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빛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하여 1. 대한민국은 지금 혼란기? 혼란은 일상이다.

닥터 양 2019. 12. 31. 19:32

빛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하여 살고 싶고 존경받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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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은 지금 혼란기? 혼란은 일상이다.

  선거법과 공수처법안을 두고 국회가 극단적인 대치상황을 보였다. 싸움은 두 가지로 나뉘어 전개되고 있다. 자유한국당과 여야연합군의 대결이 큰 구도를 만들고 있었다. 무조건 반대로 나서고 있는 자유한국당과 찬성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 여야연합군(이른바 4+1)의 대결이 먼저 발생했다. 하지만 4+1의 연합 내에서도 분열은 발생했다. 각각의 셈법과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모두가 명분을 내세우지만 이익이 포함되어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싸움이 계속되면서 왜 싸우고 있는지 보다 누가 이길 것인가가 더 중요해졌다. 공수처는 왜 필요하고 연동형비례대표제는 왜 필요한지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지 모르는 중요한 사안이 국민의 이해 없이 처리되었다. 명분보다 힘겨루기로 바뀐 싸움에 한숨이 나오는 것은 나만일까? 서로가 국민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왜 그것이 국민을 위한다는 건지 정도는 계속 주장해줬으면 했다.

  하지만 이런 혼란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2009년 이른바 미디어법 통과를 놓고 여야는 극단적인 대치상황에 놓였고 결국 여당인 한나라당은 다수를 무기로 의결을 강행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각가지 불상사가 일어났다.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의 공중부양 같은 당의 김선동 의원의 최루탄 사건도 이 때에 일어났다. 이러한 사태로 인해 국민들은 국회에 대하여 화합을 요구하였고 심지어 국회의원을 수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당시에 KBS에서 주최한 국민대토론에서는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협조하는 국회에 대한 의견을 소리 높이 외쳤다.

  하지만 협조하는 국회란 자칫 야합하는 국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의 민주정치에 대한 맹목적 찬양을 하던 패널들에 대하여 미국이 과연 바람직한 모습으로 발전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의 성적표는 우아하고 품위 있게 사이좋게 의원들이 토론하는가 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나라가 얼마나 국민의 행복을 보장하고 있는가에 달렸음을 명심해야 한다. 몸싸움도 최루탄도 없는 미국의 국회가 미국국민들에게 최선의 삶을 제공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자칫 사이좋은 국회는 국민의 여망보다 자신들끼리의 화합을 통해 실속을 챙기는 야합의 집단이 되기 쉽다.

  그런 점에서 싸우는 국회는 국회가 살아있음을 그래서 국민의 삶을 대변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누군가는 국민의 이익보다 특정 세력의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싸우고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국민의 이익이 쉽게 관철되지 못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하지 않던가? 악의 세력이 쉽게 죽어주는 법은 없는 일 그러기에 국회는 싸움의 장이 되어야 하고 될 수 밖에 없다. 국회가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이 되기 위해서는 말이다. 악의 집단은 사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이 싸움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지만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주장에 격하게 공감한다. 누구나 자신에게 가장 큰 이익이 집중되기를 원한다. 그러기에 서로 다투거나 협조하거나 하며 살아왔다. 공정, 정의, 평등 등의 개념도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만들어지고 그것이 힘을 갖게 되자 힘없는 민중도 과거에 비해 월등히 좋은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러한 민중의 삶을 격하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고자 하는 소수의 세력은 끊임없이 도전을 하고 있고 그로 인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싸움은 일정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 부침이 거듭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격렬하게 이루어지는 시기도 있고 소강상태에 빠진 경우도 있다. 우리로 말하자면 촛불혁명시기에 격렬하게 이루어지다가 한 때 소강상태를 맞이했고 조국이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다시 격화되었으며 현재는 그 연장선상에서 싸움이 전개되고 있다. 멀리 봐도 419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 87민주화혁명 등의 거대한 파도가 있기도 하였고 그 사이에 침체기도 있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파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일종의 성장통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인생이 그렇듯이 사회나 국가도 살아있다면 성장을 해야 하며 그렇지 못한 경우 정체와 퇴행으로 접어들게 되어 있다. 성장통이란 사춘기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어른이 되어 어른의 성장통을 계속하는 사람이야말로 빛나는 노년을 맞이한다. 링컨이 말한 것처럼 40세의 얼굴은 자신이 책임져야 하듯이 노년의 삶은 자신의 책임이다. 제자리에 머물러 아무것도-변화와 혁신을 거부한다는 의미에서-하지 않는 사람의 노년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러한 파도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안정을 원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안정 못지 않게 변화도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인류는 오늘까지 성장을 거듭했다. 그것은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더 불행해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일지 모른다. 성장은 새로운 행복을 가져오지만 인간은 그것에 곧 익숙해져 감동을 잊어버린다. 그러면 변화를 원하게 되는데 그 변화가 새로운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이런 식의 반복은 다람쥐 쳇바퀴 돌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인류는 그렇게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진보가 없이 제자리에 멈춘다면 퇴행을 거듭하게 될 것이니 진보 없는 세상은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을 막기 위해 인류는 성장을 거듭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혼란은 일상이고 그래야 한다. 200년도 더 지난 헌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100년도 더 된 정당이 그대로 유지되는 미국이야말로 성장을 거부하는 정체된 나아가 시대에 뒤떨어진 세상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멈춰있다면 결과는 퇴행이 아닌가?-나라가 아닐 수 없다. 아직도 승자독식제 선거인제도와 같이 이제는 더 이상 맞지 않는 옷을 고집하는 것은 전통의 수호라는 이름 아래에 이루어지는 정체이자 퇴행인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구호하는 예수의 시대에나 통하는 주장이 아닌 것이다. 그들이 지겨워했던 영국의 계급제도를 타파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던 혁신이 지금은 또 다른 형태의 구태의연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혼란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역사와 전통으로 말하면 미국은 우리에게 명함도 못 내밀 신생국이다. 그런데 그런 신생국이 역사와 전통에 사로잡혀 있고 우리가 혁신적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앞선 자가 뒷선 자가 되고 뒷선 자가 앞선 자가 된다는 이야기의 증거인 것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가 정체에 빠진 사이에 그들이 앞서갔지만 우리는 그들을 다시 따라잡고 앞서가고 있는 것이다.

  마치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역전과 재역전의 그것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인생역전이란 그리 드물지 않은 일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려서 공부 잘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학교에서도 꼴찌가 어느 날 일등이 되는 신화 역시 드물지만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고 머무느냐 아니면 성장하기 위해 몸부림치느냐 이다. 그 차이는 자신의 삶에 끊임없이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공무원이 되면 성장이 멈추고 민간기업에서 일하면 좀 더 성장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아마 이러한 변화의 동기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혼란이 성장의 증거라면 우리는 혼란을 일상으로 받아들일 내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성장을 보다 훌륭하게 이룰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성장을 이루고 있는 대한민국을 더 나은 성장으로 이끌 수 있도록 우리 자신들이 더 성장해야 할 것이다. 개인의 성장이나 사회의 성장이나 그 성장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 하는 개인과 사회의 부단한 노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