건을 갖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개혁을 하지는 못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우리는 해방 후 16년간 미국의 많은 원조에도 불구하고 세계최빈국의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객관적인 조건은 그것이 주관적인 의지와 능력을 통해 최선의 결과를 낳는 것이다. 박정희는 객관적 조건을 최선의 결과로 이어줄 매개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박정희가 성공한 또 하나의 원인은 그가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권을 탈취한 것도 중요한 원인이라 하겠다. 후삼국통일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에는 강력한 지도자가 드물었는데 이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권력을 잡은 경우가 적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태조는 정도전에 의해 좌우되는 존재였고 정도전을 죽이고 집권한 태종은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 하지만 태종은 매우 드문 케이스이고 대부분의 조선왕들은 그다지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정조대왕이 자신의 군사력기반인 장용영을 키워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으나 이른 죽음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말았다.
게다가 박정희는 부국강병을 확실하게 내걸고 정책을 성공시켜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계속받고 있었다. 고려조선의 1000년간 아니 그 이전까지의 역사에서 이토록 부국강병의 기치를 내걸고 개혁을 한 군주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의지가 없거나 있어도 그것을 실현할 추진력과 힘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개혁은 실패하거나 미진한 상태로 끝났다. 하지만 박정희의 개혁은 가시적으로 놀라운 성과를 보여 은둔의 나라 대한민국이 세계 속의 대한민국으로 바뀌는. 실로 획기적인 결과를 낳았다. 박정희는 대한민국 5천년 역사에서 하나의 획을 그어 버린 것이다. ‘박정희 전과 박정희 후’로.
하지만 좌파들은 오늘날에도 박정희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있다. 그의 실패 과실만을 강조하며 폄하하는데 급급하다. 마치 우파가 김대중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두 사람은 한국 근현대사의 좌우 날개였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근본적으로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김대중은 외환위기 때 개방경제정책으로 위기를 넘겼다. 박정희는 ‘우리식’이라는 바구니에 좌파적인 정책을 가득 담고 있었다.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대표로 하는 민주화세력이 없었다면 박정희는 김일성처럼 극단적 독재로 나아가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반대로 민주화만 강조하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이념의 프레임은 이토록 객관성을 상실하게 하고 왜곡과 과장된 폄하로 이끌어 ‘초협력사회’의 구축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한다. 상대방이 무엇을 말하든 반대해야 하고 우리 편이 아무리 잘못된 말을 해도 무조건 찬성하는 식의 태도가 사라지지 않는 한 협력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념을 넘어서 –버리라는 소리는 아니다-무엇이 과연 대한민국을 위해 바람직한 길인지를 생각할 여유가 있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협력이 가능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정치 이야기는 터부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프레임으로 상대를 옭아매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식의 태도로 맹목적으로 나를 공격해 대드는 사람들을 여러 번 만났다. 객관적 사실을 이야기해도 그들에게는 들을 귀가 없다. 자신의 신념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가 일반적이다 보니 결국 정치 이야기는 터부가 되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바람직할까 의문이다. 정치도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중요한 분야인데 그것을 아예 무시하라는 것은 엄청난 손해를 가져올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치가 삶과 무관하다는 식의 생각 자체가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박정희를 존경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한 연구소장과는 결국 인연을 끊었다. 그가 나를 정치적인 입장에서 공격을 했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싸웠을 것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냐고? 시간 낭비 힘 낭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념의 프레임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이야기도 소용없다. 그들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기 때문이다. 그것은 좌나 우나 관계 없다. 나와 00대1로 맞짱을 뜬 좌파정당연구소의 사람들도 귀가 막혀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였다.
이념적 프레임이 무섭다는 것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증명해 보겠다. 한일관계의 악화를 해결하고자 우리와 관계가 깊은 대마도를 찾아가 20여 명과 인터뷰를 하였다. 그 과정에서 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았다. 그들 대다수는 세뇌된 상태였고 일본이 우리에게 한 역사적 과오도 거의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 식민지에 대한 질문에 그게 뭐 어떠냐 는 식의 답변이 돌아온 경우가 허다했다. 그 점을 지적하자 우리 나라에서 이념적 프레임을 가지고 나를 공격한 사람들과 같은 태도를 보였다. 요새 유행하는 표현을 빌리면 “아몰랑 난 그냥 이대로 믿고 살거야” 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마도가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베를 지지하고 한국에 대하여 강경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니 다른 곳이야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어떤 프레임 속에 갇히면 어떻게 되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예수가 성경에서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어라”고 거듭 강조한 것은 이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차라리 낫겠다”고 한 예수의 말은 보이지만 사실은 진실을 외면하는 눈뜬 시각장애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창녀와 세리가 먼저 천국에 간다”는 말도 결국 자신들의 선입견 프레임에 갇히 사람들이 얼마나 눈과 귀를 닫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창녀와 세리는 죄인이라고 여겨지기에 자신들의 프레임을 가지기 어렵고 그래서 예수의 말에 귀와 눈을 연 것이다.
나와 결별한 우파 연구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잘못된 생각을 가진 지식인들을 바르게 이끄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원래 좌파였지만 우파로 전향하고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강연을 하거나 글을 쓰면서 살고 있다. 아울러 자신의 연구소에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강사를 불러 강좌를 열기도 한다. 그것이 자신의 뜻을 펼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물론 틀린 방법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다. 그가 다니는 강연장에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만 모인다는 것이다. 일단 그를 초청한다는 것은 그의 생각을 지지한다는 것이기 따라서 그의 강연을 듣는 청중은 같은 이념의 프레임을 가진 사람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결국 우리 나라 지식인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단합을 다지고 보다 구체적인 지식을 전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만일 전혀 다른 이념의 프레임의 장소에서 강연을 한다면? 아마 격한 논쟁 끝에 헤어질 가능성이 99.9%이다. 내가 좌파정당연구소에서 경험한 것처럼. 좌파정당연구소의 사람들은 나와의 헤어짐을 오히려 반겼다. “그만두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인물도 있었다. 보통은 그렇게는 말하지 않지 않는가? 헤어지는 마당에.
참으로 무섭다. 이념의 프레임이라는 것이. 진영논리라는 것이. 이성이 마비되는 마약과도 같은 존재 같다. 그런 마약에서 해방시켜 줄 치료제나 치료 방법은 있을까?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운이 좋았다. 만일 그가 오늘날 정권을 잡고 그의 소신을 밀고 나갔다면? 좌파로부터는 환영받고 우파로부터는 ‘빨갱이’ 소리를 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이다. 왜 그럴까? 이념의 프레임을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말 효과가 큰 마약 중의 마약인 것이다.
예수의 제자 바울은 “오호라 곤고한 자여 누가 있어 나를 구할까.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만이 나를 구하리라”라고 했다. 이것을 오늘날에 대입해 보자. “오호라 곤고한 자여 누가 있어 대한민국을 이념의 프레임이라는 마약에서 구해 줄까?” 하지만 그 다음엔 공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해당되는 구원자는 존재할까? 현재로서는 ‘?’ 만 남아 있다. 대한민국의 예수그리스도는 과연 강림할까? “나는 그것이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