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 문제는 부족이 아니라 고립이다.
후기 - 문제는 부족이 아니라 고립이다.
얼마 전에 버스를 탔는데 라디오에서 서글픈 이야기가 나왔다. 어느 어르신이 20만원 밖에 안 되는 정부보조금에 의지해 살고 있는데 그마저 방세를 내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어 추운 겨울에 난방도 제대로 못하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한동안 나는 그 생각에 잠겨 고민을 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분들을 인간다운 삶을 사시게 할 수 있을까? 인간다운 삶이란 별 것이 아니다. 밥 세끼 걱정 없이 먹고 추운 겨울엔 따듯한 방에서 잘 수 있고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할 의복이 있으며 아플 때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정도의 삶이면 되는 것이다. 해외여행이니 자가용이니 그런 것은 뭐라 뭐라 해도 사치라고 본다. 이런 삶을 모두가 살아가는 것이 과연 불가능한 일인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서 떠 올린 것은 바로 주거문제이다. 방세를 해결할 수 있다면 비록 적은 수입이라도 난방도 하고 세끼 식사도 가능하지 않을까? 사실 다른 것은 줄일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식사는 내 경험으로 보면 밥하고 김치만 먹어도 일단 살아갈 수 있다. 필자의 경우 간장에 밥비벼먹고 산 기억도 있으나 그나마도 행복했다. 옷은 기왕의 것을 수선하며 입으면 일단 급한 불을 끌 수 있다. 나머지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주거는 줄이는 데 한계가 있다. 아무리 즐여도 기본비용은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20만원을 받으시는 어르신들이 한 곳에 방을 얻어 사신다면 어떨까? 서울에서 변두리 또는 지방도시에는 월세 30만원에 방이 둘 있는 집을 얻기가 어렵지 않다. 실제로 필자는 20만원 월세에 방 둘짜리에서 살아 본 적도 있다. 그렇다고 시설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재건축을 위해 소유하고 있던 주인 입장에서는 방을 비워두기 보다 그걸로 비용이라도 뽑기 위해 임대를 했기 때문에 저렴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수준의 방이 그 지역에는 나름대로 꽤 있었다.
어르신들이 모여 방을 얻고 산다면 난방을 못하실 이유가 없어진다. 30만원을 방세로 낸다고 해도 두 분이 살면 10만원이 남는다. 그러나 어르신들은 굳이 한 방에 혼자 있지 않으셔도 될 것 같다. 그럼 큰 방에 두분 작은 방에 한 분 아니면 둘둘 씩 넷이 사신다면 어떨까 합니다. 그럼 방세를 제외하고 50만원이 남는다. 이 정도면 생활비 난방비 등으로 어느 정도 충분할 것이다. 어르신들은 사치나 낭비를 모르시니 더욱 그렇다.
네 분의 어르신이 모인 삶 나는 그것을 가족의 재구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본래라면 그분들을 자녀들이 돌보아야 한다. 흔히들 어르신들은 자식들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다고 한다. 왜 그럴까? 어차피 안 될 거 안 한다고 해야 속이 편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여우의 신포도이야기처럼 말이다. 진심을 말하자면 그 분들도 자식들의 부양을 받으며 행복한 노년을 보내시고 싶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언감생심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부유해 졌지만 대한민국의 마음은 가난해 지고 있다. 훨씬 못살던 시절도 가능했던 부모부양이 몇 배는 더 윤택해진 지금 먹고 살기 어려워 못하는 일이 되었단다. 예전엔 배두드리며 살았나?
그러나 세상을 탓하면 무엇 하겠는가? 현실이 그렇게 되고 있다면 그것을 원망하고 불평하기 보다는 대책을 세워야지. 가족에 대한 새로운 정의 그것이 필자가 생각한 대책인 것이다. 가족의 유대관계가 약해지고 끊어졌다면 그것을 회복하면 된다. 그러나 혈연적인 가족의 회복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미 사람들은 개인주의에 완벽하게 젖어 있고 그러기에 자신들의 삶 이외에는 관심조차 없다. 자식을 위해서는 아무리 돈을 써도 아깝지 않아도 부모를 위해서는 몇 푼 쓰기도 아깝다는 말은 새로운 말이 아니다. 효성이 지극하셨던 필자의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다. 그러니 지금이야 두말할 나위 없지 않겠는가?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고 어려운 사람들끼리 뭉칠 수 밖 에 없다. 어르신들이 새롭게 가족을 이루고 산다면 누구보다 그 분들이 행복해 질 수 있다. 비단 금전적인 문제 만이 아니다. 어르신들은 언제 건강이 악화될지 모른다. 최근에 봉사하러 어르신의 집을 방문한 여고생들이 그 어르신의 얼굴빛이 안 좋아 보여 나중에 다시 방문했더니 방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음을 발견하고 119에 신고하여 목숨을 구하게 하였다는 훈훈한 이야기를 들었다. 돈 문제도 크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새로운 형태의 가족은 매우 효과저인 대책이 아닐까 싶다.
최근 들어 젊은 대학생과 어르신이 한 집에 동거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대학생은 주거비를 아끼고 어르신은 외로움을 줄일 수 있으니 그야 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이라 하겠다. (나는 이 속담이 이상하다. 누이와 매부는 부부니 결국 그 집안만 좋은 건데 왜 이럴 때 쓰는지 모르겠다) 어르신만의 가족도 좋지만 이런 가족도 젊은이들의 아픔을 줄여 준다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으니 매우 바람직하다 하겠다. 곳곳에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지만 외로워하는 독거노인이 늘어가고 있다. 설사 독거가 아닐지라도 젊은 이가 집에 들어오면 당연히 활력이 생긴다. 그러니 이러한 방법은 폭넓게 실시할 수 있으니 현실성도 매우 크다 하겠다. 이 또한 가족의 재구성의 하나이다.
어르신 문제만이 가족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이혼가정이 늘어나고 성윤리가 자유로워지면서 편모편부가정이 문제가 되고 있다. 과거에도 편부편모는 많았으나 그 때와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과거에는 이혼보다는 사별로 인한 경우 전쟁으로 인한 생이별 등 부득이한 이유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남은 부모는 이를 악물고 자녀들을 키웠기 때문에 비교적 아이들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필자의 경우 처가도 외가도 모두 편모가정이나 그 자녀들은 비교적 잘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편부편모가정은 대부분이 이혼에 의한 경우라고 할 것이다. 설령 사별이라고 해도 어려가지 이유로 남은 부모가 자식을 위해 이를 악물고 살지 못하는 경우가 예전에 비하여 늘어난 것 같다. 이해가 가지 않지만 -과거에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적었지만 지금은 훨씬 늘어났으니 더 좋은 조건 일 텐데 말이다. 더구나 한부모가정에 대한 지원도 예전에 없이 잘 되어 있는 데-현실이 그러니 이 또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한부모가정의 가장 큰 희생자는 물론 아이들이다. 가난은 생각보다 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부모인 것이다. 그리고 잘못된 재혼으로 인해 아이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자식만큼은 지켜야 한다는 과거 어머니들의 투지와 인내는 어디갔는지 없고 아이들이 말도 못하는 학대를 당하는 경우조차 있다. 이런 일은 한 부모 가정만의 일은 아니다. 아이들에 대한 학대 방치 등은 여느 가정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로 인해 많은 아이들이 집을 나와 거리를 헤매고 있으나 이에 대한 대책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들을 가족에게 보내는 것이 고작인데 그렇다고 그들의 문제가 해결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가 지원하는 이른 바 쉼터는 턱없이 부족할 뿐 아니라 아이들의 입장보다는 어른들의 입장에서 운영되고 있으니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가출팸이라고 하는 집단에서 온갖 학대를 받고 있으면서도 집에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것을 보면 가출팸에서의 삶이 가정에서의 삶보다 나은 것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역으로 말해 그들의 가정이 얼마나 지옥 같은 곳인지 알 수 있는 증거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그들을 이해하고 돌볼 가족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필자는 그런 아이들을 접하면서 자그마한 관심으로 그들을 정상적인 삶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다. 가족의 재구성은 그런 점에서도 필요하다. 무너지고 파괴된 가정을 대신해 그들의 부모가 되어 줄 가족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믿는다. 하지만 아무도 이런 것을 돌아보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친권이라는 벽이 그러한 것을 가로 막고 있다. 의붓엄마에 의한 의붓자녀 살해사건으로 친권에 대한 제한과 고발의 강화를 이루고자 하고는 있으나 어느 정도 실효가 있을지 의문이다. 미국처럼 사소한 잘못에도 친권을 정지 또는 박탈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우리나라처럼 친권이 신성화된 것이 좋은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고 그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 학대아동 방치아동들은 날로 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가 없는 가족이라도 가족의 재구성이라는 생각은 무관하지만은 않다. 다른 나라에서도 어느 정도 그럴 것이라고 믿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사람들의 인생의 목적이 가족의 행복인 것 같고 특히 물질적인 풍요가 가장 중시되는 것 같다. 벌어들인 모든 수입은 오로지 가족의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위해 쓰인다. 가족의 범위는 과거에는 일가전체였지만 지금은 오로지 미혼의 자녀와 부부로 이루어진 핵가족으로 좁아졌다. 그리고 자녀들은 일단 결혼을 하면 부모를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린다. 그러나 부모들은 여전히 출가한 자녀들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핵가족내로의 물질적인 소득의 집중은 상대적으로 가족 밖의 사람들의 소외를 전제로 하고 있다. 한마디로 가족 밖 그것도 핵가족 밖의 인간은 인간이 아닌 것이다. 가족 밖의 인간들은 핵가족에게 있어서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자신들의 가족의 번영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말이다. 그 가족이 자본가가족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밖의 사람들은 착취하여 자신들의 물질적인 수입을 극대화시키려고 할 것이다. 그것이 옳다고 믿고 있고 또한 행복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핵가족내로 집중된 물질적인 수입은 가족 안의 행복을 증진시키기도 하지만 불행을 가져올 수도 있다. 재벌가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재산싸움은 좋은 예이다. 모재벌그룹 회장은 자신의 형에게 “ 그 인간이 ”라는 표현을 썼다. 이 정도면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있지 않는가? 그들은 제사를 지낼 때 조차 서로를 불편하게 대하였다고 한다. 상대를 감시원을 통해 감시하였다는 소문조차 있었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모르나 모두가 헛소문은 아닐 것 같다. 재물의 집중이 과연 행복을 가져오는 것인지 묻고 싶게 하는 이야기이다.
재벌이나 부자가 아니라도 이런 식의 문제는 생길 수 있다. 10억을 벌어다 줘도 만족 못하는 아내의 이야기가 그렇다. 10억을 벌어다 주는 남편이지만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있기 조차 싫다고 한다. 돈이 행복에 전부는 아니라는 소리지만 벌어다 준 남편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이다. 그가 만약 -나쁜 이야기지만- 바람을 피워 애인에게 일억을 준다면 얼마나 칭찬을 받을까 생각해 보라. 실제로 이런 기분 때문에 남자들이 룸살롱같은 퇴폐업소를 드나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안되는 돈으로 칙사대접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혈연적 가족이라는 페쇄적인 곳에 모든 것을 집중시키는 것이 이와 같이 오히려 불행을 가져올 것이라는 나의 생각이 너무 오바일지 모르나 근거는 충분하다. 원래 외부의 적이 있을 때 내부의 단결이 이뤄진다. 과거에 먹고 살기 어려울 때는 가족이 단결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풍요로와지니 단결이 깨지고 황혼이혼 같은 문제가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가족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온갖 프로그램이 등장하지만 효과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런점에서 앞서 있다고 볼 수 있는 구미국가들의 이혼율은 올라가기만 하고 있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아빠들은 과거에 비하여 자녀와 아내들에게 상냥하며 엄마들은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따라다니며 도울 정도로 자상하지만 가정은 해체일로에 놓여 있다. 도대체 왜 그럴까?
그것은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들이 너무나도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적은 자녀들 속에서 너무나도 귀하게만 자랐다. 그런 그들이 가족을 이루니 희생과 섬김이 실종되지 않으면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런 상태에서 관계개선의 노력이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다. 잘해주면 잘해줄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상태에서 잘해줘라 식의 관계개선프로그램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차라리 과감히 밖으로 눈을 돌려라. 100억의 연수를 갖고 있는 남자가 10억만 가족에게 주고 나머지를 밖으로 돌린다면 어떨까? 실업과 병 등으로 고생하는 가족에게 천만원씩을 나눠준다면 900가정이 살아난다. 900가정이면 4명씩이라고 해도 3600명이 된다. 3600명은 아마 그를 하나님처럼 받들 것이다. 자식과 아내에게는 외면당하는 남자가 갑자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니 얼마나 좋은가? 적어도 룸싸롱에 가서 날리는 돈과 비교하면 얼마나 값진 것이 될까? 이거야 말로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마당쓸고 엽전 줍는 겪이다.
대한민국의 부자들이 이렇게 살아간다면 우리나라의 사회문제는 그것으로 끝이 될지 모른다. 부자 뿐이 아니라 중산층이라도 가능하다.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많다. 특히 어린이 청소년 노인들 장애인들이 그렇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여유 있는 사람들이 가족이 되어 주어 교류를 하면서 도움을 준다면 자신들도 기쁘고 그들도 살아날 수 있지 않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몫돈을 어딘가에 기부하는 것에 그다지 찬성할 수 없다. 그토록 많은 기부가 이루어지지만 특히 미국의 경우가 그렇지만 그렇다고 획기적으로 사람들의 삶이 사회가 달라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착각일까? 차라리 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가족이 되어 정을 나누고 그런 가운데 절실한 문제를 도와 주면 어떨까? 대학에 대한 기부는 결사반대하고 싶다. 그 돈이 과연 제대로 쓰여질지도 의문이지만 성적순으로만 장학금을 지급하는 우리나라 대학의 특징상 여유 있는 학생들에게 그 돈이 돌아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여유 없는 학생들은 알바를 하느냐 학업에 집중을 못해 좋은 성적을 못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가족이다. 가족이 해체되고 무너지며 병들어 가는 데 그것을 전통적인 혈연중심의 가족내에서만 해결하려고 버둥거리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 묻고 싶은 것이다. 혈연적 가족은 선택을 할 수 없다. 원해서 낳은 자녀고 부모도 없다. 형제자매는 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다툼과 대립은 자연스러운 것일지 모른다. 문제는 그로 인해 생기는 피해의 대부분을 노인과 어린이 청소년이라고 하는 약자들이 다 짊어지고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냥 ‘가정의 회복’이라는 공허한 구호만을 계속 외칠 것인가?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하여 몇 가지 대책을 제시한다. 첫째 약자들끼리 서로 가족이 되어 돕는 것이다. 노인들의 가족이 대표적인다. 대학생과 어르신 청소년과 어르신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 또 하나는 강자와 약자의 결합이다. 정상적인 가족들이 약한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가족이 되어 돌보는 것이다. 교회로 치면 오래된 신자가 새 신자를 돌보는 것 같은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강자끼리의 결합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조건 없이 이루어지는 결합이다. 혈육으로서의 가족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 되는 가족을 만들어 가면서 삶이 보다 윤택해진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문제는 부족이 아니라 고립이다. 어느 곳에 돈이 넘치고 어느 곳엔 사랑이 넘치고 있지만 다른 곳에는 그것이 부족해 고통을 당한다. 배부른 사람에게 밥을 먹이고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그 남아도는 밥조차 없어 배가 고파 울부짖고 있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사랑을 받아 사랑의 고마움도 모르는 데 어느 사람은 너무나 부족해서 외로움에 울고 있다. 돈과 사랑의 미스매치가 일어나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모르는 고립상태이기 때문이다.
시장경제란 서로에게 필요하고 남는 것을 교환하는 것이다. 그것이 물물교환이든 화폐나 지폐를 매기로 하든 마찬가지이다. 산업혁명이라는 것도 폭발적으로 발전한 생산력을 필요한 곳으로 보내는 수단이 없었다면 그것을 받을 시장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생산된 물건이 쌓여 있지 않고 전 세계로 밀려나갈 때 비로서 산업혁명은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경제가 안 좋다고 매일 외쳐지지만 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돈이 어딘가에 뭉쳐 있다. 그러나 어느 곳에 돈이 돌지 않아 고통 받는다. 은행은 돈이 쌓여 고민인데 서민들은 여전히 돈을 빌리기가 쉽지 않다. 대기업은 적립금을 쌓아 놓는데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들은 자금난에 시달린다. 백화점의 명품코너는 불티나게 물건이 팔리는데 재래시장은 파리만 날리고 있다. 문제는 부족이 아니라 고립인 것이다. 한 곳에 뭉쳐져 버려지고 있고 부족해서 울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부모님이 비교적 윤택한 삶을 사셨다. 그런데 그런 부모를 둔 사람에게 큰 고민이 있다. 가난한 부모라면 자그마한 선물도 감동을 줄 것이지만 윤택한 부모는 만족을 시키기가 어렵다. 결국 카드를 긁어 비싼 것을 사드려야 만족하신다. 그나마 내 부모는 재벌 근처에도 못가는 사람들이지만 재벌을 부모로 둔 자녀는 어떻게 해서 부모님을 만족시킬 것인지 생각해 보라. 또 재벌부모라도 마찬가지의 고민은 있다. 웬만한 건 다 갖고 있을 텐데 뭘 선물해야 자식을 만족시킬 것인가?
땅콩귀환이 문제가 되어 사회가 떠들썩했는데 이 역시 이런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재벌삼세로 태어났으니 태어나면서부터 재벌이었다. 그러니 여간해서는 만족할 수가 없다. 그런 자녀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 부모가 택한 것은 한 없이 들어주는 것 아니겠는가? 결국 안하무인이 된 자녀는 이런 식의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아울러 그런 재벌자녀들의 상속을 위해 그들은 더욱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혈안이 된다. 삼대 사대 내려가지 자녀들의 수가 몇 배로 늘어난다. 그들이 재벌로서의 삶을 살게 하려니 얼마나 많은 기업과 재산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니 더욱 착취를 하고 문어발식 확장을 할 수밖에 없다. 포장마차에 재벌이 진출하지 않는 게 다행이다. 불법이 못할 뿐이지 만약 합버이라면 할 것 같다. 프렌차이즈 커피숍운영 영화관의 매점까지 손에 넣고 운영하는 판이니 말이다. 할 수만 있다면 대한민국의 부를 다 휩쓸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부가 다시 뭉쳐진다. 그리고 압도적 다수는 서러움에 살아야 한다.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혈연중심의 가족주의이다.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교회와 가정을 주었다고 가르치지만 나는 가끔 교회는 몰라도 가정은 악마가 준 것이 아닐까 싶다. 가정이 생기자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하나님을 배신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부부가 작당해서 저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배신을 부추긴 것이 뱀의 모습을 한 사탄이니 너무나 이야기가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가족이 좀 더 열려진다면 어떨까? 외부사람을 거부하고 자기들끼리 뭉치는 그런 가족이 아니라 혈연을 넘어선 새로운 가족의 재구성을 통해 퍼져나간다면 어떨까? 그래서 한 사람도 가족의 밖으로 밀려나서 비참한 삶을 강요당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필자는 그렇게 꿈꾸고 있다. 가족의 이름으로 온 갖 범죄와 악이 자행되는 현실이 그렇게 바뀐다면 비로서 가정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 할 것이다. 가족은 자기들끼리 배타적으로 뭉쳐야 할 기지가 아니라 세상을 아름답게 할 기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랑의 기지 말이다.
어렸을 때 수사반장이라는 드라마를 열심히 보았다. 언제나는 아니지만 수사반장은 자주 나에게 문제의식을 심어주었다. 몸을 의지할 곳조차 없어 쓰레기통에서 생을 마친 사람들의 이야기는 커다란 쇼크였다. 왜 내게는 이런 집이 있고 먹을 것이 풍부한 데 저들은 저렇게 죽어가야 하나 라고 고민했다 .그래서 어른들에게 묻자 “그러니까 공부열심히 해 안 그럼 너도 그런 꼴 된다” 라는 차가운 답이었다. 그런 어른들의 차가움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내가 어제 먹다 버린 밥을 남겨 줄 수 는 없을까 생각도 해 보았다.
성장하면서 항상 그 문제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대한민국사회는 이렇게 풍요롭게 바뀌었는데 왜 세상엔 아직도 그렇게 힘든 사람들이 있어야 하나...젊고 튼튼함에도 불구하고 게을러서 힘든 사람들이야 그렇다고 해도 노인 분들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왜 그래야 하나? 그런 문제를 고민하는 가운데 내린 결론은 가족의 양면성이었다. 가족은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악하게 만드는 나쁜 집단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엘리야가 되고 싶다. 누군가 세상을 바꿀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 준비를 하는 엘리야...예수님이 활동하기 전에 등장해 그가 활동할 수 있는 길을 닦은 -산을 낮춰 계곡을 메워 길을 평탄케 한다는 -엘리야 역할을 한 세례요한처럼 나도 그렇게 길을 닦고 싶다. 모두가 그 길을 걸어 세상을 아름답게 하길 바란다. 대한민국 나아가 세계의 모든 형제자매들이 그렇게 해서 갈 수 있는 길을 기대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